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저는 군인이 아닙니다
(2007년 이른 봄, 스물네살의 어느 날)
인간이 자기 정체성을 갖는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스스로에게 부여한 정체성은 그 사람의 행동과 사고의 나침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이다', '나는 우리 집안의 맏아들이다', '나는 한 가족의 가장이다'와 같은 자기 정체성은 그로 하여금 정체성에 적합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며 역(逆)으로 그 행동으로 인해 정체성은 더 강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과 현실적으로 주어진 역할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 우리는 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즉, 본인은 스스로를 OOO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현실은 나로 하여금 OOO처럼 행동하기를 기대한다면(혹은 강요한다면) 그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비효율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거나 때로는 극단적으로 역할을 뿌리친 채 파멸에 이르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대표적 사례가 바로 지금 내가 몸담은 대한민국 군대라고 할 수 있겠다. 과반수를 훨씬 넘는 구성원이 간부(장교, 부사관)가 아니라 비자발적으로 징집돼서 병사로 복무하는 대한민국 군대. 당연히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군대라는 집단에 온전하게 둘 수가 없다. 그들은 모두들 (대게는 무의식적으로) 소리없이 절규하고 있다. "저는 군인이 아니라구요!"
물론 병사로서 군에 북무하고 있거나 복무한 적이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자신이 군에 복무하던 시절에만은 자신이 '군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한 적이 없었다고 반문할테니까. 하지만 좀더 원론적으로 생각해보자. 군인이란 무엇인가? 훈련소 시절 대성박력으로 부르짖던 '국군의 사명'까지 떠올리지 않더라도 군인이란 '나라 지키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병사로서 당신이 하는 일이 과연 얼마나 나라를 지키는 데 관련된 일이었는지 되돌아보자.
근무장과 내무실(생활관) 청소, 여름엔 제초, 겨울엔 제설을 포함한 잡다한 사역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는가? 게다가 간부들 뒤치닥거리 해준 일도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높으신 분들끼리 잡담하는 데 방해 안 되도록 전화 받는 일, 커피 타주기, 담배 심부름 하기, 라면 끓여주고 다 먹으면 설거지 해주기 등등. 덧붙여서 요즘은 많이 사라졌다지만 병사들간에도 고참이니 후임이니 하며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가.
물론 어떤 일이든 분업이란 형태 하에서는 목표 달성을 위한 '직접적인 과업'과 '간접적인 과업'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위와 같은 군대의 추억을 '신성한 국방의 의무'와 연결시키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건너야 할 합리화의 다리가 너무도 많다. 즉, 내가 군복을 입은 이상 나를 군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수긍하고 있지만 '나라 지키는 사람' 이라고 해버리면 전혀 수긍되지 않는, 도무지 3단 논법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라. 직업을 묻는 란에 적는 '직업 군인'이란 말 너무 어색하지 않은가?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은 자신의 정체성과 소속감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이것들은 어느 정도의 자발성에 기인한다. 당연히 군대에서 그것을 기대하려면 비록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모든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복무하는 모병제(募兵制)를 실시할 수 밖에 없다. 많은 국가가 이렇게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 나라의 군인들은 적어도 정체성과 현실 사이에서 괴리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군인이고 군인의 일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나라는 다르다. 다수의 구성원이 비자발적으로 끌려온 사람이다. 조직의 소수만이 가질 법한 정체성을 그 두배가 넘음직한 구성원들에게 강요하고 있으니 오히려 군인이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가 그 다수로 인해 희석되고 심지어는 삐딱하게 왜곡된다. 군인이란 단어의 의미는 소수 간부들에겐 자신의 직업을 가리키며 말할 수 있는 '나라 지키는 사람'이다. 반면에 대다수의 병사들은 군인이란 '지랄맞고 드럽고 치사하고 아니꼽고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집단'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로써 군인이란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결정할 영광은 언중의 다수가 동의하는 후자에게로 돌아간다. 이렇게 희석되고 왜곡된 '군인'이란 단어를 여전히 간부와 병사들이 함께 쓰고 있다. 게다가 외부에 군대에 대한 이미지를 설파하는 경로가 주로 병사로 근무하다 제대한 예비역의 쓰디쓴 추억담이란 사실은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는 간부들도 피해자다. 간부들은 사실 '지랄맞고 드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운 일'에서 조금 벗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정의된 '군인'이라 불리워야 하니 좀 억울할테다. 이 모든 것이 군 사기 저하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저는 군인이 아니예요" 애석하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병사들이 무의식중에 절규하는 소리다. 세상의 어느 조직이 대다수가 소속감과 애착을 갖지 않은 상황에서 정상적인 운영이 가능할까? 굳이 운영을 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로 조직에서의 이탈을 방지해야 하며 둘째로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의무 복무와 억압적인 분위기. 딱 들어맞는다. 빙고!
