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서평) 김훈-현의 노래

(2006년 여름, 스물세살의 어느 날)


인간의 오감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시각이 빛과 어둠으로, 청각이 공기 속의 미세한 진동으로, 촉각이 사물과 피부의 물리적 접촉 정도와 방식에 의해서 외부 세상을 인식하듯이 말이다. 다만 이들 사이를 넘어선 인식의 형태는 지극히 난해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얼핏 간단히 보이는, 예컨다 '가을처럼 차게 울었다' 라는 표현을 볼 때도 우리는 시인의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울음이 어떤 울음인지를 이해하는 데는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비록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린 분명 그와 유사한 울음을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표현의 난해성은 '대상의 애매함' 보다는 그 표현을 위한 도구인 '언어'의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란 인간의 사고와 느낌을 표현하는 편리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무한한 형태와 크기의 이 우주를 자신의 틀 속에 가둬버리는 폭력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아무리 예쁜 꽃을 본다고 해도 그저 내가 '예쁜 꽃' 이라고 표현해버리는 순간 그 꽃은 세상에 존재하며 '예쁘다' 라는 수식(修飾)을 받은 적이 있는 여느 꽃들과 다를 바 없어지는 것이다.

결국 언어를 다뤄야 하는 작가는 이러한 언어의 폭력성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따라서 소설을 쓸 때 지나친 수식으로 일관하는 것은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다. 수식은 한정(限定)과 동의어이며 이렇게 범위를 축소시켜 나가는 과정은 때론 대상을 왜곡하며 한편으론 독자의 사고를 지나치게 한 방향으로 옥죄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훈의 <현의 노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을 아껴쓰면서도 충분히 수많은 형태의 소리와 냄새 등등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 어느 부분을 펼쳐서 읽어도 우리는 그의 다양한 글솜씨를 감상할 수 있다. 그는 소리를 단순히 '어떠어떠한 소리' 라는 수식관계로 표현하지 않는다. 때론 소리에 빛깔을 입히기도 하고 때론 그 소리가 나는 순간의 자연 경관만을 그림으로써 세상의 어느 말 보다 그 소리를 공감할 수 있도록 한다. 때론 소리에 한기(寒氣)를 입혀 촉각으로 느끼게도 하며 난데없이 소리와 관계없는 사마귀, 쥐, 나뭇잎을 등장시켜 신선함을 준다.

"어떤 대상에 대한 감정은 그 대상의 존재 보다는 부재(不在)와 연결돼 있다" 라는 말이 있다. <현의 노래>에서도 나는 이 말이 옳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신라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가야 백성들, 1만2천3백5십명의 신라 병사들이 동시에 같은 수의 백제인을 처형시키는 끔찍한 모습. 하지만 작가는 잔인할 정도로 결코 불쌍한 이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장에서 담담하게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원고지를 써내려나가는 작가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냉정한 자세를 유지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감정상의 여백은 그 백지 위에 나의 감정을 채워넣을 공간이 돼주기도 했다. 만약 작가가 두 팔 걷어부치고 나서서 독자가 느꼈으면 하는 감정을 미리 앞서 능수능란한 문체로 장황하게 늘어놓았다면 독자는 결코 글을 읽는 주체로서의 기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가 말을 아끼고 동시에 눈물을 아낌으로써 독자는 그 누구로 부터도 상황 설명을 들을 수 없는, 현장 그 자체에 있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하는 것이다.

한편 소설 속 등장 인물 대부분은 비극적 삶을 살고 간다. 하지만 작가는 누구도, 심지어는 주인공인 우륵 조차도 영웅화시키지 않는다. 동시에 어느 누구도 악인으로 몰지 않는다. 소설 속 우륵의 말과 같이 '소리엔 주인이 없듯이' 작가는 그 누구도 소설의 주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소설의 제목이 <현의 노래>이듯 작가는 우리의 인생도 결국엔 소리와 같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모두가 각자의 삶을 하다가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마감할 뿐. 소설 속 표현 처럼 '존재하는 순간 사라지는' 소리와 같이 우리의 인생도 누군가는 영웅. 누군가는 악인이라고 규정하기엔 턱없이 덧없는 것이다. 하물며 이 덧없는 인생 속에서 느끼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은 얼마다 더 티끌과 같을까.

그러나 작가는 이런 인생론을 결코 염세(厭世)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 소설 속 양대 주인공인 우륵과 야로는 모두 자신의 소명인 '소리'와 '쇠'에 평생을 헌신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에 독자는 감동을 느낀다. 이렇듯 한 번의 짧은 인생이란 같은 명제 아래에서도 우리는 다른 결론을 내를 수 있다. 혹자는 짧고 덧없는 인생이란 점에서 무의미함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찰나의 인생이기에 우리는 우륵과 야로와 같이 최선을 다하며 아름답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삶에 대해서 생각할 때 종종 그리스 로마 신화의 다이달로스(Didalos)와 이카로스(Icaros)를 떠올리곤 한다. 미노스의 미궁 속에 갇힌 다이달로스는 자신과 아들의 날개를 만들어 바다 위를 낢으로써 탈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아들 이카로스는 흥분된 나머지 태양을 향해 날다가 결국 날개가 녹아서 바다에 떨어지고 만다. 이렇듯 우주는 우리에게 생명을 내려주는 동시에 성장함에 따라 자유를 위한 능력, 즉 날개를 내려준다. 우리는 이 생명과 능력을 발휘하여 끊임없이 꿈과 자유를 위해 날아간다. 비록 그 웅비가 위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삶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해 높이 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카로스와 같이,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과 같이.

비행기는 격납고(格納庫)에 잠자고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결코 비행기가 만들어진 이유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내려진 삶은 결코 버려지거나 낭비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작가 김훈이 <현의 노래>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인 것 같다. 등장인물의 인생을 담담하게 그려나감으로써 인생의 덧없음을 말하고 있지만 행간에는 삶에 주어진 아름다운 자연과 소리, 그리고 그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삶에 매진하다 눈을 감는 우륵과 야로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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