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침묵은 금이다'의 새로운 해석

(2008년 이른 봄, 스물 다섯살의 어느 날)



"침묵은 금이다"의 새로운 해석

 부대 인트라넷 게시판에 장병 독후감 대회 공지가 올라왔다. 대상 도서는 정훈도서, 진중문고, 부대 내 도서관에 비치된 도서들이었다. 정훈도서는 이름에서도 짐작되듯이 장병들을 세뇌시키는(?) 책들이기에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반면에 진중문고와 도서관 문고들은 공간적으로 부대 내에 있을 뿐 사회의 여느 책들과 똑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장병들은 이 대회에 참가할 땐 후자의 책들을 읽고 독후감을 낸다고 한다.

 나름 문학 소년으로 인정받는 나도 당연히 몇몇 사람들로부터 이 대회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군 입대 이후엔 바쁜 대학 생활 동안에 읽지 못했던 책들을 많이 읽는 것이 목표였던 나는 지난 2년간 그야말로 죽도록 읽었다. 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독서는 내 마음의 안식처요 현실에서의 돌파구였다. 그래서 이 시기에 내가 쓴 글들을 살펴봐도 80% 이상은 책에 관한 이야기 뿐이다. 현실에서는 나에게 새로운 소재를 던져줄 특별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 생에서 2006년관 2007년은 몸은 군대에, 눈은 책 위에, 마음은 온 세계를 떠돈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가능하면 같은 시간에 좋은 책들을 많이 읽기 위해 오랜 세월을 통해 검증된 고전들을 중심으로 읽어왔다. 비교적 계획을 잘 실천하여 지금까지 읽은 책들을 세어보니 권 수로 따지면 대략 150권이 조금 넘었다. 그만큼 당장이라도 독후감을 쓰고픈 욕구를 일으키는 책들도 적잖이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이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작년 독후감 대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때 역시도 나는 참가 권유를 받고 독후감 한 편을 써냈다. 무슨 책을 읽고 어떤 독후감을 써냈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특별히 명문名文이라고 까지는 못하더라도 나름 깨끗하게 문장을 다듬었고 짜임새도 탄탄하게 하여 꽤나 괜찮은 글을 냈다는 사실이다. 마치 플로베르Gustave Flaubert가 작품을 쓸 때 그러했다고 하듯 스스로 쓴 글을 소리내어 읽어보고 어색한 부분은 최적의 한 단어를 찾아내기 위해 고치고 또 고쳤다. 내 글을 제출하고서 다른 참가자가 올린 글도 몇 편 읽어보았다. 최우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상권 내에 드는 것은 문제가 없어보였다.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순위권은 커녕 예심에서 탈락했다. 사람들은 군대 행정이 똑바로 돌아가는 것 봤냐며 위로했지만 씁쓸한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를 진정 당황케 한 것은 호기심에 읽어본 최우수 수상자의 독후감이었다. 내용은 일단 둘째로 치고 그가 읽은 책 제목이 먼저 들어왔다. 〈똑똑한 놈은 웃으면서 군대간다〉. 책 내용이나 독후감 내용이나 따로 설명 안 해줘도 뻔했다. 다른 수상작들도 얄팍한 대중소설이나 자기계발서, 처세서를 읽고서 그것을 군인이라는 현재의 신분과 연결지어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천편일률적인 독후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때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군대에서 평가하는 훌륭한 독후감은 그 책의 문학성, 예술성과는, 그리고 독후감의 문장력, 표현력, 짜임새와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군대에서 주최하는 글쓰기 행사에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책들은 대체로 내용이 쉽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기 때문에 똑 떨어지는 깔끔한 독후감을 만들기는 쉽다. 하지만 포상휴가 며칠 얻으려고 마음에도 없이 '보람찬 군생활'과 같은 글을 쓰기는 싫었다. 어느 군가에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는 부모형제에겐 죄송한 말씀이지만 내가 똑똑하지 못해서 그런지 제대를 눈앞에 둔 지금도 차마 웃으면서 군대는 못가겠다.

 군대에서 읽은 많은 책들 중에 괜찮은 책을 추천해달란 말을 자주 듣는다. 그 때는 독서광이 아니라도 쉽게 읽을 만한, 그러면서도 감동을 주는 책들을 몇 권 추천한다. 소설이라면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스타인백의《분노의 포도》. 하퍼 리의《앵무새 죽이기》,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등등을, 산문집으로는 장영희의 《내 생애 단 한번》, 피천득의《인연》정도를 든다. 조금 어려운 소설도 좋다면 조이스의《젊은 예술가의 초상》, 보르헤스의《픽션들》,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도 추천한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 바꿔서, "군인이기에 특히 공감했던 소설은 무엇인가?"라고 물으신다면 나의 대답은 매우 달라질 것이다. 내 머리 속에 적당한 한 권의 책이 있다. 그것은 결코 전우애를 다룬 것도, 뜨거운 애국심을 다룬 것도 아니다. 전쟁의 긴박한 상황을 숨막히게 연출하겨 스릴을 안겨주는 것도 아니다. 그 소설은 다름 아닌 프랑스 최고의 단편작가 기 드 모파상의 소설 〈비계 덩어리 Boul de Suif〉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접한 건 군대에서가 아니다. 옛날 대학생 시절 수업 교재로 쓰던《Norton Anthology of Short Fiction》에서〈Boul de Suif〉라는 영어 번역본으로 이 작품을 본 적이 있지만 내 영어 실력으로 읽기엔 너무 어려워서 중도에 포기해버렸던 것이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한 마을 사람들이 피난길에 오른다. 피난 마차에는 귀족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타고있다. 그들 가운데는 볼 드 쉬프 -비계덩어리라는 뜻- 라는 이름의 창녀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며 같은 마차에 탄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도시락을 꺼내 먹는 그녀를 볼 땐 고픈 배를 안고서 그녀를 부러워하며 심지어 그녀가 권하는 음식을 넙죽넙죽 맛있게 받아먹는다.

