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겨울, 스물한살 어느 날)
사람들은 저마다 독특한 술버릇이 있게 마련이다. 했던 말 또 하는 사람, 난데없이 미분 적분 수학 공식 외우는 사람(뭐...이 사람은 우리 과 사람이면 다 알겠지만), 우는 사람 등등...
뭐 나는 다행이도 저렇게 극단적으로 특이한 술 버릇은 없다. 그저 누구나 그렇듯 생각이나 행동이 좀 더 와일드해지고 말이 약간 더 많아지는 정도. 그래서 평소에 별로 말도 안 하던 사람들한테도 말을 걸 때도 있다.
술이 취했을 때의 보편적인 또 다른 특성으로는 좀 더 솔직해진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맨정신에서는 할 수 없던 가슴 속 이야기. 그것은 술에 많이 취할수록 좀 더 깊은 곳의 생각까지도 말이 되어 입밖으로 나오는 것 같다. 그 말이 상대방에 대해서 품어왔던 좋은 감정일 수도 있고 때로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꼭 상대방에 관련된건 아니라도 자기 신념이나 생각을 좀더 거침없이 이야기하곤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절대적인 표준인 것 같다. 요 며칠 술자리를 가질 기회가 많았다. 원래 술도 못마시는 내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고 옆사람과 진지하고 솔직하게 떠드는 모습...맨정신의 나를 늘 대해왔던 사람에겐 조금은 낯선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하다는 말은 그 말 자체가 풍기는 어감이 좋기 때문에 흔히 긍정적인 뜻으로 들리곤 한다. 하지만 때론 나는 술에 취했을때 솔직해지는 내 자신이 싫다. 그 솔직한 무언가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것에 가까워졌다는 말은 나의 이성과 정신이 흐뜨러졌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놈의 이성, 정신이 얼마나 좋길래 그걸 지켜야한다고 고집하는지는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을 끝까지 파헤치다 보면 결국 모든 사람은 이기적인 짐승이란 의견에 동의하는 나로써는 이러한 이성은 인간의 부끄러운 몸을 덮어주는 옷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지난 종강파티때도, 어제 동문회에서도 나는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그리고 너무 솔직했었다. 지금은 후회한다. 운동권 선배 앞에서 내가 꼭 경영학과 다니는 학생 같은 말을 하며 논쟁을 했어야만 했나?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저 좋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시는 선배의 말에 대해 '아무런 유인동기 없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는 말로 침튀기며 논쟁을 했어야만 했나?
다른 술자리에서도 나는 때때로 그 다음 날 아침 나의 생각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같아 부끄러워할 때가 많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혼자 알몸으로 잠시 서있었던 것 처럼...하지만 내가 술이 취한 상태에서 하는 말이라도 결코 그것이 윤리적, 도덕적으로 흐뜨러진 말들은 아니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오히려 내 상태가 정상적일 때 보다도 더욱 논리정연하고 현학적인 태도로 임할때가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내 마음 속에 언제나 깊이 담아두고 있는 것들...하지만 함부로 입밖에 낼 수는 없던 많은 것들...
나의 보수적인 정치적 관점,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 엘리트 주의에 대한 지지, 다소 극단적인 자유주의, 그리고 개인주의, 성악설, 연애나 결혼에 대한 회의적 관점, 때때로 가지는 나 자신에 대한 열등감, 학문에 대한 열정, 아니땐 굴뚝엔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인과론적-기계론적 관점, 모범생, 착한아이 컴플렉스, 인간의 원초적인 외로움, 열정과 능력의 부조화, 인간의 평등이란 허상이라는 생각...
말 그대로 입밖에 낼 수 없는 말이지만 내가 저것들을 나열한 이유는...만약 술을 먹은 상태에서 내가 저런 이야기를 한다면 적당히 하고 말려주길 바란다. 나는 술을 아무리 많이 마신다 해도 필름이 끊기기 전에 육체적으로 알콜을 먼저 거부하기 때문에 술이 깨어도 술취한 나의 모든 행동을 잊지않고 기억한다. 그래서 술자리를 가진 다음날 아침, 너무 솔직했던 지난 밤의 내 모습이 부끄러워 후회하는 일을 더이상 겪고싶지 않다. 차라리 필름이라도 끊겨서 기억을 못한다면 괴롭지는 않을텐데...
사람들은 말한다. 술은 사람의 옷을 벗기고 마음을 열어주는 열쇠라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술을 좋아한다고 한다. 물론 옳은 말이긴 하다. 나처럼 무뚝뚝한 사람도 그나마 입을 열게 만드는 강력한 무기이니까...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저 이유 때문에 술을 싫어한다. 이것은 술을 못마시기 때문에 그 쓴맛을 혀로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보다 더욱 큰 이유이다.
쓸데없는 이야기 덧붙이자면 나 자신도 확신은 못하겠지만 내가 글쓰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술을 싫어하는 이유를 반대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물론 글을 쓸 때 가식적이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때는 내 생각이 종이나 모니터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한번 더 예쁘게 포장할 시간이 주어진다. 나는 그리고 내가 쓴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한다. 당연히 예쁘게 포장된 나의 생각과 신념이기 때문에 그 글을 읽을 땐 즐겁다. 거짓말은 아니되 예쁜 나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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