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이른 봄, 스물다섯살 어느 날)
"자네는 왜 경영학과에 왔나?" "CEO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학년 전공 수업시간, 교수님이 맨 앞자리에 앉은 학생에게 물었고 학생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의 생활기록부에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부터 3년 내내 장래희망란에 '전문 경영인'이라고 적혀있다.
왜 경영자가 되고싶어하는지 묻는다면 특별한 이유는 없다. 월스트리트 마천루 사이에서 브리프 케이스를 든 채 재킷 단추를 채우며 바쁘게 뛰어다니는 비즈니스맨이 그저 멋있어보였다. 소년들의 꿈을 결정짓는 동기는 반드시 이성적인 사유에 따른 결과에 있지만은 않다. 오히려 이렇게 감성적인, 강렬한 이미지가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좋은 CEO의 조건은 서점의 수많은 책들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 학교 윤석철 교수님는 그의 저서에서 "경영자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풍부한 감수성과 더불어 인문, 사회, 자연과학, 예술에 이르는 폭넓은 교양을 갖춰야 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풍부한 감수성과 폭넓은 지식이 뛰어난 경영자가 되는 데 무조건 도움이 될까? 전공 공부를 해나갈수록,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며 삶의 경험이 쌓일수록 나의 확신은 조금씩 흔들린다.
오히려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과 감수성은 현실에서 뛰어난 경영자가 되는 데 방해가 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경영자, 즉 리더는 결국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사람이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 Rhetoric》에서 언급한 설득의 세 가지 조건인 로고스logos, 페이소스pathos, 에토스ethos에 맞춰서 이 모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로고스는 지식적, 논리적 측면에 해당한다. 경영자가 여러 분야의 지식을 쌓는 궁극적 목적은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있다. 인생은 B-C-D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태어나고born, 선택하고choose, 죽는다die.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살아가는 과정은 이렇게 선택의 연속이다. 누군가의 생애를 평가하는 것은 결국 그가 일생동안 내린 선택의 결과를 평가하는 것과 같다.
경영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조직을 좌우하는 선택을 내린다. 그만큼 책임도 크다. 그는 여러 항목중에 최적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때로는 "뛰어난 경영자는 'OR'의 문제를 'AND'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라는 말처럼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많은 지식을 쌓게 될수록 선택 가능 항목은 늘어만 간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듯, 더 많이 아는 사람은 더 신중해지지만 또 한편으론 주저할 수 밖에 없다.
페이소스는 감성적 측면이다. 인간은 컴퓨터와 달라서 똑같은 인풋input에 반드시 똑같은 아웃풋output이 나오지는 않는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이다. 경영자는 폭넓은 지식뿐만 아니라 풍부한 감수성을 함께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과 교감하며 자신 뿐만 아닌, 인간 그 자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언젠가 나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인간을 다루는 학문인 경영학을 전공하는 우리가 어찌 인간에 대한 학문인 인문학을 경시할 수 있는가?"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이 최초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의식을 가진 후 우리 조상들은 오랜 세월동안 인간에 대해 연구해왔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은 모더니스트들의 말대로 조상들의 바통을 이어받아 거인의 어께 위에 선 난쟁이가 되어 끊임없이 연구를 계속한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스키너와 파블로프의 연구를 배우고 호손 실험을 읽지만 도무지 일관되고 깔끔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인간이 창조한 수많은 문학, 예술 작품들은 오히려 너무 많은 인간의 측면을 보여주기에 감히 그들을 이해할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만든다.
에토스는 성찰적 측면이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했느냐에 따라 그 말의 영향력은 천차만별이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말하는 사람이 모범을 보이지 않을 땐 아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경영자는 언제나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에게 모범이 되도록 고결한 윤리성을 지녀야 한다.
반면에 강준만 교수는 "스스로를 많이 성찰하는 사람은 뛰어난 리더가 될 수 없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어느 집단이든 구성원을 이끄는 리더는 구성원들의 에너지를 집약한 하여 가장 효율적인 곳에 발산해야 한다. 존 로크J. Locke는 《통치론》에서 "정부란 구성원들이 사회계약에 따라 각자의 권한을 일부씩 양도讓渡하여 그것을 집약시킨 권력체이다."라고 주장했다. 기업도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구성원들은 가능하면 자신의 권한은 적게 양도하면서 조직에 편승하고자 하는 무임승차free ride의 강한 유혹을 받는다. '착한 사람 컴플렉스'에 빠진 경영자는 아래로는 구성원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하다 보니 많은 권한을 집약시키지 못하고, 위로는 추진력 부족으로 인해 성과를 못 내다 보니 결국 무능한 경영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과연 뛰어난 CEO가 될 수 있을까?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내가 나르시시스트처럼 스스로를 '높은 수준의 지식과 감수성, 윤리성을 지닌 사람'이라 자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의 과거를 돌아볼 때 지금껏 나는 얼마나 많이 선택항들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던가? 새로운 지식 앞에서는 비판의식 보다는 수용의식이 앞서다 보니 모든 말이 옳은 것 같았고 좀처럼 거부할 줄을 모르는 예스맨yes-man으로 살아왔다. 좀 더 많은 것을 배우려 노력하지만 그것이 명쾌한 의사결정엔 그리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한편 얼굴에 철판 깔고 실리實利를 챙기면 될 것을, 싫은 소리 조금 못해서 몇 번이나 나는 힘든 일을 떠맡곤 했었던가? 나의 자의식은 타인의 비판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얼굴 붉히며 다투어 적절한 합의점을 찾기 보다는 그 논쟁이 싫어서 차라리 양보해버리는 성격 때문에 종종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지나치게 높은 도덕률 사이에서 헤매다 보니 더 많은 금기를 피하려 하고 결국 윤리적 결벽증에 결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되기도 했다.
어느 칼럼니스트가 경영자의 자질에 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윤석철 교수의 의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영자는 전공지식 보다는 인문, 사회, 예술과 같은 분야에 더 능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령 어느 회사가 새롭게 해외 시장을 개척하려 한다고 가정하자. 두 명의 최고경영자 후보가 있는데 갑은 재무, 회계, 마케팅과 같은 전공 지식에 능통하고 을은 해당 국가의 언어, 역사, 문화에 밝다. 그 칼럼니스트는 진정 중요한 것은 해당 국가에 대한 지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을이 CEO가 되고 갑은 그의 자문諮問역할을 맡는 쪽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칼럼을 쓴 사람은 바로 '의사결정'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한 듯 하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능력은 아무나 갖춘 것이 아니다. 경영학을 연구하는 교수라면 모를까, 일선에서 뛰는 리더라면 수많은 기회비용과 막대한 책임을 각오하고서라도 과감하게 결정을 내리는 능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구성원들의 반발과 그들과의 불화도 어느정도 정도 무시할 줄 알아야 한다. 도덕성의 비난을 받더라도 조직의 발전을 위해 악역惡役을 맡아 총대를 메는 배짱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CEO의 자리는 경영학적 실무능력, 즉 의사결정능력을 갖춘 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자문 역할은 관련 시장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 좋을 것이다. 둘 다 쉽지 않은 역할이지만 나에겐 강력한 리더쉽을 갖춘 동료 옆에서 아이디어뱅크가 되어 진심어린 조언을 하는 쪽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