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영문학도 시절의 추억

(2005년 봄, 스물두살 어느 날)



<The Canterbury Tales>
(The General Prologue)

Whan that April with his shoures soute
The droghte of March hath pereced to rhe roote,
And bathed every veyne in swich licour
Of which vertu engendred is the flour,
Whan Zephirus eek with his sweete breeth
Inspired hath in every holt and heeth
The tendre croppes, and the yonge sonne,
Hath in the Ram his halve cours yronne,
And smale foweles maken melodye,
That slepen al the nyght with open ye
(so priketh hem Nature in hir corages),
Thanne lognen folk to goon on pilgrimages,
And palmeres for to seken straunge strondes,
To frene halwes, kowthe in sondry londes;
And specially from every shires ende
Of Engelond to Canterbury they wende,
The hooly blisful martir for to seke,
That ham hath holpen whan that they were seeke.

14세기 쯔음에 쵸서(Chaucer)가 쓴 <켄터베리 테일즈>의 가장 유명한 첫 18행이다. 한창인 봄날의 배경을 설명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며 시의 본문이 시작되기 전 일종의 인트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 전문(全文)은 꽤나 긴 편이지만 일반적으로 <켄터베리 테일즈>가 인용될 때는 90% 이상 이 부분인 경우가 많다.

2년 전 영문학 전공 시간, 각각의 학생은 서로 다른 과제를 부여받았다. 당시 나는 <켄터베리 테일즈>의 이 18행 부분을 자연스럽게 암송해야했다. 비록 지금은 조금씩 기억을 떠올려야만 더듬더듬 욀 수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입으로 중얼중얼 대면 제법 리듬까지 타면서 읊을 수는 있다.

14세기라면 셰익스피어도 아직 등장하기 이전, 당시에는 대부분의 시가 앵글로-노먼 라틴어로 쓰여졌다. 지금 세계의 판도와는 달리 영어는 '저급하고 평민들만이 쓰는 언어'로 간주되어 시에서는 사실상 배제된 것이다. 하지만 쵸서는 처음 영어로 시를 씀으로써 영문학을 배울 때 언제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영광을 부여받은 것이다.

당시에는 이렇게 억지로 영문학을 배우 데 대해 언제나 회의적이었다. 내가 14세기의, 한국도 아닌 저 대륙과 바다를 건넌 영국 시를 왜 외워야 하는지...도무지 세상 살면서 써먹을 일도 없는데 말이다. 내가 이 분야를 미치도록 파고 들어가서 학자로의 삶을 산다면 몰라도 그럴 가능성은 극히 적어보였다.

이 시가 iambic pentameter couplet(한글로는 어떻게 번역하는 지 모르겠다. 음보율 정도가 될래나? 한 행에 5번의 강세와 약세를 반복하며 그 구조가 2행에 걸쳐 나타나는 구조란 뜻. 중간고사 답이 이 단어를 쓰는 것이라서 아직까지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구조를 지니며 영문학의 시초가 됐고 어쩌고 저쩌고를 힘들게 외웠다.

6세기가 지나오는 동안 영어의 모양도 많이 바뀌어서 이 시에서 나타나는 영어의 형태는 현대 영어도 마스터하지 못한 나에겐 너무나도 생소했다. 발음도 독어와 불어와 영어를 섞어놓은 듯한 이상한 외계어인데다가 뜻도 모른 채 외우려고 하니 정말 고역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발표하기로 한 바로 전날 밤에 yahoo의 미국 사이트와 영국(U.K.) 사이트를 샅샅이 뒤졌다. 결국은 그 시를 읽은 목소리를 담은 MP3 파일을 구할 수 있었다. 아무리 읽어도 내가 읽은 음이 맞는지 확신이 안 서서 마음이 불편했던 이전과는 달리 그 파일을 틀어놓고 따라해보니 훨씬 쉽게 외울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컴퓨터를 켠 채로 새벽 3시 쯤 잠에 들었다. 왜냐하면 그 MP3 파일을 틀어놓고 스피커 볼륨을 높여둔 채로 책상에 엎드려 자면 왠지 잠든 무의식중에 내 머리속에 그 시를 낭독하는 소리가 공명하며 외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 나는 꿈 속에서 그 시를 읽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인 것으로 추측되는 느끼한 할아버지를 만난 듯도 했다.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잠도 어정쩡하게 잔 다음 날 오후, 드디어 영미문학 시간에 나는 학생들 앞에 섰다. 나와 같은 과제를 부여받은 학생이 둘 있었지만 나는 행여나 내 머릿속 시구(詩句)들이 달아날까 싶어서 제일 먼저 발표를 하기로 했다. 너무 많이 되뇌어서 그런지 당시 그 시구들은 암기된 데이터가 아니라 습관적으로 입에서 줄줄 나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한 앨범의 음악 CD만 들으면 한 트랙이 끝남과 동시에 다음 트랙의 가락이 머리속에 웅얼거리듯이...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비록 겨우 18줄에 불과하지만 같은 시 발표를 맡은 다른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한번 들은 발음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서 각자가 대충 넘겨짚은 발음으로 발표를 하고 만 것이다. 나처럼 영어로 된 야후 사이트에서 MP3 낭독 파일을 찾은 사람은 없었던 듯 하다.

