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이른 봄, 스물 한 살 어느 날)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주위 사람들에게 많이 듣고, 또 우리가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묻기도 하는 질문이다. 어릴 땐 무작정 "의사요", "대통령요", "간호사요"하다가 점차 자람에 따라서 그 크기가 점점 줄어들거나, 혹은 목표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실 직업 사이에 크고 작음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회 통념으로 봤을 때 나는 약간 다른 경우라 볼 수 있다.
유치원때는 난 직업 군인이 되고싶어했다. 유치원에서 한 번은 근처에 있는 군 부대인 '무열대'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우리는 군인 아저씨들이 보여주는 행사용 쇼에 정신이 멍~했다. 일렬로 서서 차례대로 총을 공중으로 휭~돌리며 던진 것을 멋지게 받은 뒤에 다시 차렷자세로! 그리고 총부리에 연기를 휘날리며 공중을 향해 일체 발사!!..뿐만 아니라 당시에 탱크와 헬리콥터, 전투기 등등을 보여줄 때는 난 이담에 커서 꼭! 저것들을 매일 타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의 성격이지만...당시만 해도 난 상당히 호전적인 꿈을 가졌었다.(누가 믿어줄라나?^^)
그래서 그랬는지 그 시절 나에겐 유난히 전쟁놀이 장난감이 많았다. 모두가 아버지가 나무로 만들어 주신 장난감이었다. 나무로 된 십자검은 물론이고 피스톤 회전까지 신경쓰신 권총까지.....운 좋게도 아버지는 나무 공예에 취미가 있으셨다. 당시 우리집은 아파트가 아니라 주택이어서 넓은 마당이 있었고 그 마당은 주로 아버지의 작업장으로 쓰였다. (지금 내가 대구에서 쓰는 침대도 아버지가 당시에 만들어주신거다. 이 침대는 당시 만들어져 10년이 지난 지금도 훌쩍 커버린 나를 끄떡없이 매일 편안히 재워주고 있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 즈음인가 해서 난 슬슬 호전적인 피가 묽어지기 시작했다. 거짓말 아니고 그 때 부턴 학교에 있는 시간 말고는 집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와 함께했다. 어쩌다가 책이 내 눈에 들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친구들이 자전거와 팽이 등등에 미쳐있을 동안에도 난 그들을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와 책을 빼들었다. 그 때 자주 읽었던 책은 위인전과 과학 관련 서적이었다. 특별히 한 사람이 생각나는 위인은 없지만 다들 지금 내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데 작은 몫이나마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과학 서적들도 나의 문제 탐구 능력을 많이 신장시켰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남들이 당연시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혼자만 의문을 품고 고찰하는 때가 많다...믿어주시길..)
이런 영향 때문일까? 초등학교 1학년 때 부터 담임 선생님 눈에 난 뭔가 특별한 아이 처럼 보였을 지도 모른다. 정말로 천재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보낸 나는 학부모 참관 수업 때 마다 발표를 도맡는 '똘똘이'로 취급 받았다. 성적이 반에서 수위를 다투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 명석한 듯한 면이 있었나보다...
그러다가 나에게서 부터 모범생이란 타이틀을 뺏어간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컴퓨터;; 초등학교 3학년 무렵즈음엔 우리집에 컴퓨터가 들어왔다. 당시로선 최신형인 386이었다!! 아니 어떻게 플로피 디스크 없이도 컴퓨터를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컴퓨터를 켤 때는 무조건 부팅디스크를 한 장 넣고 컴퓨터를 켠 후에 내가 사용할 디스크를 넣고 작업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사촌형 집에서 286 컴퓨터로 하던 페르시아 왕자와 금도끼은도끼가 우리집에서 칼라 모니터를 통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플레이 될 땐 감동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그 때 부터 내가 집에서 독서를 하던 모든 시간은 컴퓨터에게 넘어갔고 지금껏 표지가 닳도록 읽히던 책들은 먼지와 벗하며 긴~휴식을 취할 수 있었으리라...
