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변검變瞼과 카멜레온

(2008년 가을, 스물다섯살의 어느 날)


장영희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에는 「장영희가 둘?」이라는 재미난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학생들이 '작가로서 느끼는 장영희'와 '교수로서 느끼는 장영희' 의 차이 때문에 의아해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수필을 통해서 본 장영희는 '온화하고 낭만적이고 감상적'인데 반해 교실에서는 '엄격하고, 철저하고, 점수도 짜게 주는' 교수님이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쓴 채 두 개의 자아 때문에 괴로워하는 어느 작가의 글을 소개했다.

  '나한테 속지 마세요,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이 나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나는 몇 천개의 가면을 쓰고 그것을 벗기를 두려워한답니다. (중략) 나의 겉모습은 자신만만하고 무서울 게 없지만, 그 뒤에 진짜 내가 있습니다. 방황하고, 놀라고, 그리고 외로운. 그러나 나는 이것을 숨깁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나는 나의 단점이 드러날까 겁이납니다. (후략)'

며칠 전 나도 어느 학생으로 부터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모습이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든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는 누구를 대하느냐에 따라 언행言行을 달리하게 마련이다. 부모님 앞에서 하는 이야기와 친구들 앞에서 하는 이야기가 똑같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의 단골 손님 중에는 어느 고등학교 선생님이 한 분 계시다. 식당에 자주 오시다 보니 부모님과도 친분이 생겼고 자연히 나도 다른 손님과는 다르게 가게에 오실 때 마다 꼬박꼬박 인사를 드리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을 우리 동네 술집에서 우연히 뵌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오랜만에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를 만나느라 한창 취해서 신이 난 상태였다. 그래서 저 멀리 테이블에 나를 마주보고 앉아계시는 분이 그 선생님인지 몰랐었다. 그런데 웬걸 조금 낯이 익다 싶어서 자세히 보니 그 분인 것이었다.

나는 항상 퇴근 후 10시 쯤에 저녁을 먹으러 우리 가게로 간다. 그래서 지금껏 그 선생님을 뵐 때는 언제나 말쑥한 옷차림에 넥타이까지 메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술집에서는 달랐다. 야구 유니폼을 입고 귀에는 반짝이는 귀고리를 달았다. 얼굴은 취기가 올라 빨개진 상태에 담배를 뻐끔거렸으며 조금은 떠들썩하게 친구들과 점잖치 못한 말을 지껄였다. 그 상황에서 그 분께 인사를 드렸으니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내 속에는 친구들 앞에서의 자아와 어른들 앞에서의 자아가 공존하고 있다. 상황이 변할 때 마다 내 모습 역시도 재빨리 처럼 변해왔는데 그 두 개의 상황이 같은 시공간을 차지할 때는 그 접점에 선 내가 큰 혼란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우습게도 당시에 나는 문득 예전에 읽은 어느 과학책을 떠올렸다.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이 쓴 『엘러건트 유니버스 Elegant Universe』라는 책인데 엉뚱하게도 당시의 내 상황이 마치 책에서 읽은 평행우주 이론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초끈 이론Super String Theory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평행 우주론Parallel World Theory이라는 가설을 주장한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차원은 4차원(공간의 3차원 + 시간의 1차원)이다. 하지만 우주는 11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고차원에서는 여러 개의 우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전깃줄 속에서 1차원 전후前後 운동만 하는 전자electron는 바로 옆 전깃줄에 또 다른 비슷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전자는 좌/우라는 새로운 차원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면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듯 2차원 활동만 하는 소금쟁이는 마주오는 동료를 피하는 방법이 좌/우 운동 뿐만 아니라 공중으로 점프하거나 잠시 수면 속으로 잠수하는 방법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모든 생물의 뇌는 자신이 사용할 만큼의 차원만을 인식하게끔 진화해왔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차원의 또 다른 우주는 심지어 지금 자신의 바로 옆 1mm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그 차원이 일종의 얇은 막membrane으로 가려져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초끈 이론 학자들은 우리가 흔히 우주의 창조라고 말하는 빅 뱅Big Bang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우주가 어떤 이유로 충돌하여 마치 두 개의 비누 거품이 합쳐지듯 순간적으로 얇은 막이 열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시작은 전무후무한 사건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인 셈이다.