 마차는 프로이센군의 검문을 받아 어느 마을에서 멈춘다. 피난민들은 인근의 한 시골집에 갇히게 된다. 프로이센군의 감시 하에 사람들은 언제 그곳을 떠날 수 있을지 몰라 초조해한다. 며칠 후 피난민들은 한 적군 장교가 볼 드 쉬프와 하룻밤 동침하기를 원하는데 그녀가 계속 거절하기에 자신들이 풀려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녀의 정절에 감탄한다. 하지만 곧 그녀 때문에 자신들이 풀려나지 못한다는 생각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설득한다. 결국 주위의 눈총과 압박을 이기지 못해 그녀는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적군 장교와 하룻밤을 보낸다.

 당연히 그들은 모두 풀려난다. 떠나는 마차엔 볼 드 쉬프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를 멀리하려 하고 심지어 따돌리기까지 한다. 이제 그녀는 천한 신분의 창녀인데다가 적군 장교에게 몸까지 허락한 더러운 여자로 여겨진다. 그녀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누구도 위로하거나 동정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만 이용하고, 그렇지 않을 땐 버리는 냉혹한 집단이 바로 내가 경험한 군대이다. 큰 일이 터졌을 때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다른 누군가에게 필사적으로 책임을 떠넘기려 눈에 불을 켜는 비열한 집단이 바로 군대이다. 그리고 희생양이 발견되면 모두가 그 한 사람을 마녀로 몰아가는 곳이 바로 무시무시한 군대이다. 책임의 소재는 가장 많은 업무를 손에 대는 사람에게 있을 확률이 높게 마련이며 또한 그는 가장 약자일 가능성 또한 높다. 당연히 군대에서는 그 희생양이 주로 병사가 된다. 물론 공식적은 책임은 결제권을 가진 간부들이 진다. 하지만 보이지 않게 서류와 도장 뒤에 오가는 서슬 퍼런 비난의 화살은 병사를 향한 경우가 많다.

 문화평론가이자 미학자인 진중권은 일종의 마녀사냥인 '이지메'를 분석하면서 '마이너스 1의 평화'라는 재미있는 개념을 내놓았다. 집단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란 쉽지 않다. 언제나 인간은 허점이 있게 마련이고 그에 따른 실수는 집단의 불행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집단은 본능적으로 가능하면 적은 구성원들이 피해를 입되 많은 사람이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찾는다. 다대다多對多의 대립은 절반의 구성원을 죄인으로 만들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집단은 모든 비난과 책임을 단 한 명에게 집중시킨다. 수많은 구성원 중에 한 명은 수학적 개념인 한계limit로 따진다면 제로에 수렴한다. 나머지 무결한 구성원들로만 이뤄진 집단은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계속 행복할 수 있다.

 설사 그 한 명이 사라지거나 집단을 이탈한다 해도 문제되지 않는다.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내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구성원은 그 한 명이 되지 않기 위해 항상 긴장한다. 가능하면 그들은 재빨리 다른 한 명을 지목해서 화살을 날린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은 약자는 곧 다른 구성원들로부터도 무자비하게 공격을 당해 결국 마이너스 1을 짊어지는 희생양이 된다. 이런 현상은 매번 반복된다.

 이 원칙이 철저히 현실화되는 군대에서 내가 어찌 '웃으며 군대가는...' 이야기를 쓸 수가 있겠는가? "내 뜻과 맞지 않다면 차라리 붓을 꺾겠다!" 라고 멋지게 외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솔직하지 못한 글은 좋은 글이 될 수 없다는 나의 작은 신념 때문이다. 나는 조금은 투박하더라도 진심이 담긴 글이 결국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러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므로 나의 신념에 따라 〈비계 덩어리를 읽고...〉라는 제목을 달고서 군대와 마이너스 1의 평화론과의 관계, 마녀사냥의 역사, 이지메 등등의 내용을 담은 독후감을 낸다면 난 어떻게 될까? 그저 웃음밖에 안 나온다.

 군 생활을 마무리할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고전문학이 오랜 세월동안 빛을 발하듯 예비역 선배들의 오랜 격언은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복지부동, 무사안일, 그리고 몸 건강하게 제대하는 것 만이 최고란 말은 아주 지당하신 명언이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상관 없이〈비계 덩어리〉, '마이너스 1의 평화'와 같은 헛소리 하다가 희생양이 되는 불상사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한편 어른들은 말한다. 남자는 역시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고. 예비역 형님들의 말씀과 일견 상충돼 보이지만 이 역시도 지당하신 말씀이다. 대학 졸업하고 취직해서 한 집단의 막내 역할을 하기 전에 이렇게 20대의 문턱에서 '모난 돌이 정 맞는' 진리를 예습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혹시 멋도 모르고 정의감에 불타올라 본전도 못 건지는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여기서 제대로 배우고 나가야 한다. 불행이도 우리가 사회생활 하면서 장차 모셔야 할 높으신 분들은 모두 내가 지금 머무르는 군대 때 부터 지금까지 '마이너스 1의 법칙'을 철저히 익히고 행해오신 베테랑들이다.

사탕발린 거짓말이나 눈꼴시린 아첨, 정치에 자신 없으면 차라리 정신 차리고 입이라도 다물자.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은 현대 사회에선 이렇게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되고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