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소동파 <적벽부> 삐딱하게 다시 보기
(2004년 여름, 스물 한 살의 어느 날)
지금으로부터 약 1천년 전 쯤, 송나라 시절 황저우에 유배되었던 소동파는 어느 날 황저우성 밖의 적벽에서 놀다가 영감을 얻어 저 유명한 <적벽부>를 지었다. 적벽은 잘 알려졌다시피 과거 위/촉/오가 각축을 하던 삼국시대에 위나라 조조가 촉나라 제갈공명과 오나라 주유의 연합군 계략에 혼쭐이 난 곳이다.
적벽부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 국어교과서 후반부에 실렸던 작품이다. 당시 수업을 마친 후 독서실에서 자습을 하며 이 작품을 감상할 때 고전어로 쓰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글귀 하나하나가 너무나 주옥같아서 어울리지않게 감상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소동파는 수백년을 뛰어넘어 적벽의 정한을 잘 담아내었고 우리 나라의 누군가는 또 많은 세월을 뛰어넘어 그의 글을 우리 고전어로 생생히 잘 옮겼다. 그리고 그의 글은 또다시 수백년을 넘어 지금 나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전하고있다. 오늘 언어영역 과외를 준비하며 이 작품을 읽었는데 나는 다시 그 때의 감동을 고스란히 느꼈다.
작품 속 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어로 번역)
"서쪽으로 하구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을 바라보니 산천이 서로 얽혀 빽빽히 푸른데 이는 맹덕(조조)이 주랑(주유)에게 곤욕을 받은데가 아니던가? -중략- 술을 걸러 강물을 굽어보며 창을 비끼고 시를 읊으니 진실로 일세의 영웅이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하물며 나(손)는 그대(소자)와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중략- 한 잎의 좁은 배를 타고서 하루살이 삶을 천지에 부치니 아득한 넓은 바다의 한 알갱이 좁쌀이로다. 우리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긴 강의 끝없음을 부럽게 여기노라"
이에 소자는 이와 같이 반박하며 답한다.
"손은 저 물과 달을 아는가? 물이 가는 것은 이와 같으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달이 차고 비는 것은 저와 같으되 마침애 줄고 늚이 없으니 변하는 데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이지만 변하지 않는 데서 보면 사물과 내가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 또 천지 사이엔 제각기 주인이 있어 나의 것이 아니면 한 터럭이라도 가지지 말것이지만 강 위의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중략-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조물주의 다함없는 갈무리로 그대와 나 함께 누릴 바로다.
소동파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은연중의 손의 인상무상적 철학 보다는 보다는 소자의 긍정적 사상에 표를 던진다. 손은 적벽의 강을 보며 영웅도 한 때요 강도 흘러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애상을 느끼며 슬프게 피리를 불지만 소자는 그를 끝내 설득한다. 만물에 대한 감상은 자기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느냐에 달린 것이다. 우리는 달이 표면상으론 차고 기울며 변하지만 그 원 모습은 한결같다. 강도 흐르긴 하지만 강 그 자체는 변함없다.
하지만 오늘 나는 조금 삐딱한 관점에 서서 이 작품을 재해석하였다. 예전과 지금 이 작품을 감상하는 나에겐 겨우 2년의 시간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 2년의 세월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신선한 관점을 부여한 것을 보면 나이를 헛먹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전 경영학 전공 수업에서 교수는 우리에게 아주 인상적인 말을 해주었다. "통계는 고문하면 자백한다" 즉 이 말은 우리가 같은 통계 결과를 도출한다 해도 그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 결과를 이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수업에서 발표를 맡은 그룹은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로 이미지를 구축한 미샤(MISSHA)의 전략을 분석했었다. 그 분석 과정에서 그들은 설문 조사를 통한 통계자료를 이용했는데 미샤의 상품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질문에서 그들은 통계 결과 97%의 사람들이 미샤에 대해 긍정적인 표를 던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본 실상은 달랐다. 교수님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껴서 그들에게 질문했다. "그 설문 조사 어디서 했니?" 그 조의 조장이 대답했다. "미샤 매장 출구 앞에서 화장품 구입한 고객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로 조사 했습니다." 조사 대상이 이미 미샤를 선호하는 사람으로서 그 회사 제품을 구입한 고객들이니 당연히 만족도가 높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교수님이 지적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 나라 20~30대 여성들 약 3%를 제외한 대부분이 미샤를 좋아한다고 믿을뻔 한 것이다.
비슷한 예로 얼마전 신문에 난 사설을 본 적이 있다. 징병제를 채택하는 우리 나라와는 달리 모병제를 실시하는 미국에서 해병대의 지원율이 매년 갈수록 떨어지자 해병대 지원자를 늘리기 위해 내놓은 통계 자료가 있었다고 한다. 그 통계자료 가운데엔 "미 해병대 출신자의 심장병 사망 확률이 뉴욕 평균 남자들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눈속임이다. 원래 해병대는 일반인보다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 주위에도 이런 얄팍한 수법은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몇년 전 고속버스 조합에서 고속버스 운임을 인상했는데 그 인상률의 표기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예를 들어 원래 100원에서 125원으로 인상됐다면 그 인상률은 25%라고 잡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들은 인상된 금액과 인상되기 전의 금액의 차는 25원이고 이 25원은 인상 후의 금액으로 보자면 20%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상률을 20%라고 썼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쓴 것이다.
손은 달과 강이 변한다고 했지만 소자는 변하지 않고 늘 한결같다고 말한다. 누구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달의 모양이 변하는 것도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반면에 어제의 달이 오늘의 달과 같은 달이란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강물도 마찬가지다. 어제 이 지점을 흐르던 강물이 현재 이 지점의 물과 같은 원자, 분자는 아니다. 하지만 어제의 낙동강이 오늘엔 금호강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물을 보는 관점에 따라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도 다르단 말은 그만큼 자기 유리한대로 사건을 끌어 해석할 수 있는 아전인수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손과 소자는 반쯤 똑똑하지만 그들 모두를 뛰어넘는 아주 똑똑하지만 간사한 자가 나타난다면...그는 슈퍼맨 배트맨을 뛰어넘는 괴력의 사나이가 될 것이다. 하늘에 멀쩡히 뜬 달을 변하게도 할 수 있고 멈추게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시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으로 돌아가자면 나 또한 역시 소자의 관점을 더욱 존중한다. 물론 손의 말 처럼 조조와 주유, 제갈공명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런 영웅이 한 때 있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마치 강물이 흐르고 흐르지만 그들의 영웅담을 담은 이야기는 강물에 씻겨가지 않은 채 후대인에게 끊임없이 회자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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