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율리시즈(Ulysses)에 얽힌 단상

(2007년 봄, 스물네살의 어느 날)


 2003년 3월 2일. 태어나 줄곧 대구에서만 살다가 대학 진학을 서울로 하게 되어 난생 처음으로 사대문 안에 둥지를 트고 생활하게 된 날이다. 모든 것이 낯설기에 느껴야 했던 불안감과 낯섦음, 하지만 오랫동안 꿈꿔왔던 캠퍼스의 낭만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하며 복잡한 심정으로 대학 첫 수업을 듣게 되었다. 내가 가장 먼저 듣게 된 수업은 영어영문학과 개설 교양 수업인 '영미 단편 소설 강독'이었다.

 책 읽기는 좋아했지만 평범한 머리로 똑똑한 친구들과 겨루어 좋은 대학 가려 애쓰다 보니 많은 책을 읽지 못했던 고교생활에 대한 아쉬움, 영어 과목을 좋아했기에 영어영문과로 진학하고 싶었던 당시의 바람. 이런 이유들이 겹쳐서 나는 이 강좌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나는 이 수업 광경만은 눈 앞에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물론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었기에 각 작품에 대해 깊이 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난생 처음으로 외국 소설을 원어(原語)로 읽는 것은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처음 20만원을 훌쩍 넘는 전자사전을 서둘러 구입하게 된 것도 이 때의 당혹감 때문이었다. 다음 날 수업의 예습을 위해 미리 작품을 읽어두려는데 몇 페이지 안 되는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단어가 100개가 넘게 나왔으니 그 때의 내 심정은 굳이 더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원어로 돼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교수님에게 애매한 부분에 대한 자신의 의견 및 분석을 내놓는 고학번 형, 누나들 옆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영어 공부에 대한 열의을 한 번 쯤 불태울 만도 한데 이상하게 아직까지 영어 실력에 대한 부족함은 자주 느껴왔지만 그것을 붙잡고 죽어라고 공부한 적은 없었다.

 내가 제임스 조이스(James A. Joyce)를 처음 알게 된 계기도 이 수업이었다. 물론 아무리 《율리시즈 Ulysses》가 그의 대표작일지라도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교양 수업에서 그것을 다루지는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 수업에서는 《더블린 사람들 Dubliners》에 수록된 <애러비 Araby>라는 단편만을 다루었다.) 하지만 20세기 영미문학 최고 작가라 불리우는 조이스인 만큼 교수님은 작가 소개에 다른 작가들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 특히 그의 대표작이자 영미문학사에 길이 남을 《율리시즈》에 대해 소개하실 땐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지역의 영미문학 전공 대학생들 조차도 기피하고자 하는 작품'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직 이 작품을 읽지는 못했지만 이 소설엔 '의식의 흐름 기법(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아주 난해한 서술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말 그대로 작중 인물의 의식을 따라 서술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한 통시적, 순차적 서술이 아니다. 게다가 의식이란 아직 언어화 되지 않은 개념이기에 작품 속 문장은 주어, 동사, 목적어를 완벽하게 갖춘 정제된 문장이 아니다. 따라서 화제가 갑작스레 다른 곳으로 전환되는가 하면 한 문장 안에서도 몇 가지 시점이 뒤섞여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분량도 만만치 않다. 올해 번역된 《율리시즈》한글판의 경우에는 1400페이지라는 어머어마한 분량으로 책을 펼치지도 않은 독자들을 미리 잔뜩 기죽게 만든다.

 이렇게 교수님이 우리를 약올리시듯 들려주는 작가, 작품 소개는 나로 하여금 더더욱 《율리시즈》에 도전하고 싶게끔 만들었다. 또한 당시만 해도 영문학도를 꿈꾸던 나로서는 언젠간 이 작품을 만나게 될 날이 오리란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물리학도 지망생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거쳐 마침내 초끈이론에 이르는 난해한 과목 소개를 듣게 될 때 느낄 법한 두려움, 도전의욕에 비유하면 적절한 표현일까?

 하지만 이런 설렘도 정신없이 흘러가는 대학교 새내기 생활 속에서 조금씩 빛이 바래져 갔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학교와 전공까지 갈아탄 채 전혀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몇 년간 《율리시즈》를 잊은 채 살았던 것이다. 시간은 더 흘러서 새 학교에서도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그런데 뜻밖에 군 복무를 하는 중 나는 실로 오랜만에 조이스와 《율리시즈》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올해 초 신문을 읽던 중 고려대 김종건 교수가 자신이 약 40년 전 번역한 적이 있던 《율리시즈》를 오랜 세월의 수정을 거쳐 노(老)교수가 된 지금 다시금 번역해 내놓았다는 기사를 읽게 된 것이다.

