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처세서의 범람

(2006년 가을, 스물세살 어느 날)


서점을 돌아다니다 보면 처세, 자기 관리에 관련된 책들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생각이 든다. 덧붙여서 최근의 베스트 셀러들 가운데서는 쉬운 우화의 형식을 빌어서 인생의 교훈을 주고자 하는 책들 또한 많다. 이런 책들은 대체로 직접적이고 귀에 솔깃한, 때때로는 구체적인 수치를 포함한 제목이 붙여짐으로써 그 책을 읽기만 하면 곧바로 내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 처럼 보이게 한다.

물론 이와 같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책들도 때로는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책들이 범람함으로 인해서 자칫 수많은 독자들이 이 세계의 근본 원리, 그리고 그 이면을 보지 않은 채 눈 앞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들에 대처하느라 급급한 사람이 되지나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 막연히 대중(大衆)의 선택을 신뢰하던 시절 '베스트셀러 = 양서(良書)' 라는 공식이 머리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나로서는 작금의 인기 도서들에게 붙여지는 '추천 도서' 라는 말이 일종의 '개념의 인플레이션' 이란 생각이 든다. 게다가 그런 책에서 가끔씩 양념으로 인용되곤 하는 위인들의 명언들도 새로운 의미와 각도로 재창조되기 보단 책에서 제시하는 주장에 약간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퇴행적 재생산' 정도에 머무는 것 같다.

이러한 류의 책들은 대게 "'how(어떻게)' 에 대한 담론"이다. 어떻게 듣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비록 우화와 동화의 형식을 빈다고 하더라도 결국 대체적인 결론은 '이러이러하게 살아라' 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책을 읽는 동안에는 '아! 그렇구나' 하며 술술 페이지를 넘기지만 -실제로 이런 책은 막히지도 않아서 얇은 책이면 3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다 - 마지막 장을 덮는 그 순간 나는 다시 바쁜 일상 속에서 그 내용의 95% 정도는 잊은 채 지내곤 한다. 나는 그 이유를 모든 현상의 이면에 숨겨진 원리에 대한 의문 "why(왜)"의 부재,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그 무언가(아르케:arche)를 찾는 "what(무엇)"의 부재에서 찾는다.

나는 세상 모든 지혜에는 그 근본과 역사가 있기에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왜 생겨났으며, 어떻게, 어떤 형태로 이어져 왔는지를 먼저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현재 우리가 느끼는 지식의 눈높이는 소위 모더니스트들이 말하듯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난쟁이와 같이 작고 보잘것 없다. 따라서 내가 당연시 여기는 나의 눈높이는 실상 내 키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앞의 수많은 선학(先學)들이 거인이 돼어 나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 때 단순히 "바로 여기서, 바로 지금(right now, right here)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을 알고자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횡적인 시각은 자칫 내가 밟고 선 거인의 어깨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인해 외부 조건에 선형적(線形的)으로 대처하는 조건반사형 인간이 될 우려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재기넘치고(clever),영리한(smart )사람을 지혜로운(wise) 사람과 구별해야 한다.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일은 단정적으로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 앞의 수많은 선학들이 그것을 위해 평생을 바쳐왔던 것이다. 어려운 것을 알기 위한 노력은 당연히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 수고를 감당하지 않고 지식과 지혜를 얻고자 함은 어떤 방향에서든 누락과 곡해(曲解)를 거칠 수 밖에 없다. 교육과 오락을 합성한 신조어인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 education + entertainment)와 같은 경우도 부차적인 방법으로써, 혹은 입문의 한 방편으로써 활용될 수는 있지만 결코 교육의 궁극적인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의(糖衣)만 잔뜩 입혀놓은 당의정은 결코 좋은 약이 될 수 없듯이.

오히려 진정 변하지 않는 삶의 지혜란 "공짜란 없다"인 것 같다. 우리 주위에 널린 수많은 처세서들을 둘러보자. (이하 책 제목은 모두 가상의 제목임, 동일한 제목의 책이 있더라도 우연에 의한 것임) <대화의 기법>이라는 단 한 권의 책으로 화술의 마법사가 되고, <영단어 이 책만 보면 된다>라는 책만으로 영어 실력이 쑥쑥 큰다면? <협상의 방법>이라는 책만 보면 유능한 네고시에이터(negotiator)가되고, <긍정의 힘> 한 권으로 세상을 긍정적이고 아름답게 볼 수 있다면......그것은 책이 아니라 마법이다.

우화나 동화 형식의 책들도 그리 다르지 않다. '선물'과 '현재'라는 영단어(present)가 같은 철자라는 데 착안하여 어느 순간 부터 인생을 소중하게 바라볼 수도 있다. 물론 그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삶을 바라보는 태도, 넓게 보면 가치관, 세계관이 이렇듯 중학생도 찾아낼 수 있는 두 단어 속에서 나올 만큼 간단한 것일까? 혹시 이런 말장난처럼 쉬운 방법으로 인생의 정답을 찾아 "유레카(eureka)"를 위치고픈 우리의 게으른 욕망이 자극받은 건 아닐까?

치즈를 누가 옮겼든, 마쉬멜로를 누가 먹었든, 이들은 모두 지혜를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댓가인 노력과 고통의 쓴맛을 피하고자 하는 사탕발린 길이란 점에서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만약 이런 방법으로 엄청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는 불공평한 일이다. 아니, 애초에 이런 내 주장의 반례(反例)가 될 만한 불공평한 거래는 성립되는 일 조차 없으리라고 나는 자신한다.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 대부분이 고전으로 채워진 것도 이런 의미에서 매우 적절한 선정이었다고 여겨진다.

내 눈 앞에서, 역시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동시대의 난쟁이와 눈을 맞추며 사는 것도 중요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현실 그 자체이기에. 하지만 진정 어떻게, 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동료 난쟁이에게 물어보는게 과연 옳을까? 어쩌면 그도 역시 큰 거인의 어깨에 있기에 번지르르하고 솔깃한 답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지혜는 결국 내 발 밑에서 지금 나를 높이 치켜올려주기 위해 수만년간 거기 있었던 거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거인을 알기 위해 그의 발밑까지 내려가는 일은 일견 나의 문제와 상관없고 불필요한 시간과 노력의 낭비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결국 나를 떠받치는 거인의 근본을 모르고서 지금 내 위치를 알고자 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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