그래서 나는 강력하게 부르짖고 싶다. "나를 군인이라고 부르지 말아달라!"
물론 내가 당장 징병제(徵兵制)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하자는 것은 아니다. 초강대국 사이에서 돈은 쪼달리고 나라는 지켜야 하니 당연히 비자발적 국방 인력은 어느 정도 추가해야 한다. 다만 진정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할 사람만을 '군인'으로 가려 뽑고 어쩔 수 없이 충원되는 만 18세~25세 남자들은(이들이 꼭 남자여야 하느냐의 여부는 논외로 하고) 군인이라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굳이 가칭을 정하자면 '의무 국방 보조 요원' 정도? 아니면 현재의 '군무원' 개념을 좀 더 확장하는 것도 괜찮다. 어쨌든 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직접적인 국방 관련 업무를 시킬 게 아니라 청소, 제초, 제설, 빨래 등등 시키면 된다. 말하자면 대기업체의 정식 직원이 아닌, 용역 업자처럼 생각하자는 것이다.
혹자는 이로 인해 국방 업무에 큰 구멍이 뚫리지나 않을까 걱정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현재 간부를 제외한 병사들도 국방 관련 업무에 기여하는 비중이 무시할 만큼 적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군대에서 진짜 군인 역할을 해야 할 간부들이 과연 얼마나 자신의 업무를 완수하고 있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실제로는 간부들이 해야 할 일들의 많은 부분을 병사에게 전가시켰으니 당연히 병사들의 비중이 크게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방력 약화에 대한 우려는 기우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일반 대기업에서는 대부분 청소, 쓰레기 수거, 식당 업무 등을 담당하는 외부 용역 업자들을 두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기업은 이들에게 월급은 정식 직원을 10분의 1만 주면서 뻔뻔스럽게도 직원에 상응하는 애사심과 복종, 규정을 강요하며 직원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만에 하나 그런 짓을 했다가는 업자들도 분노할 것이며 기존의 정식 직원들까지도 애매해진 애사심과 자부심에 사기가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런 일이 버젓이 행해지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 군대인 것이다.
나를 군인이라 부르지 말아달라. 어차피 약소국에 태어난 죄로 끌려왔으니 까짓거 간부들 시키는 잡일들 2년 남짓 꾹 참으며 할 수 있다. 오히려 이렇게 현실을 받아들이며 체념하는고 있기에 나름 윗사람 아랫사람과 트러블 없이 군생활 잘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진짜 군인들끼리나 가질 법한 충성심과 상관에 대한 존경심을 우리들에게 강요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한 발 물러나, 국방 운영의 효율을 기하기 위해 의무 복무자들이 군인(진짜 군인)에게 복종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하지만 비자발적으로 복무하는 청년들에게 마저도 그들 간에 계급이니 경례니 군인 흉내 내도록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코미디이다.
모두들 사랑하는 부모, 형제, 친구, 애인과 해어져 불쌍하게 끌려온 신세다. 많은 의무 복무자들은 그들 사이에 계급이 생김으로써 자신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비정상적으로 표출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병사들간의 폭력과 폭언이다. 단체 생활에서의 질서가 무너질까 두렵다고? 여러분이 지금까지 속해온 어느 조직은 계급이 있어서 멀쩡하게 돌아갔던지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만약 저렇게 될 경우 국방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상급자(간부에게든 병사간에든)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이 약화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누가 나에게 저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조금도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웃기지 마세요. 애초부터 그딴 거 전혀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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