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살리에르의 슬픔

(2005년 여름, 스물두살의 어느 날)


모차르트와 동시대를 산 또 다른 위대한 음악가로 살리에르가 있다. 실제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그 자신도 꽤나 성공한 음악가였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아마데우스>를 통해서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에게 끊임없이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비극적인 음악가로 알려져이다. 그 때문에 그의 이름은 단독적으로 쓰이기 보다는 '살리에르의 슬픔'이라는 일종의 관용적 표현 속에서 더 자주 쓰인다.

살리에르의 슬픔이라는 말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도 열등하게 평가받았을 때 쓰는 말이다. 결코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남보다 못한 평가를 받았다고 해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 아무리 높이 뛰려고 노력해도 선천적으로 큰 키를 갖고 태어난 사람 보다 높이 뛸 수 없을 때 쓰는 말이라고 하면 적절한 비유일까?

물론 영화에서 처럼 1등의 천재에게 밀려서 아무리 노력해도 2등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살리에르의 슬픔'을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의미를 넓히자면 자신이 천재가 아니기에 - 어쩌면 보통사람보다 더 열등하게 태어났기에 - 자기보다 선천적 능력이 우수한 사람을 동경하며 슬퍼하는 것 또한 살리에르의 슬픔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살리에르가 모차르트를 부러워하듯 살리에르 뒤에 선 누군가는 살리에르에 대해서도 비슷한 비애를 느꼈을 것이다. 이런 연쇄작용이 이어지면 결국 꼴찌는 자기 바로 앞에 선 사람에게 비애를 느끼게 된다. 어쩌면 세계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 아니면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살리에르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에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스스로가 선천적인 지능은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지하며 살아왔다. 때로는 이것이 일종의 컴플랙스가 되어서 언제나 새롭게 시작되는 경쟁을 앞두고는 크게 긴장하곤 한다. 경쟁이 시작되기 전에 충분한 예비기간, 혹은 연습기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그 기간을 이용해 남들을 앞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경쟁에서는 늘 남들보다 한발 뒤에서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요즘 영어공부와 컴퓨터자격증 공부를 하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한다. 왜 자꾸 나는 방금 외웠던 단어나 컴퓨터 지식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걸까? 나처럼 외국에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는 우리 과 동기들 몇명을 보면 특별히 영어를 붙잡고 공부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유창하게 회화를 하곤 한다. 워드든 컴퓨터활용능력이든 필기시험은 한두번만 스르륵 훑어봐도 다 붙는다던데 난 왜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걸까?

살리에르의 슬픔을 토로하는 자에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가 부족한 것을 인지하는 만큼 더 열심히 노력해라. 포기할 경우엔 니가 앞설 확률이 0%지만  더 노력하면 그 확률이 1%라도 더 높아지지 않겠느냐" 라고 말이다. 물론 이론상으론 당연한 소리이다. 하지만 열등감이란 어느정도 주어질 땐 노력의 원동력이 되지만 그것이 계속 쌓이면 좌절의 구실이 되고 만다. 마치 가랑비에 처음 옷이 젖기 시작할때는 목적지를 향해 빨리 뛰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 옷이 완전히 젖어버리고 나면 천천히 걷게 되듯이......

물론 내가 흠뻑 젖은 만큼 극단적으로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끔씩 나도 천재가 되어 배운 것을 바로 소화시켜서 내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천재를 가리킬 때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사람'이란 말을 쓰지만 실상은 하나를 가르쳐서 하나라도 그 자리에서 완벽히 이해한다면 그는 이미 천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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