 조이스는 《율리시즈》에서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 단 하루 동안의 일을 약 8년의 집필 과정을 거쳐 수 백페이지로 완성했다. 이것을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지구 반대편의 한 노교수가 40년에 걸쳐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한 편의 위대한 작품은 시공간을 넘어서 존재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위대한 작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일 것 같다. 일반적으로 10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하얀 종이 위에 펜으로 뿌린 잉크 자국이 수 백년 동안 사랑을 받는다. 저승에서 내려다 본다면 이보다 뿌듯할 수 있을까?  위대한 걸작은 시간 뿐 아니라 공간의 벽도 허문다. 그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어 수많은 교수들이 연구할 것이고 그 보다 더 많은 수의 논문이 쏟아져 나온다. 그 보다 더 많은 대학생들은 열심히 그것을 공부할 것이고 더 많은 대중(大衆)이 그것을 읽고 사랑해줄 것이다.

  그것은 나아가 문화가 되고 가치관이 된다. 수많은 번역가와 출판계, 대학을 살리는 산업이요 경제가 된다. 조이스가 자신이 쓴 《율리시즈》를 두고 "향후 오랜 세월동안 세계의 대학 교수들은 이 작품을 연구하느라 정신없을 것이다." 라고 한 적이 있다. 아마도 이 말은 《율리시즈》의 이러한 파급효과를 미리 염두에 둔 천재로서 던진 여유로운 조크가 아니었을까?

 적어도 최근에 《율리시즈》를 번역한 김교수에겐 조이스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는 《율리시즈》를 대학원 시절 처음 만나 번역을 하여 중간에 개정판을 낸 후 70세를 전후한 오늘날 평생의 결정판을 낸 것이다. 그의 삶은 차라리 《율리시즈》를 위한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열정과 헌신에 나는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공들인 번역본도 비록 재창조의 과정을 거치지만 어디까지나 조이스의 원작을 모사(模寫)한 것에 그칠 수 밖에 없다. 어찌 생각하면 이번 번역본은 그의 열정과 더불어 한(恨)의 결정체이리라.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은 흔히 '창작'에 무게를 두어 번역자에게 찬사를 보낼 때 쓰이곤 한다. 하지만 결국엔 번역자는 이 말로 인해 2인자로서 굳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0년을 노력해도 8년의 집필을 한 원작자를 따라잡을 수 없는 숙명은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르를 연상케 한다.

 《율리시즈》 재번역판의 기사는 4년간의 세월 속에서 잊혀진 나의 도전 의욕을 새삼 불태웠다. 신입생 시절의 근거 없지만 b확신했던 예감, 조금은 빛이 바랬지만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오기의 불씨. 서점의 해외 문학 코너에 꽂힌 묵직한 1400페이지짜리 검은색 《율리시즈》는 내 가슴 속에 이런 묘한 감정들을 마구 휘젓는다.

 하지만 결코 서두르진 않을 것이다. 가장 먼저 《율리시즈》의 기본적 모티브인 《그리스 로마 신화》와 《오딧세이 Odyssey》를 읽을 것이다. 그 다음엔 작가인 조이스와 그의 표현 기법을 이해하기 위해 반(半)자전적 작품 《젊은 예술가의 초상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을 읽을 계획이다. 아직도 이르다. 《율리시즈》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기 전에 그의 단편집이자 처녀작인 《더블린 사람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섭렵한 다음에야 비로소 《율리시즈》에 도전할 것이다. 이 과정을 끝내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난해한 작품인 만큼 이 정도의 노력을 들일 가치는 충분히 있으리라 믿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율리시즈》에서 다룬 하루는 1904년 6월 16일, 내 생일 바로 전 날이다. 유치한 억지이긴 하지만 참 기분 좋은 우연이다. 즉 이렇게 오랜 세월을 거쳐서 복잡하고 난해한 《율리시즈》의 긴 하루를 다 읽고 나면 마치 내가 진정 다시 태어난 것 같지 않을까? 나로서도 이래저래 인연이 있는 작품인 데다가 한 세기에 걸쳐 전 세계인으로 부터 객관적으로 검증 된 작품인 만큼 최소한 그것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가 같지는 않으리라 확신한다.

 여담을 덧붙이자면 한 가지 부담되는 사실은 4만원에 육박하는 저 율리시즈스러운 책값이다. 게다가 그의 다른 작품들까지 다 사려면 대체 얼마의 돈을 요구하는 것일지......《율리시즈》라는 제목이 새삼 와닿는다. 저것을 읽기 위해서 신화 속 오디세우스(율리시스는 그리스 신화 오디세우스의 로마식 이름이다) 처럼 오랜 세월의 시련과 역경을 딛고 작품을 읽어나가야 할 내 운명 까지도 예견한 듯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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