나름대로 한 일에 집중하면 무섭도록 파고드는 나로서는 이젠 컴퓨터는 웬만한 사람 이상의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컴퓨터 고장이 났을 때 친구들은 나를 찾게 되었고 우리집 컴퓨터도 주인 잘 만나서 하드디스크 40MB(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하드 용량이었다)짜리 컴퓨터지만 더블스페이스, 압축 프로그램, 램 드라이브 등등에 의해서 고용량 컴퓨터 못지않게 높은 효율로 쓰였다. (어떻게 보면 무지 혹사시켰다;;) 그래서 그 때 부터 난 꿈이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바꼈다. 그 때 이후로 내가 컴퓨터를 놓지 않고 계속 해왔다면 지금 빌 게이츠가 나를 보며 침을 흘렸을지도 모른다............라고 혼자 생각한다 -_-
허나 학생의 본분은 역시 학교 공부인지라...그 본분은 자신을 잊어준 나를 끝까지 용서하지는 않았다. 결국 날벼락이 떨어지고 만 것이다. 4학년 1학기 정확히 이 때를 기억한다. 나의 성적표에 '수'는 하나도 없었고 수학을 비롯하여 많은 과목 아래에 양떼들이 우글우글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그 날 저녁 나는 어머니로부터 유례없는 야단을 맞았다. 그리고 솔직히 난 이때 처음 알았다.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야단을 맞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_-그리고 그 이후로도 난 아직 부모님으로부터 이 때 보다 크게 야단을 맞은 적이 없었다. 그 날을 난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지금 20살이 넘어서 그 상황을 돌아보아도 부모님이 좀 심하지 않았었나 싶었을 만큼 혼났으니 말이다.
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 때 이후로 난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학원은 다녔지만 공부를 배운 학원은 아니었다. 전부다 피아노, 태권도 뿐이었는데 처음으로 연필을 잡는 학원을 다닌것이다. 학원에서도 뭐 그리 잘 한것은 아니었다. 그냥 지금 돌아보면 그저 가방 운전수 역할만 했던 것 같다. 학교 성적도 다시 상향선을 그린 것으로 기억하지도 않는다. 결국 나의 머리속 4학년은 공부도 그저그저, 컴퓨터도 그저 그런 학생으로밖에 기억되지 않는다. 자연히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는 꿈도 서서히 사라져갔나보다.
그렇게 평범한 학생으로서의 생활은 중학교때도 계속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에게 컴퓨터 게임 이후로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바로 외국 음악을 듣는 일...물론 국내 가요는 어린 시절부터 즐겨들었다. 하지만 외국 음악을 부모님 LP판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능동적으로 구입해서 듣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가 처음이었던걸로 기억한다. 당시 내가 젤 좋아하게 된 가수는 '백스트리트 보이즈' 지금도 좋아하지만 당시엔 나로서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내 보물 1호는 KBS 에서 특집으로 중계했던 그들의 1집 앨범 라이브 공연 실황 녹화테잎이었다. 그들의 앨범을 모두 구입한 것은 물론 팝음악 잡지 GMV 등에서 제공되는 브로마이드, 독자란을 통해 매매가능한 사진 자료 등등...그들의 흔적이 남은 모든 물건은 나에겐 매력의 대상이 되었다. 일요일 12시에 방송되던 '뮤직 타워'는 다음 날 아침 졸다가 듣는 선생님의 꾸중을 기꺼이 기회비용으로 지불할 만큼 멋진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모든 목표 또한 팝 음악에 맞춰졌다. 내가 노래를 못하고 또 외국에 나갈 수도 없으니 가수가 될 수는 없지만 팝음악을 많이 들을 수 있는 팝 칼럼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라디오를 통해 매주말 배철수 아저씨가 전해주는 빌보드 차트 top20를 내 노트에 꼬박꼬박 옮겨적으며 당시의 팝 첨단 흐름을 뒤쫓으려 노력했다. 이 곡이 순위가 떨어진 이유, 저 곡이 급상승 하는 이유등등을 나름대로 분석하여 차트 아래 빈 칸에 빼곡히 적기까지 했다. 마치 내가 실제 칼럼니스트가 되기라도 한듯이...(중3때 자기 꿈을 주제로 백일장을 한 적이 있는데 나의 글이 최우수 글로 당선돼서 중학교 졸업식때 받은 교지에 아직 내 글이 남아있다. 물론 팝칼럼니스트가 되고픈 내 소망을 담은 글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고등학교는 어떻게 보면 당시 무럭무럭 자라던 나의 꿈을 키울 기회를 빼앗은 괴물일지도 모른다. 입시라는 무거운 장벽 아래 난 음악을 들을 시간들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나의 꿈을 키워준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과정에 있는 일반사회 시간에 가장 지루한 부분이 어디였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대부분이 ‘합리적 선택과 시장’ 파트를 꼽지 않을까 한다. 들어도 들어도 헷갈리는 수요와 공급 곡선, 기회비용 등등 우리의 머리를 골치 아프게 만드는 부분이 이 파트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사회과학 속에서도 왠지 이런 부분이 좋았다. 즉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난 상당히 수치적으로 따지는 것을 좋아한다. 내 생각엔 수학이 마치 인문학, 사회과학의 어중간하고 미지근한 듯한 부분을 보완해줄 최후의 무기인 것 같았다. 어쩌면 저 그래프들이 사회과학 가운데 홀로 명쾌하게 답이 나오기에 나의 마음을 독차지했는지도 모른다. 이때부터 나는 상경계열 쪽의 학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어렴풋한 꿈을 내 미래의 목표로 확정지은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그 책은 그리 역사에 큰 발을 남길 만한 것도,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책도 아니다. 그 책은 바로 최인호가 쓴 ‘상도’라는 책이다. 솔직히 너무 길어서 줄거리도 잘 생각이 안 난다. 하지만 그 책을 읽는 동안에 나는 정말 임상옥과 같은 깨끗하면서도 냉철한 경영인이 되고 싶었다. 특히 그가 보여준 인간중심적인 상업 모토는 평생 내 가슴에서 잊혀지지 않을 철학을 형성했다.
