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잘못된 만남

(2008년 이른 봄, 스물다섯살의 어느 날)


며칠 전 나는 진심으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도 그 화가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아서 내가 무슨 소리를 쓰고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내 머리 속에서 뒤죽박죽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그저 내 체벽 속으로 뱉어내고 싶을 뿐이다.

 무한히 넓은 우주에서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놀릴 수 있는 공간은 내 머리 속 뿐. 나는 그 작은 공간에서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끔찍한 생각을 하고 그것을 더 잔인하게 각색하고 또 반복했다. 영화 <킬 빌>을 떠올렸고 에미넴의 <킴>을 흥얼거렸다. 어쨌든 그 시나리오의 끝은 항상 나의 바람대로 이루어진다. 그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더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시나리오를 현실에서 실행할 수 없음에 분노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서 나는 스스로의 야만성에 놀라 경악했다. 그리고 끝내 우리 인간은 궁극적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서 체념하고 말았다.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같은 땅에서 같은 교과서로 공부했다는 사실이 똑같은 사고방식을 낳는다는 생각은 완전한 오해다. 다른 부모님 슬하에서 다른 대화를 나누고, 다른 사제 아래에서 다른 신앙을 갖고, 다른 경제적 환경에서 다른 행동의 자유를 겪은 사람은 상대방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안나의 남편 카레닌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그는 여느 남편들처럼 스스로가 매우 자상하며 아내를 너그럽게 이해한다고 믿는다." 라는 부분이 있다. 나는 가끔씩 '누가 보아도 객관적으로 잘못된 행동이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 '과연 스스로는 자신을 정당하다고 생각할까?' 라는 의문을 가지곤 했었다. 누가 곁에서 감시하지 않더라도 칸트가 강조하던 '선의지' 혹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양심'이라는 녀석이 불쑥 고개를 들고 얼굴을 붉히는데 어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을까 궁금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철학 속에서는' 최선의 행동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의 분노에 주위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로 위로해주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미친 개한테 물렸다고 해서 그 개를 옳은 말로 설득할 수는 없어. 그냥 재수 없었다고 생각해." 그런데 내가 화나는 이유는 저 똥 내지는 미친 개는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잘 살고있는데 왜 멀쩡한 내가 그것을 피하기 위해 더 먼 길을 돌아가야 하냐는 것이다. 저 하늘 위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현명한 판사가 있다면 어찌 이렇게 상처받은 내 마음을 두 손 놓고 지켜보는 걸까?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은 저울에 올려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일까?

 조직의 문화가 있고 그 속에 개인의 의지가 함께 있다면 그 둘이 충돌할 때는 적절한 선을 찾아 합의를 해야한다. 만약 그것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운다면 그것은 다수의 횡포 내지는 조직의 와해를 낳는다. 그런데 그 조직이란게 모여도 되고 안 모여도 되는 친목 도모회가 아닌 이상 구성원이 자신의 의지를 어느 정도 양보하는 것은 미덕이 아닌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 의무를 져버린 채 조직 속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려는 것은 무임승차요 놀부심뽀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특히나 조직을 위해 각 구성원이 맡은 의무가 '누구든 하기 싫어하지만 해야 하는 일'일 땐 더더욱 자신을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겁 많은 강아지 이야기로 나의 마음을 돌리려 할지도 모른다. 애완견들도 그 중에는 순한 놈도 있고 사나운 놈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사납고 사람을 잘 문다고 하는 개는 실제로 가장 겁이 많은 녀석이라고 한다. 작은 외부 자극에도 지레 겁을 집어먹고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을 남발한 나머지 그 강아지는 성질 더러운 녀석으로 찍히고 마는 것이다.

 나는 상급자고 그는 하급자다. 나는 오히려 너그럽게 그의 행동을 불쌍히 여겨야 할까? 그러나 무능력이 누군가의 행동을 합리화한다는 식의 논리는 매우 위험하다. 무능력의 탈을 쓴 기만은 순진한 게으름보다 더 악랄하다. 그리고 진정 무능력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보인다면 나는 충분히 그를 용서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갈등과 시련 때문에 나이값 못하는 짓을 저지른 그의 행동은 겁많은 강아지의 비유를 쓰기에도 아깝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사건 이전과 다르게 그를 대하고 있다. 그는 원래 자신이 살던 방식 그대로 살고 있다. 서로의 마음 속에서 겪게 되는 아픔은 별도로 한다면 객관적 세계에서는 그의 의지가 승리한 것이다. 물론 나는 똥이 더럽고 미친 개한테 물리지 않기 위해 평소 걷던 길을 걷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는 자신이 똥이고 미친 개임을 인정하고 있을까? 내 행동의 변화가 자신을 두려워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을까? 만약 그가 자신의 행동이 옳았고 모든 사람이 그 생각에 동의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조치가 취해졌다는 엄청난 착각 속에서 살고있다면 나의 이 답답함과 억울함은 어떻게 해결해야하나? 영화 <러브 레터>에서 처럼 내 두뇌를 잠깐 꺼내서 그에게 보내주고 싶다. 아니. 녀석의 썩어빠진 불량 두뇌를 내던지고 그 자리에 잠깐 내 것을 놓아서 그가 마음 속으로 반성하게 만들고 싶다.

 지금껏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최소한 좋은 인상은 못 남겼을 망정 적어도 나쁜 사람으로 각인되지는 않았다고 자부하며 살아온 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미친 녀석에게나마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프다. 그를 똥, 미친 개라고 욕하며 뇌까리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다. (일단 그건 당연한 사실이고) 그에게 정상적인 사고로 나의 답답함을 이해시켜서 마음 속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받아내고 싶다. 물론 지금이라도 당장 그의 앞에서 으름장을 놓는다면 그 겁많은 바보는 죄송하다고 말하겠지만 - 물론 돌아서서 또 다시 어떤 비겁한 행동을 할지는 알 수 없다 -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오늘도 똑같은 결론을 내리며 나의 분을 삭힐 수 밖에 없다. 그는 나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수많은 크로스로드가 있는 뉴욕에서 같은 에버뉴에 있는 사람이 모두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에버뉴에도 수많은 스트리트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4차원까지는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칼라비-야우 도형을 통해 본 우리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살고있는지도 모른다. 그와 나는 너무도 다른 세계를 살다가 불행히도 4차원 아래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축을 공유해버린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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