한 사람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 다른 모습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세계들 끼리 충돌할 경우에 겪는 난처함은 빅 뱅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과장이지만 가능하면 피하고 싶게 마련이다. 어른들의 세계와 또래들의 세계는 물론, 동문회에서의 나, 대학교에서의 나,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써의 나는 각자의 '우주 막' 속에서 평화롭게 분리되기를 바란다. 나는 서울의 대학 친구와 대구의 고향 친구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 싫다. 대학교 1, 2학년 시절 소개팅을 할 때도 눈치없이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는 주선자를 원망했다. 물론 지금도 친구와 함께 놀고있는 내 있는 모습을 학원 제자들이 본다면 기겁을 할 것이다. 특히 그 학생이 학부모와 함께 있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마치 자전거의 바퀴살처럼 여러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자아들도 그 중심엔 언제나 내가 있다. 나는 때때로 자신의 성격을 간단하게 묘사하라는 질문에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이쪽 세계의 나와 저쪽 세계의 내가 다르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세계를 아우르는, 바퀴살의 중심에 선 진정한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나를 잘 아는 주위사람에게 물어보아도 언제나 대답은 내가 그 세계에 보여준 모습을 반사해주는 데 그치고 만다. 아니면 그 어떤 세계와도 접촉하지 않은 나, 혼자 있을 때의 나를 떠올려 보면 해답이 나올까? 하지만 혼자서 명랑한 사람이 어디있으며 반대로 혼자서 우울하고 비관적인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조울증에 지나지 않는다.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는 우리가 물체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를 주장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어떤 물체에 도달한 빛의 광자photon가 반사되어 우리 눈까지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의 스케일에서 전자는 작은 에너지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날쌘돌이다. 빛도 일종의 에너지이다. 전자에 빛을 쏘는 순간 전자는 빛이 품고 있는 광자의 수에 비례한 만큼의 에너지를 받아 어느새 저 멀리 튕겨나가고 만다. 즉, 우리 눈에 다시 들어온 전자의 위치는 이미 과거에 전자가 '존재했던' 부분을 가리키는 데 그치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히 전자의 현재 위치를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과 생각을 하는지를 되짚어 봐야 한다. 하지만 그 상황 역시도 다른 누군가와의 기뻤던 기억이나 갈등과 관련된, 여러 우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내 성격을 알아낼 수 없다면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여 내가 했음직한 행동을 떠올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소한 심리 테스트 종이를 눈앞에 두고서도 보이지 않는 나의 의식은 결코 정직하지 않다. 나의 자의식은 주어진 상황에 적절한 가면을 찾아서 재빨리 나의 얼굴을 덮는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심리를 연구하기 위해서라면 이중맹검법double blind test 같은 방식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약placebo을 주는 나의 손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뇌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다.

어쩌면 인간의 자아란 순수한 얼굴 위에서 재빨리 가면만을 바꿔쓰는 중국의 변검變瞼 놀이 보다는 자신의 피부색 자체가 변하는 카멜레온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가령 "원래 내 성격은 이러한데 다른 사람을 만날 때는 저러하다. 그러므로 나의 진짜 성격은 이러한 쪽에 가깝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세계와도 분리된 자신만의 성격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오히려 "내 성격은 이 상황에서는 이러하고, 저 상황에선 저러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저러한 모든 것을 통틀어서 내 성격이다." 라고 하는 쪽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파이트 클럽》에서 에드워드 노튼도, 브레드 피트도 모두 주인공의 자아이다.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Stevenson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아멜리 노통브Amelie Notomb의 『적의 화장법』에서도 인간이 실제로는 다중적 인격의 복합체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사춘기가 되면 오랜 시간 부족을 떠나 식음食飮을 전폐한 채 들판이나 산에서 홀로 명상을 하며 자아를 찾는 비전 퀘스트Vision Quest라는 의식을 치른다고 한다. 그 소년이 비전 퀘스트를 하는 동안 부족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자아 탐구가 성공하길 빌어준다. 석가모니가 고행을 위해 출가를 할 때 신들은 석가모니의 애마愛馬인 칸타카의 발굽을 손으로 받쳐주었다고 한다. 말발굽 소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 그를 말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때로는 나도 화려한 가면을 걷어내어 진정한 자아를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나같은 범인凡人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다. 과연 그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요즘 들어서는 점점 '아니오'로 기울어진다.

댓글 1개:

  1. 좋은 경험하셨네요..
    "아니오"가 맞습니다.
    나의 성격은 이러하다. 라고 하는 것은 자아라고 하는 욕심을 내기때문입니다.
    원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전 우주가 나와 하나이지요.
    불교를 공부해보시면, 혼란이 없어질겁니다. "나"라는 독립된 존재는 없어요. 모두 관계속에서 인연으로 묶였다가 사라지는 현상만 있을뿐입니다. 거기에서 "나"라는 존재를 형상화하여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것을 대상으로 나라고 명명하고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 이런 혼란과 번뇌를 낳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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