“장사는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우연인지 몰라도 현재의 스타벅스를 이룬 하워드 슐츠 회장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돈 자체를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는 자신의 종업원을 동지, 가족처럼 생각하고 더 나아가 고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경영을 하라...아마도 임상옥과 비슷한 맥락에서 한 말일 것이리라.
우리 나라 기업에서 특히 IMF 이후에 경영난을 겪게 되자 가장 먼저 예산을 삭감편성한 분야가 직원 교육 프로그램 쪽이라고 한다. 하지만 직원을 결코 사장을 위해 일하는 존재로 봐서는 안된다. 그들은 소비자를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고객은 우리 기업으로부터 발길을 돌리게 되고 회사 또한 더욱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고 따라서 기업가와 노동자, 직원 모두 망하는 것이다. 사람을 잃게 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인간중심 경영’...건전한 이윤 추구로 사회에 보탬이 되는 깨끗한 경영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만약 미래에 경영인이 된다면 나는 이 말을 책상 혹은 지갑 속에 간직한 채로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이런 꿈을 실현시키고자 내 전공을 바꾼 적이 있다. 사실 대학교에 처음 입학할 때 나는 인문학 분야를 전공하게 됐다. (과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고등학교 과정에선 경제학을 배우지 않았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과목은 ‘영어’였다. 어쩌면 ‘좋아했다’ 라기 보다는 그냥 남들보다 성적이 잘 나왔기에 ‘기특했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수능 치고 나서 난생 처음 손을 댄 첫 토익 시험에서도 700이 넘었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그런 자신감 때문인지 난 인문대학에 가서 영문학을 하고 싶었다. 단순히 같은 노력을 해도 점수가 잘 나온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상경계열 학문을 전공하기엔 내 수능 점수가 그에 따라주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은 결코 학문상 우위를 논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단지 내 미래 목표가 상경계 학문에 더 부합했을 뿐이다.) 어쨌든 나는 다시 공부같지 않은 수능공부를 반년 더 하게 돼서 상경계열 쪽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최근에 와서 나는 대학 입학 심층면접을 위해서 경제학 책을 많이 읽을 기회를 가졌다. 지원한 과는 경영학과이지만 면접에서는 경영 보다는 경제 관련 파트가 많이 출제되기 때문이었다. 한 달 동안에만 경제학 관련 책을 4권 읽었고 (그것도 술술 읽은 것이 아니라 꼼꼼히 생각해가면서) 그 동안 지금껏 알지 못했던 많은 경제학적 지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런 경제학에 대한 매력은 내 미래의 꿈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비록 돈은 많이 벌수 없을지라도 딱딱한 책상에 앉아 나의 추위와 배고픔은 잊은 채 국민들의 살림을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하는 가난한 경제학자도 되고 싶었다. 혹은 직접 국민들의 후생을 위해 위해 실무를 볼 수 있는 경제 고문, 더 나아가 대한민국 재정경제부 장관까지도 꿈꾸게 되었다. 딱딱한 경제학 서적 속에 등장하는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르도, 알프레드 마셜, 존 메이너드 케인즈 등등이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확실히 꿈이란 것은 어떤 냉철한 판단보다는 이런 직관적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더욱 최근에는 공인회계사, 펀드매니져, 밴쳐케피탈리스트, 경영컨설턴트 등등 많은 금융 관련 직업들에 대한 매력이 나의 머릿속을 혼란하게 만들고 있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서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난 이 질문에 확실히 대답 못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어떻게 한 평생 살아가는 자신의 앞길에 저렇게도 목표 의식 없이 사는 걸까? 하지만 여러 십수가지의 다양한 꿈들이 내 머리 속에서 경합하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겨우 21살이 이 된 지금은 자신의 미래를 한정짓기엔 너무나도 가능성이 많은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고등학생, 중학생은 말할 필요도 없다.
현재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나는 어떤 것도 될 수 있고 그 꿈은 어떤 가지를 뻗치며 커갈지 모른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말았으면 한다. 천천히 자기 앞에 닥치는 운명 아래서 최선을 다할 때 나는 어떤 길 위에 서더라도 당황하지 않는 성숙한 인격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언젠가는 좁아질 수 밖에 없는 길...너무 앞서서 좁히려고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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