발표가 끝난 후 의례적이지만은 않은 박수 소리가 잠잠해질 때 쯤에 교수님은 나에게 말하셨다. "이 시의 내용 처럼 앞으로 화창한 봄날이 오면 여자 친구 앞에서 들판을 보며 멋지게 이 18줄을 암송해보세요" 반쯤은 염장질이긴 했지만 철없던 마음에 마냥 기분이 좋았다.

한달 전 쯤 읽은 홍정욱씨의 <7막 7장>에도 저자는 나의 경험과 비슷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홍정욱씨가 미국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다닐 무렵, 유색인종이란 컴플랙스와 아직 온전치 못한 영어 실력 때문에 그는 반에서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괴짜였다. 그런 그가 선생님의 눈에 띌 기회가 한 번 찾아왔었다.

영미문학 선생님은 어느 날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에게 티.에스. 엘리엇(T.S. Eliot)의(우리들에겐 흔히 <황무지(The Wasted Land)>로 유명한 작가이다) <The Love Song of J.Alfred Prufrock>이라는 시를 가장 먼저 외워서 자기 집에 찾아오는 학생에겐 A+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 시는 나도 수업시간에 배운 적이 있는 작품인데 그 분량에서 뿐만 아니라 시어와 의미의 난해성에 있어서도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학생들 조차 고개를 젓게 만드는 시였다. 물론 나로서도 당시 이 시를 공부할 때 미치도록 머리를 싸맨 기억이 있다.

홍정욱씨는 당시 영어 회화나 작문 실력은 본토 학생을 따라잡지 못한다 할지라도 열심히 공부만 한다면 외울 수 있는 분야엔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그 반 학생 중 유일하게 선생님의 집에 찾아갔다. 꽤 늦은 밤에 찾아갔기에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온 선생님은 조금 의아해했지만 한치의 더듬거림도 없이 시를 멋지게 주루룩 외운 이 낯선 이방인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해줬다고 한다.

한 달 전쯤 당시 <7막 7장>의 이 부분을 읽던 나는 그 순간 홍정욱씨 처럼 훌륭하신 분의 자서전 속 일화가 나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에 혼자서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나는 그가 외웠던 시가 T.S. Eliot의 작품임에 더욱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외웠던 <The Canterbury Tales>의 앞 18행 부분은 봄날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내용인데 반해 T.S. Eliot의 대표작인 <The Waste Land>에서는 첫연 첫행이 April is the cruelest month(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연이긴 하지만 왠지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픈 마음까지 들었다.

당시 영미 시문학을 공부하면서 또 하나 머리에 남는 작품이 있다.

