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이미지 게임

(2004년 여름, 스물 한살의 어느 날)



1984년 6월생...법적으로 청소년을 벗어났기에 엄연히 난 성인이다. 따라서 제사, 결혼식, 입학, 졸업식 등등에서 요즘은 왠지 그냥 케주얼틱한 옷을 입고 나가면 어쩐지 예를 갖추지 않고 갔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이도 나에겐 작년 이모가 고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선물해준 정장 한 벌 있다. 가진 정장은 이것이 전부이기에 무슨 일이 있을 때 내 정장은 반드시 이 옷일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비교적 디자인과 색감이 마음에 들어서 입을 때 마다 어느정도는 만족하는(?) 옷이다.

며칠 전 전공 수업인 경영학 원론 조별 발표를 위해 우리 조 전체가 정장을 입기로 한 적이 있었다. 발표 때 뿐 아니라 그 발표 준비를 위해 그 유명한 연예인 손지창씨를 만나러 갈 때도 (비록 그 분의 앨범 발매에 따른 뮤직비디오 촬영 일정 때문에 만나지는 못해서 기획 실장과 대신 인터뷰를 했지만) 오히려 더 신경 써서 정장과 구두에 머리까지 신경쓰고 학교에 간 적이 있다.

평소와 다른 나의 옷차림에 동기와 선배들의 눈은 평소 그리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평범한 학생이던 나에게 집중되었다. 그 날 나를 처음 만난 나를 아는 사람들의 한 마디는 모두 같은 말로 시작되었다.

"오~"-_-

부담스럽고 어색하기만 한 시선을 맞받으면서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하려 했지만 역시 많은 스포트라이트와 포커스는 받던 사람만이 받아야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재밌는 것은 내가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볼 때 마다 대학 친구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는데 크게 두 가지를 들자면 "기업 신입 사원"과 "대학 시간 강사"(소위 보따리 교수) 같다는 말이 가장 많았다.

새삼스럽게 정장을 입은 나의 모습을 찾아서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내가 늘 생각하는 기업 신입 사원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실제로 비슷하다는 데에 동의를 했다...아직은 정장을 갖춰 입기에는 다소 어려보이는 얼굴과 어딘지 정장이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 게다가 젊은 혈기를 따라 재즈와 락을 좋아하기에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이 건물 저 건물을 돌아다니는 모습은 충분히 생기발랄한 신입사원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특히 지난 손지창을 위해 인터뷰 때문에 바쁘던 날에는 경영대 건물 앞을 서성이며 한 손엔 인터뷰 내용이 적힌 A4용지, 다른 한 손엔 핸드폰을 들고서 들뜬 마음에 친구와 통화를. 동시에 혹시나 손지창씨와의 약속이 늦어질까봐 초조한 듯이 시계를 바라보다가 버스가 오자마자 뛰어가서 올라타는 모습...내가 봐도 너무나 전형적이었다.

또한 시간 강사라는 말도 그리 부인하지는 못할 말인 것 같다. 헤어 스타일에 신경은 쓰지만 그리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늘 적당한 (혹은 다소 덥수룩한) 길이의 머리카락. 그리고 항상 정해진 6:4 비율의 정갈한 가르마. 게다가 지난 겨울에 즐겨입었던 구두 스타일의 신발과 함께 검은 바지, 검은 코트, 갈색에다 두꺼운 테를 가진 나의 커다란 뿔테 안경....

그것 뿐인가? 나는 어께에 메는 황색 가방에 다 넣기엔 너무 무거워서 가장 큰 책은 손에 들고 다니는 버릇이 있다. 가장 큰 책이란 일반적으로 "OO원론"과 같은 전공 서적일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저런 옷차림으로 'OO원론'과 같은 책을 낀 채 조용히 캠퍼스를 걷는 나의 모습을 한 번 그려보자. 너무도 잘 어울리지 않는가?

사람에겐 누구나 남들이 그를 떠올릴 때 머리 속에 가장 먼저 그리는 그림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미지(image)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람을 머리에 떠올리는 횟수와 비례해서 그 사람이 지닌 이미지를 머리 속에 그리게 된다. 즉 좋은 이미지를 가진 사람은 자신을 상상하는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수없이 각인시키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신입 사원이라 하면 어떤 모습을 떠올릴까? 아직 세파에 물들지 않고 당당한, 꿈 많고 순수한 젊은 청년을 떠올리지 않을까? 비록 아직 서툴기에 상사에게 꾸중도 많이 듣고 어리버리하긴 하지만 단지 열정만으로도 꿋꿋이 이겨낼 수 있는 새끼호랑이...다른 사람이 뭐라 생각하든지간에 나는 나를 이렇게 그려주는 데 대해서 스스로 기뻐하고 싶다.

시간 강사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전임 교수 특유의 낡고 고루하며 그러면서도 뼈대 없는 권위만을 갖춘 꼬장꼬장한 이미지 보다는 비록 급여와 직위는 낮지만 지식이라는 수단 하나만으로 묵묵히 참고 살아가는 순수한 청년. 비록 가진건 많이 없지만 앎이라는 맑은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을 갖춘 작은 지식인,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친다는 보람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진정한 교육자...난 그런 모습이 좋다. 그리고 나를 떠올릴 때 이렇게 떠올려주는 사람에게도 역시 감사하고자 한다.

그나저나 앞으로는 또 정장 입을 일이 얼마나 있을까? 차라리 내 특유의 이미지를 계속 살려나가기 위해서 별 일 없어도 한 번씩 정장이나 입고 나갈까? 그럼 정장 몇 벌을 더 사야 할텐데...아마도 먼 미래에 내가 스스로 돈을 벌게 된 이후의 일이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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