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봄, 스물네살의 어느 날)
시드니 셸던Sydney Sheldon과 피천득. 글쓰기를 업으로 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인종, 국적, 작품의 성격 등등에서 도무지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두 사람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이 두사람에겐 묘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내가 한창 그들의 작품에 빠져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내가 그들의 별세를 알리는 신문 기사를 접할 땐 언제나 그들의 작품을 읽고 있을 때였다. 물론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전설적인 축구 선수 펠레Pele가 자신이 매번 월드컵 직전에 선전을 예감하며 지목한 팀들이 공교롭게도 본선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에 가깝다면 적절한 비유가 아닐까 한다.
이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세계의 죽은 작가들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다. 반드시 문학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사람까지는 아니라 해도 작가라는 직업은 참으로 행복한 일인 것 같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글'이라는 창窓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한다. 나는 이 세상 모든 갈등과 싸움의 원인은 되짚어가다 보면 결국에는 소통의 부재, 그것에 따른 공감대 부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적으로 만약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공감한다면 어찌 갈등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상대방이 느끼는 바를 내가 모두 함께 느끼고 있는데 말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는 그의 글을 읽어주고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주는 많은 친구를 둔 사람이다.
시중에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처세서들이 넘쳐난다. 나는 그런 책들이 싫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얄팍하게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라'는 데서 찾을 수 없다고 믿는다. 작가의 솔직하고 진지한 고찰 끝에 나온 글들을 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넓은 마음을 지니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효용效用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있다. 문학은 "그것이 쓰여진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을 재미있게 실어나르는 당의糖依이다.", "독자가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catharsis)를 위해서 읽는 것이다." 등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장 먼저 "소통과 공감을 위한 경로channel"에 한 표를 주고 싶다.
문학을 매개로 한 소통과 공감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기본적으로는 작가와 독자 사이가 있다. 하지만 그 밖에도 '같은 작품을 읽은 독자 사이', '다른 작품을 읽은 독자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창조적인 소통과 공감이 발생한다. 뿐만 아니라 '작중 인물과 독자 사이'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때 독자는 작중 인물 속에 자신을 투영시킴으로써 가상적인 한 인물의 삶을 대신 살아볼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소통은 우리가 수많은 타인들의 마음 속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을 크게 증가시켜준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영미권 문학에 치우치긴 했지만 최근에 읽은 작품을 되짚으며 생각해보았다. 나보코프V. Navokov의 <롤리타Lolita>에서는 어린 소녀에 대해 성적 도착증性的 倒錯症을 가진 한 교수에게 마저도 그의 증언을 들으면서 함께 동정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었다. 호손N. Hawthorne의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 로렌스D.H. Lawrence의 <채털리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을 보며 불륜을 저지른 여인에게 조차도 무조건 돌을 던지기 보다는 '사랑'이라는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워나갔다.
피츠제럴드F.S. Fitzgerald의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를 볼 땐 개츠비의 사랑에 대한 집착과 좌절의 마음을 공감해나갔다. 조이스J. Joyce 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에서는 예술가적 감수성과 사회적, 종교적 가치가 갈등을 일으키는 한 소년의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속에 나를 투영시킴으로써 주인공 디덜러스S. Daedulus와 함께 예술가적 선택과 자기 유배를 경험할 수 있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원제:Essays in Love)>는 스위스의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쓴, 국내에도 잘 알려진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 제목에 영감을 얻어 세상의 죽은 작가들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왜 나는 그들을 사랑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내가 세상의 수많은 작가, 독자, 작중 인물들과 함께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창窓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 창을 통해서 내 머리와 가슴은 훨씬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나는 또 다시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나는 그들을 사랑하는가?" 이 소설에서는 사랑에 대해 스탕달Stendhal이 언급한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사랑은 대상의 존재 보다는 부재와 연결돼 있다" 나는 그들이 세상을 떠났기에 더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작가가 세상을 뜸으로써 나와 그들은 존재가 아닌 부재로 연결된다. 이제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은 단순히 '소통에 대한 고마움'을 넘어서서 아쉬움과 합쳐져 더 커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동시대에 살고있는 작가들 보다는 이미 세상을 뜬 작가, 예술가들을 더욱 존경하며 때론 우상화 시키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나는 그들을 사랑하는가?" 그것은 내가 그들과 동시대에 살 수 있었던 이번 생애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행운이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과 같은 천재는 나같은 범인凡人과 같은 차원, 같은 시공간의 삶을 살아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나와 같은 차원의 시간 혹은 공간을 살았다는 것은 그들이 특별히 우리 세계를 더 아름답게 해주기 위해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되어 횃불을 가져온 것이라 믿는다. 그들의 죽음은 나에게 내려진 기적같은 소중한 행운과 축복을 끝마치는 조종弔鐘소리이기에, 나는 더더욱 이 짧은 생에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세 번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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