<In a Station of the Metro>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이 작품은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가 쓴 단 2행짜리의 시의 '전문(全文)'이다. 시가 산문과는 달리 언어를 다룸에 있어서 매우 함축적 장르라는 것을 설명할 때 흔히 인용되는 작품이다. 나는 글을 짧게 쓰지를 못한다. 내가 역량이 부족하기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말을 주절주절 갖다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이런 나에게 지하철에서 나오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검게 젖은 나뭇가지 위에 핀 꽃잎들'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해버린 그의 천재성으로 인해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는 짧다는 이유 뿐만이 아니라 이같은 번뜩이는 비유의 재치가 인상적이기에 내가 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시에 포함 돼 있다. 그 밖에도 Ezra Pound는 이백의 <장간행(長干行)>이라는 작품을 영시로 옮겨놓은 <The River Merchant's Wife>라는 시도 썼다. 당시 나는 이 시를 읽을 때 영미문학 속에서 찾은 동양적 수줍음과 기다림의 미학에 자극받아 가슴이 시렸던 추억이 있다.

<The River Merchant's Wife>
- Ezra Pound -

While my hair was still cut straight across my forehead
I played about the front gate, pulling flowers.
You came by on bamboo stilts, playing horse,
You walked about my seat, playing with blue plums.
And we went on living in the village of Chokan:
Two small people, without dislike or suspicion.
내 앞머리 아직 가지런히 자를 무렵
내가 앞문에서 꽃을 따며 놀면
당신은 죽마를 타고 와서
저를 돌며 청매(靑梅)로 장난하였죠.
우린 장간(長干) 마을에서 살아가던
두 꼬마, 싫은 마음도 의심도 없었어요.

At fourteen I married My Lord you.
I never laughed, being bashful.
Lowering my head, I looked at the wall.
Called to, a thousand times, I never looked back.
열네 살 때 당신과 결혼했었죠.
나는 수줍어 한번도 웃지 않았어요.
고개를 숙이고 벽만을 바라보았어요.
천 번을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죠.

At fifteen I stopped scowling,
I desired my dust to be mingled with yours
Forever and forever and forever.
Why should I climb the look out?
열다섯 살 때 찡그린 얼굴을 폈어요.
내 티끌이 당신 티끌과 섞이길 바랐어요.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말예요.
그런데 왜 망부대(望夫臺)에 올라가야 하나요?

At sixteen you departed,
You went into far Ku-to-yen, by the river of swirling eddies,
And you have been gone five months.
The monkeys make sorrowful noise overhead.
열여섯 살 때 당신은 떠났어요.
소용돌이치는 강가, 멀리 구당(瞿塘)까지 갔지요.
그러고는 다섯 달이 되었어요.
잔나비들 머리 위에서 슬픈 소리를 냅니다.

You dragged your feet when you went out.
By the gate now, the moss is grown, the different mosses,
Too deep to clear them away!
The leaves fall early this autumn, in wind.
The paired butterflies are already yellow with August
Over the grass in the West garden;
They hurt me.  I grow older.
If you are coming down through the narrows of the river Kiang,
Please let me know beforehand,
And I will come out to meet you
As far as Cho-fu-Sa.
가실 때 당신은 걸음을 차마 떼지 못했죠.
이제 문가에는 이끼들이 자랐어요, 딴 이끼들이.
너무 두꺼워 걷어낼 수가 없군요!
올 가을엔 낙엽이 바람결에 일찍 집니다.
팔월 들어 서편 뜰의 풀 위를 나는
짝지은 나비들 벌써 노랗고요.
그것들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난 늙어가요.
당신이 키앙 강 협곡 따라 내려오실 양이면,
제게 미리 알려주세요,
당신을 맞으러 장풍사(長風沙)까지라도
갈 테니까요.


이제 나는 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위와 같은 공부를 하던 전공을 뛰쳐나와 다른 전공의 길을 걷고있다. 물론 나는 지금의 길에 만족하고 있지만 때때로 저렇게 난해한 영어 사이에서 힘들게 뜻을 찾아 해매던 때가 그립곤 한다. 과연 앞으로 내가 다시 영시를 외우기 위해 밤을 새고 또 그것을 남들 앞에서 멋지게 욈으로써 박수를 받는 기회가 오기나 할까?

야속하게도 재수를 한 뒤 전공을 바꾸자마자 시 분야에서 손을 완전히 떼어버린 지금, 나는 영미권의 시는 커녕 한국의 시 조차도 완전 문외한의 길을 걷고있는 듯 하다. 아니 어쩌면 문학이라는 장르 자체와 담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