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Queerer Than We Can Suppose)

(2008년 가을, 스물다섯살의 어느 날)



며칠 전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교수가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라는 컨퍼런스에서 2005년에 강연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제목은 "Queerer Than We Can Suppose" 굳이 번역을 하자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보다 더욱 기묘한" 정도가 된다. 이 말은 도킨스가 처음 만든 것은 아니고 할데인J.B.S. Haldane이라는 사람이 했던 말이라고 한다. 부족한 영어실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연을 꽤나 여러개 찾아가며 보았지만 이렇게 짧으면서도 감동적인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이 강연 내용은 거의 그대로 최근에 출간된 《만들어진 신》 후반부에 고스란히 실려있었다.

나는 짧지만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제목에 주목했다. 왜 "Queerer than we suppose(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더욱 기묘한)" 가 아니라 "Queerer than we CAN suppose"일까? '추측한다', '가정한다(suppose)'는 것은 우리 뇌의 활동이다. 뇌는 우리 주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개연성을 갖는 일, 심지어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까지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보았던 한 송의 꽃도, 일년 후의 내 모습을 미리 그려보는 일도, 하늘을 나는 양탄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뇌가 있기에 머리 속에나마 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상상력이 실제 세계보다 더 큰 범위를 생각할 수 있다고 쉽게 믿어버린다. 상상력을 펼치는 주체인 인간의 뇌는 아직 그 신비가 모두 밝혀지지도 않은 곳이다. 어쩌면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뇌의 전지전능함과 완벽함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구의 영화는 현실보다 더욱 아름답고 박진감있으며 극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기묘한 세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우주의 모습보다 더욱 웅장하고 기상천외하리라 자신한다. 과연 우리의 상상력은 이 우주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만큼 무한한 범위를 다룰 수 있을까?

도킨스는 인간의 뇌란 단지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세상'을 보여주는 데 최적화됐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세계는 단 하나지만 그 속에 살고있는 수많은 동물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도만을 인식하도록 뇌를 진화시켜왔다. 결국 뇌가 인식하는 세계의 모습은 진짜 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에게 맞게 디자인한 시뮬레이션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는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로 이뤄져있다. 원자와 원자핵의 크기는 스포츠 경기장 내의 파리 한마리 정도의 비율과 같다. 우리가 빈틈없이 딱딱하다고 인식하는 바위조차도 실제로는 속이 텅텅 빈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바위를 비롯한 고체들을 "딱딱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이유는 우리 몸이 원자 사이를 돌아다니도록 설계돼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란 종이 마치 감마 레이(γ-ray)처럼 모든 원자 사이를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바위를 '딱딱하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는 지구가 자전을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인간에게 맞춰진 시뮬레이션 때문이다. 만약 지구가 도는 것을 평생 느끼며 살아야 한다면 진실을 이해하는 데 지나친 육체적, 정신적 비용을 지불하는 셈이다.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는 동시에 바닥에 닿지만 공기의 저항에 익숙한 채로 사는 우리에게는 그 사실이 거짓처럼 들린다. 우리는 모든 빛을 볼 수 있는 것 처럼 느끼지만 실제 전체 빛에서 가시광선이 차지하는 부분은 일부에 불과하다. 만약 인간이 일상적으로 빛에 속도에 가깝게 움직인다면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 시뮬레이션은 다른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우리가 빛의 반사를 통해서 눈으로 감지하는 이 세계의 모습은 그것을 소리로 감지하는 박쥐, 코로 감지하는 개의 세계와 아주 다를 것이다. 이들에게 청각이나 후각은 인간이 어떠한 이유로 시각을 잃었을 때 그것을 대체하는 감각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들은 우리가 보는 수준으로 듣거나 냄새를 맡는다. 아마도 그들의 청각 후각은 어떤 대상의 모양 뿐만 아니라 촉감, 색감까지도 짐작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이 강연에서 특히 인상깊었던 부분이 있다. 인간은 무생물 조차도 마치 감정을 가진 인간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도킨스는 시동이 걸리지 않는 자동차를 마구 두들기며 화풀이를 하는 어느 코미디언을 예로 들었지만 일상적인 삶에서도 우리는 종종 사물을 의인화시키곤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오랜 세월동안 단체생활을 해온 데 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상대방의 감정을 짐작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지구상엔 수많은 종들의 생물이 공존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인간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종차별주의적 주장은 그의 이론 앞에 설 자리를 잃는다. 우리도 결국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알고 살아가는 평범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식하고 상상하는 세계는 진정한 세계의, 그야말로 일부에 지나지 않는 작은 단편일 뿐이다. 우리가 무한하다고 느끼는 상상력의 한계 조차도 실제 그 이상의 기묘한queer 세계에서는 백사장의 모래 한 알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ps.
참고로 이와 관련된 더 많은 내용을 알고싶다면 그의 저서 《눈먼 시계공 The Blind Watchmaker》을 추천한다. 물론 다른 책이 이 책보다 못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이 강연에 흥미를 가진 사람에게라면 이 책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댓글 2개:

  1. 글 정말 깔끔하고 예쁘게 잘쓰시네요.. 요즘은 글 안쓰시는지 궁금합니다!

    답글삭제
    답글
    1.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2008년 군대 제대 후 복학한 다음에 썼던 글이니 벌써 8년이 흘렀네요. 직장인이 되고 정말 흔하디 흔한 핑계로 바쁜 일상에 예전처럼 많은 생각을 하고 글을 쓰지를 못하고 있네요...ㅎㅎ 댓글에 다시 맘을 다잡고, 사는 대로 생각하기 보다 생각하는 대로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키보드에 손을 얹어볼까 싶기도 하네요. 감사합니다!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