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자유를 위한 구속

(2007년 여름, 스물네살의 어느 날)


테트리스 게임처럼 하루 12시간 이상을 꼭꼭 채우고 있는 시간표. 스님과 제대 직후의 군인 중간쯤 되는 짧은 머리와 똑같은 모양의 교복. 우리 나라 고등학생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만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같이 통제되고 획일화된 교육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도 일부 불필요한 규제는 분명히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는 '과중한 학업량이 청소년들의 창의적인 사고를 개발하는 데 방해가 될 우려가 있다" 라는 이유를 드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나는 기성旣成 교육이 창의적인 사고와 대립된다는 식의 주장에는 결코 찬성할 수 없다.

과연 그들은 선학先學이 이루어놓은 가르침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이해해왔기에 그것을 함부로 캐캐묵은 지식이라 폄하貶下하는 것인가? 과연 그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학업량이 줄어든다고 가정할 때 남는 시간을 얼마나 창의적인 활동에 투자할 계획인가? 혹시나 그들은 현재의 괴로운 학업의 짐을 떨쳐내고자 하는 유혹에 이끌려 억지스러운 근거를 드는 것은 아닐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를 살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자의식과 세계관을 확립한 세대 중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연령대를 꼽으라면 20대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바로 내가 이 연령대에 속한다. 하지만 수천년 전에 만들어진 그리스 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드 Ilias>, <오딧세이아 Odysseia>는 21세기를 사는 나의 가슴에도 여전히 신선한 감동을, 때로는 충격까지 안겨준다.

이런 고전古典들은 오늘날 무심결에 지나치는 주위의 수많은 문화적 컨텐츠contents들에게 모티프를 제공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그 작품을 읽는 동안 스스로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내 상상력이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는 사실을 거듭 깨닫곤 한다.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는 <검은 새를 바라보는 열세가지 방법 Thirteen Ways of Looking at a Blackbird>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13연聯에 걸쳐서 각 연 마다 검은 새를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똑같은 검은 새를 보더라도 혹자는 한두가지 방식으로 밖에 그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상상력이 풍부한 다른 독자는 스티븐스의 13가지를 넘어 더 많은 방식으로 그 새를 바라볼는지도 모른다.

한편 그 새를 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그 새를 부러워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검은 새를 따라 날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의 머리와 가슴을 자극해줄 촉매제觸媒劑가 꼭 필요하다.

헤르메스Hermes의 날개 달린 샌들, 이카로스Icaros와 다이달로스Daedalos의 밀랍 날개,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녀, 하늘을 나는 양탄자 등등의 신화를 읽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비록 똑같이 하늘을 나는 새를 보지만 그들 간에 꿈꾸고, 상상할 수 있는 생각의 범위는 천지차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상상력은 다빈치나 라이트형제가 본격적으로 비행기를 설계하는 과정 이전에 선행돼야 할 필수적인 촉매제이다.

노벨 문학상을 한 차례, 퓰리처상 픽션 부문을 두 차례나 수상한 20세기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William C. Faulkner의 소설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As I Lay Dying>는 특이한 서사 구조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는 무려 15개에 달하는 작중 인물의 시점視點이 복합되어 펼쳐진다. 작가의 이런 독특한 사고의 전환은 세기의 벽을 넘은 오늘날에도 참신함을 넘어 놀라울 정도이다. 그는 우리에게 세상의 진실을 바라보는 입체적인 관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이 세상은 하나의 절대적 진실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수 만큼의 각기 다른 진실들이 복합된 것일지도 모른다.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아침을 알린 나팔로 평가받는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그의 단편집 <픽션들 Ficciones>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보고寶庫이다. 나는 이 300페이지도 안 되는 단편집이 영화 <매트릭스 Matrix>와 같은 최신 할리우드 서사구조를 비롯, 현대 첨단 문화의 분수령이 됐다고 평가한다.

급격한 시점視點의 변경을 통한 반전(<칼의 형상>), 인간의 지적 능력에 대한 새로운 탐구(<기억의 천재, 푸네스>), 찰나Ksana의 무한한 분할을 통해  이르게 되는 영겁Kalpa의 경지(<비밀의 기적>),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종횡무진의 사고(<원형의 폐허들>) 등등은 과연 우리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 망설이게 만든다.

오히려 보르헤스보다 더 많은 조상들을, 더 많은 숙고와 검증의 세월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상상력에 고개숙이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게다가 그의 작품 역시도 노장老莊사상, 불교사상 등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 상상력의 뿌리는 또 수십세기를 거슬러가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된다.

재미있게도 위에서 등장한 작품의 상당수가 몇 년 전 서울대학교에서 발표한 '서울대학교 권장도서 100선'에 포함돼 있다. 그토록 청소년들의 창의성을 저해한다고 비판받는 기성 교육의 정점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그러나 결국 이 학교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름아닌 자유로운 상상력과 그에 따른 창의적 능력임을 알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서 일정 기간 강제적으로 학생들에게 혹독한 훈련을 가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대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잡기 힘든 고기는 바로 '아이디어(漁)'"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기업을 비롯한 현대사회에서는 끝없는 창의성(아이디어)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우리들에게 '소년이 돼라'고 한다. 그는 네덜란드의 예술가 에셔M. C. Escher의 판화 작품 <메타모포시스 Metamorphosis>를 보여주며 소년의 천진난만한 태도로 상투적인 질서를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지라고 강조한다.

나는 여기에 덧붙이고 싶다. 자유롭게 상상하되 치열하게 배우고 사고思考해야 한다. 진중권이 말하는 '천진난만함'은 절대 무지無知 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에 가깝다.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도 애초 가보지 않은 지형 위에는 건물을 지을 수 없다. 아무런 지식이나 노력 없이는 어디에도 자신만의 꿈을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자유로운 상상력의 필요성을' 기성 교육을 거부하기 위한 근거로 드는 것은 속된 말로 '헛소리'다. 선학들이 이루어놓은 고전과 역사를 끝없이 겸손하게 - 물론 비판적으로 - 받아들이고 동시에 치열하게 사고하는 것만이 창조적 자유로 통하는 '좁은 문'의 열쇠이다. 그 열쇠를 얻기 위한 괴로운 훈련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육이자 공부인 것이다.

위에서 등장한 상상력의 천재 보르헤스는 너무 많은 책을 읽은 나머지 젊은 나이에 시력을 읽었다고 한다.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우수한 알파벳 '한글'을 발명한 세종대왕도 지나친 독서로 눈병을 앓았다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창조적인 조상들이 자유롭기 위해 극히 구속당해야 했음을 늘 상기해야 한다. 제발 창조성 내지는 상상력이란 단어를 아무 곳에나 함부로 갖다붙이지 말라.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