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어릴 때부터 나의 최고 가치는 바로 자유였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자유를 사랑한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피곤한 세상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군대나 감옥을 우리가 싫어하는 그곳에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이 없듯이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라는 조건이 따른다. 그렇다면 병病주고 약주는 것이 싫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유를 헌납할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
자유란 남의 구속을 받지 않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권리이다. 당연히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은 자유를 갈망한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픈 것들 중에서 실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거의 없다.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만드는 일은 밤을 새워도 끝이 없겠지만 할 수 있는 항목들에 동그라미를 치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자유는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능력이다. 경제학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분모에, 욕망의 충족을 분자에 둔다. 그리고 분모가 무한대로 발산하기 때문에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분모를 싹뚝 자르기 위해 머리 깎고 깊은 산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 하나? 무언가를 깨달으신 분들은 무소유無所有 속에서 행복을 얻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범인凡人인 나는 티끌 같은 자유라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고있다.
물론 채울 수 없는 욕망에 노예가 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술이나 담배에 빠져 살며 알콜 중독자, 헤비 스모커가 되기는 싫다. 하지만 나의 경우처럼 주량이 너무 약해서 술을 못 마시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다. 또한 이놈의 담배를 끊기는 힘들지만, 그것을 필 줄 모르던 때로 돌아가기는 싫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다가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여유까지 빼앗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돈의 노예가 되기는 싫지만 그것이 없는 것 보다는 충분히 많은 것이 좋다.
우리가 원하는 많은 것들의 상당부분은 돈을 통해서 충족될 수 있다. 물론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도 빼놓을 수는 없다. 가족, 친구, 사랑을 비롯해서 시간, 생명, 존경, 소속감 등등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학창시절에 듣던 “성적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라는 말은 결코 “성적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와 같은 뜻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돈은 ‘전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아주 큰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린시절부터 『탈무드』를 통해 돈의 중요성을 배운다.
사람을 해치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 번민, 불화 ,그리고 빈 지갑이다.
이 가운데서 가장 위험한 것은 빈 지갑이다.
욕망의 무한하다는 이유로 그것의 충족을 지레 포기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미덕美德이 아니다. 무거운 바위를 짊어지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짓눌려 살기 보다는 영원히 바위를 떠미는 시지프스가 되고 싶다. 태양에 다다를 수 없지만 자유를 위해 용감히 날아오르다가 에게해에 빠지는 이카로스를 나는 동경한다. 인간이 많은 돈을 벌고자 노력하는 것은 마치 시지프스나 이카로스처럼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고픈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 중 돈 싫어하는 자 이들에게 돌을 던지라.
모두가 돈을 원하지만 그것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손가락질 받는다. “행복하세요.”, “건강하세요.”라는 인사는 환영받지만 “부자 되세요.”가 익숙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 어느정도 부富를 쌓은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할 때는 주위의 시선이 한층 더 싸늘해진다. 가난한 사람들이 땀흘려 일하는 모습은 아름답고, 부자가 더 많은 부를 추구하는 것은 추하다는 뜻일까?
매슬로우Maslow 피라미드의 제일 아래층 벽돌을 채우는 것이 아름답다면, 오히려 이 험한 세상 안전하게 살기 위해, 높은 지위에 소속되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벽돌을 만드는 것은 더욱 고매한 일이 아닌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은 천박한 몸부림인가? 나는 배가 고파서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것보다는 입신양명을 위해서라도 공부를 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돈에 연결되는 순간 거대한 피라미드는 순식간에 뒤집히는 듯 하다.
신체의 자유를 위해 교통, 통신수단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헤겔을 비롯한 철학자들은 진선미眞善美라는 높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 학문, 종교, 예술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기술, 학문, 종교, 예술조차도 빈 지갑을 가진 이들에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왜 잊어버리는 걸까. 나 역시도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편리하고 싶다. 더 많은 음악회를 가고 싶고 멋진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 그래서 경영학과에 왔고 돈을 버는 공부를 한다.
수전노는 돈을 모으기만 할 뿐 쓸 줄은 모르는 사람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표만 모으고 영화는 보지 않는 것과 같다. 돈 자체는 숫자와 그림이 그려진 종이에 불과하다. 그에게 돈이란 자유를 위한 티켓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작은 종이조각들의 노예가 돼버린 수전노는 불쌍한 바보다. 안타깝긴 하지만 그는 충분히 비웃음을 살 만하다.
한편 어리석은 수전노 때문에 다른 이들에겐 소중한 자유의 조각들이 쓸모없이 창고에서 썩기도 한다. 바보처럼 주걱으로 얻어맏고 뺨에 붙은 밥풀을 떼먹는 짓은 한심한 일이다. 그렇다고 멀쩡한 새의 다리를 부러뜨려서도 안 된다. 부를 쌓는 행위 자체는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단,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의 행동은 비판받아야 한다. 돈이 자유와 같다면, 부의 축적 과정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자유의 범위를 벗어난 방종이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자유와 욕망을 내던진 성직자는 물론 아주 존경할만하다. 그러나 돈을 추구하는 이들을 백안시白眼視하는 그 모두가 진정으로 무소유의 덕을 깨달은 성인聖人들일까? 물론 자유를 추구하느라 애쓰든 말든 그것은 남이 상관할 바 아니다. 하지만 혹시 그들은 유유자적悠悠自適이니 안빈낙도安貧樂道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자신의 게으름을 포장하는 것은 아닐지. 만약 거짓된 무욕無慾의 가면을 쓰고서 자유를 위해 땀흘리는 이들을 손가락질한다면 그는 스스로를 속이는 비겁한 사람이다.
어느 집단에서는 현세의 자유를 매달 십분의 일씩 아껴두었다가 천국에서 엄청난 이자와 함께 돌려받는 연금을 운영한다. 파스칼은 비용cost과 위험risk의 원리를 이용해 이렇게 말한다.
신神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나는 교회에 다닌다. 왜냐하면 교회에 가는 것은 큰 수고를 요구하지 않는데 만약 신이 있다면 교회를 다녔으니 안심이고, 설령 신이 없다 해도 큰 수고를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다. 반대로 교회를 안 다녔는데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진정 큰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 주어진 이 삶이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오지 않으리라 믿는다. 소중한 시간을 최대한 자유롭게 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언제나 노력하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많은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상 많은 몽상가들이 꿈꿔온 유토피아, 코케인, 아르카디아는 이제껏 없었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각자의 행복은 스스로가 추구하고 개척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을 모두가 행복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이기주의자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