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영웅과 멍청이, 그리고 모범시민

(2010년 가을, 스물일곱살의 어느 날)



요즘 매일 5시 45분에 일어나 6시 25분에 집을 나선다. 늦어도 6시 45분 정도에는 버스에 올라타고 직장 근처에는 7시 10분에서 15분 사이에 내린다. 출근 초기에 잔뜩 긴장해서 7시 10분 쯤 회사에 도착할 때 보단 군기가 빠졌지만, 그래도 대부분 제일 먼저 사무실에 도착하여 열쇠로 문을 열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한 번은 출근 길에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다. 분명 평소대로 현관을 나섰는데 20분이 넘도록 내가 기다리는 400-1번 버스는 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 동안 449번은 3대나 지나갔다. 이 버스가 두 번 지나갈 때 까지만 해도 평소보다 조금 늦었다 싶을 뿐이었지만 세 번째 버스가 지나가고 나서는 더이상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그날 따라 왜 이렇게 길이 막히던지. 지산동에서 2.28 공원까지 6,800원이 나왔고 평소와 같이 나는 7,000원을 내고 내렸다. 회사 옆 편의점에서 산 커피까지 합치면 업무 시작도 하기 전에 10,000원 가까이 써버린 셈이다. 그나마 지방에 내려와 돈 쓸 곳 없이 차곡차곡 잘 모으는 요즘인지라 새삼스런 지출이 더 크게 와닿았다.

며칠 후 부모님께 그날 아침의 소동을 말씀드렸다. 이런 경우 시청에 신고를 하면 관련기사를 처벌하거나 심지어 증명할 수 있는 경우 택시비까지 보상 가능하다고 한다. 요즘은 시간대별로 버스기사가 실명제로 운행을 하고 있으며 GPS를 비롯하여 전산 장치가 워낙 잘 돼 있다. 내가 기다린 정류장, 시간, 버스 번호 등을 알려주면 당시에 운행중인 버스기사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사실 며칠이 지났다 해도 내가 몇시 무슨 요일에 그 정류장에 있었는지 똑똑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신고는 가능하다고 한다. 다만 시일이 너무 지났으니 실질적으로 택시비 보상을 받긴 힘들 것이다. 워낙 경황이 없었고 이런 경험도 없었으니 신고는 꿈도 못꿨는데, 막상 지나고 보니 아쉬웠다.

실제로 오늘 낮, 나는 근무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시청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핸드폰을 손에 쥐기까지 했다. 아깝게 버린 7,000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음 졸이며 기약없이 기다렸던 30분 때문에 버스회사가 괘씸했다. 그 기사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만약 그 사정이 정당한 것이라면 그는 정당한 해명을 하고 회사나 시청으로부터 용서를 받겠지. 근무 태만으로 늦었다면 이 신고로 인해 그가 처벌 받는다 해도 결코 그는 억울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머지 않아 나는 핸드폰을 놓아버렸다. 내가 신고를 해서 불만이 접수된다 해도 지금 와서 달라질 것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차피 내 택시비를 보상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 시간과 정신적 노력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달라질 것은 그 기사가 처벌을 받느냐 무사히 넘어가느냐 여부일 뿐이다.

경제학자 제임스 뷰케넌이 창시한 공공선택학파는 특수이익집단의 생리를 "합리적 무시(rational ignorance)"라는 말로 요약한다. 5,000만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인구의 1%에 해당하는 50만 명으로 이루어진 이익집단이 있다. 이들이 5억 원을 들여 어느 국회의원에게 로비를 하여 어떤 재화의 물가 하한선을 두는 데 성공하였고, 이로 인해 이들은 100억 원의 이익이 발생했다고 가정하자.

50만 명의 이익집단은 5억원을 지출하여 100억 원의 이득을 얻었으니 1인당 19,000원의 이득 본 셈이다. 반면 나머지 국민 4,950만 명은 1인당 202원의 손실을 보았다. 일반 시민은 자신이 입은 손실을 빤히 알고 있지만 이익집단을 견제하는 데 드는 비용이 202원 이상이라면 차라리 가만이 있는 편이 이득이다. 전화비, 교통비 등등 아무리 생각해도 202원을 맞추기는 무리다.

하다 못해 나는 버스기사를 신고해도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 그저 근무 태만으로 수많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혔음에도 아무 일 없는 듯 살고 있을 기사를 떠올리면 분통이 터질 뿐. 흔히 "귀찮아서 신고 안 한다."는 말도 결국엔 이 같은 계산을 직관적으로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작은 일에도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분통 터뜨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가끔씩 인간이 합리적 존재인지 의심한다. 저렇게 열 내서 얻는 게 대체 뭘까. "보상금이고 뭐고 필요없다. 너 한 번 혼 나봐라" 하며 갈 데 까지 가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싸워서 이기면 속 시원할까? 지극히 이론적으로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 역시도 개인의 입장에선 비합리적 행동이다. 내 표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수천만 분의 일 밖에 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은 소중한(?) 한 표를 위해 기꺼이 소중한 연휴 아침을 반납하고 교통비를 소비한다.

사람들은 내가 참을성 있고 순하다고 말한다. 뭐 특별히 남한테 피해 안 주고, 가끔씩 입는 이런 피해도 그저 씨익 웃으며 넘어가니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내가 입은 피해에 대해 참을지 그렇지 않을지를 판단하는 것은 결국 어느 쪽이 더 나은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괜시리 온 동네 시끄럽게 해서 이긴들 상처뿐인 영광이라면 무슨 소용이람.

그래도 스스로에 대해 약간의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자면, 주위 사람들에게 202원 이하의 합리적 피해를 입히며 편익을 취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정도이다. 진정으로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라면 최적의 선택은 상대방이 분개하지는 않을 만큼 편익을 가져오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떳떳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런 합리적 무시가 쌓이고 쌓여 집단 이기주의를 방조하기 때문이다.

평일 아침 7시 30분에 400-1 버스를 타는 사람은 최소한 수십-수백 명은 될 테니 그 중에 한 명은 신고를 했으리라 믿는다. 내 경험상 이 사회에는 굳이 자신의 노력을 들이면서도 사회 정의를 위해 아낌없이 불의를 신고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내가 잘 되는 문제 보다는 남이 못 되는 문제에 더 민감한 사람들이 넘치고 있다. 이들은 과연 수많은 시민들의 202원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 영웅일까, 앞뒤 안 가리고 일차원적 감정에 휩싸여 너 죽고 나 죽자 달려드는 멍청이들일까. 난 그냥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영웅이 되기 보단 남에게 피해 안 주는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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