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또래문화 속에서 잃고있는 것들

(2005년 봄, 스물두살의 어느 날)


나는 부모님과 떨어져서 현재 서울에서 혼자 생활을 하고 있다.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이 모두 비슷한 경우인지라 같은 과 내의 학생이라 할지라도 학교 근처에서 사는 지방민, 소위 '녹두 주민'들 사이에는 더더욱 공유하는 점들이 있게 마련이다. 사실상 그들에게는 방과후 생활에서 대인관계를 접하는 범위가 그들 외에는 거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혼자 생활하는 데 느끼는 어려움이나 외로움 등등은 사실 1년 정도의 생활만 지나면 무디어지든지 익숙해져버린다. 좁은 방에서 불을 끄고 잠자리에 혼자 누워 천장을 바라볼때의 외로움, 부모님이 다 해주시던 밥, 빨래, 청소, 세탁 등등을 내가 해야한다는 부담도 이제는 당연한 나의 일상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하지만 혼자 사는 생활이 1년반쯤 지난 요즘 나는 나 자신의 새로운 면을 느끼곤 한다.

지금 나의 하루를 살펴보면 아침에 일어나서 같은 동네 자취하는 친구와 함께 등교한다. 수업 가기 전에 간단히 아침을 대신해서 식사를 하고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다. 같이 수업을 들은 친구들과 점심을 함께 먹고 오후 수업을 듣는다. 수업이 늦게 끝나는 날은 친구들과 저녁을 먹을 때가 많다. 남은 공부가 있다면 그들과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하거나 때론 과제물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방과 후 집에 들어와 혼자 휴식을 취하다 잠이 든다.

즉, 나의 하루는 모든 부분 혼자있거나 친구들과 함께있는 시간으로 꽉 차있다. 이런 생활 패턴은 내가 또래들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익히기에는 좋은 환경이지만 반면 어른들을 대할 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익힐 시간은 전혀 없다.

그나마 대할 수 있는 어른이라면 교수님 정도? 하지만 우리 경영대의 특성상 모든 전공 수업은 100명 이상이 듣는 경우가 많고 그나마 교양 수업은 각각 개설된 단과대로 흩어져있는지라 전공수업 만큼의 애정을 쏟기가 어렵다. - 물론 교양수업 마저도 대단위 수업이 더 많다. - 결국은 교수와의 만남은 수업이라는 매개체를 통한 피상적인 인간관계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생활을 1년 정도 하다 보면 가끔씩 내가 어른과 함께 오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는 불편함을 느낀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때때로 나오는 말이긴 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대구로 내려가 부모님과 함께 살 자신이 있냐고 하면 나는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내가 부모님이 봤을 때 크게 잘못하는 행동을 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혼자 있을 때 보다는 더 느낄 수 밖에 없는 부자유스러움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부모님 품을 떠난지 1년 반이 된 지금도 가끔씩 방학 때나 연휴에 대구를 찾아갈 때는 반가움과 아늑함, 편안함과 함께 부자유를 느낀다. 또한 부모님과 가끔씩 나누는 대화에서도 그분들과 함께 살던 때는 갖지 않았던 의견차나 대립이 있는 경우가 많다. 또래들에게는 용인되던 논리나 행동이 가끔씩 우리 부모 세대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 있는 것이다.

가끔씩 나도 스스로 변화된 모습을 느낄 때가 있다. 어른의 말이 옳든 그르든 일단은 그것이 맞다고 보고 따르던 순진한 - 어쩌면 바보같이 보이는 - 모습이 이제는 많이 사라졌다. 물론 그들의 말이 100%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엔 적어도 세대간의 가치관 때문에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차이를 인정하고 '져줄 줄 아는' 고개숙이는 모습이 많이 사라진 것 같다. 말하자면 어른과 나 둘 중 하나가 자신을 양보하고 상대방을 이해해야 할 상황이라면 예전엔 내가 손아래사람이니 무조건 양보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도 이젠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어른이라는 인식 속에서 그와 나는 동등한 지위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 옳다고 믿기에 양보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조금 더 파고들자면 그나마 내가 어른을 대할 유일한 기회가 교수님이란 점도 때때로 내가 어른을 대할 때 장애가 되곤 한다. 교수는 내가 참신한 사고로 때로는 당돌하게 자신의 논리에 지적을 가할 때 칭찬하곤 한다. 가끔씩 자신의 학문적 벽에 갇혀서 새로운 생각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 교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정당한 논리가 뒷받침된 경우엔 기꺼이 나의 말을 인정해 준다. - 이 점은 또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사회의 보통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논리가 옳든 그르든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경우에는 무조건 상대방을 배척한다. 특히 그 상대방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경우 - 그 나이차가 클수록 더더욱 - 그 비난의 정도는 더 심해진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게 말이야." ,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어디서 말대꾸야.", "이놈 싹쑤가 노란 녀석이네." 등등....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를 얘기하기는 힘들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그들이 생활했던 환경과 문화, 논리가 있을테고 세상이 바뀐 만큼 우리는 새로운 그것들 속에서 살고있을테니깐. 하지만 문제는 내가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만날 사람들 중에는 내 또래 세대의 사람이 전부가 아니라는 데 있다. 어쩌면 나를 평가하고 그 평가에 기반해서 나에게 더욱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사람은 오히려 우리 부모세대의 사람일 수도 있다.

부모님 품 아래 살던 19년, 이제 20대 초반에 부모님 품을 벗어나 나는 사회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아무런 완충점도 없이 나는 지나치게 양 극단을 지나온 듯 하다.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 사이의 적절한 중용점을 거치치 않은 채 곧바로 친구들과의 문화에 익숙해져버린 나를 보며 요즘 많은 생각을 한다.

아직도 부모님 타령하며 마마보이를 벗지 못한 몇몇 서울 및 수도권 거주 동기들을 볼 땐 내가 그나마 좀 더 성장했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들이 방과후 매일 부모님,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식사를 하며 나누는 대화들. 그 대화를 함으로써 세대간 벽을 넘나드는 사고를 해나갈 많은 기회들...요즘은 같은 가족이라 하더라도 한 자리에서 식사를 나눌 기회가 잘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나마 가끔씩 나눌 수 있는 그런 대화들을 나는 가질 수 없다는 생각에 때때로 그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예의바르다는 말이 어른 말을 무조건 고분고분 잘 따른다는 말과 사실상 동의어로 쓰이는 대한민국. 그 나라를 조국으로 둔 나로서는 조금은 걱정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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