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어설픈 코스모폴리탄

(2007년 겨울, 스물네살의 어느 날)



글쓰기 책 두 권을 읽었다. 그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나름의 기준을 잡고 이제껏 내사 써온 글들을 몇 개 읽어보았다. 중학생 시절부터 교내 백일장, 독후감, 논술 대회 등등에서 대부분 상을 받아왔던 만큼 나름 글쓰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잘못된, 그것도 매우 잘못된 착각이었다.

대체로 주제, 구성, 맞춤법 부분은 후하게 쳐주면 합격점을 받을 만 했다. 문제는 역시 '문장' 단위였다. 대체로 내 문장은 지나치게 길었으며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은 삭제하거나, 좀 더 짧은 다른 표현으로 대체해도 무리가 없는 군더더기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심각하게 교정의 필요성을 느낀 부분은 부적절한 외국어 번역투의 문장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can not help~).", "~하고있는 중이었다(was ~ing).", "~했었다(had ~ed)." 와 같은 표현을 써왔다. 문장 구성 면에서도 화법, 비교법에서 심심찮게 영어식으로 구성된 문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내가 이러한 표현을 쓰면서도 그것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물론 글쓰기 책에서 주어진 예문例文을 보고 틀린 부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주관적인 입장에서 글을 쓴 후에 퇴고 과정에서는 이런 비슷한 오류들이 계속 발견되곤 한다.

언어는 사고思考를 담는 그릇이다. 예로부터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도 있듯, 말 내지 글은 사람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때문에 많은 기업이 신규 직원을 채용할 때 자기소개서를 중요시 하는 것이다. 이 전제 하에서 내 글 속에는 막상 멍석 깔리면 잘 할 줄도 모를 외국어에 어설프게 오염된 부끄러운 내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영어 조기교육 열풍은 어제 오늘 뉴스가 아니다. 동시에 그 대척점對蹠點에서는 그것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아직 모국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섣불리 영어를 가르치면 두 언어 사이에 혼란을 줄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지금껏 나는 이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언어(작문)습관을 돌이켜보면 그것이 결코 기우杞憂만은 아닌 것 같다. 두 언어를 혼동한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어휘의 혼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나처럼 사고방식 자체가 변화되어 '한글로 쓰여진 영어 문장'을 남발하는 것도 일종의 언어 혼동이다.

신영복 교수는 영국이 지금도 여전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했다. 물론 전 세계에 걸친 식민지와 그에 따르는 부富로 누려왔던 영국의 화려한 영광은 과거 이야기다. 하지만 오늘날의 영국은 그리니치Greenwich 천문대에서 세계인의 시간을 거머쥐고있다.  런던 금융시장은 세계 제1의 금융시장으로서 지구의 경제 흐름을 주도하고있다. 영국의 언어인 영어는 미국, 호주, 필리핀을 비롯하여 동-서양, 남-북반구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태양 아래 울려퍼진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영국은 여전히 전 세계에 걸쳐 건재하는 나라이며 심지어 이렇게 내 머리 속에까지 둥지를 트고 있다.

문화적 제국주의는 멀리 있지 않다. 영국 뿐 아니라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은 '언어'라는 문화적 자산을 이용해 전 세계의 유학생들을 끌어모으며 외화外貨를 번다. 심지어 같은 영어권 국가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영어의 본고장인 영국에서 '정통 영어Queen's English'를 배우기 위해 대서양을, 도버 해협을 건넌다. 우리나라같은 비非영어권 국가는 말할 것도 없다. 매년 영어를 배우기 위해 소요되는 수업료, 유학 비용, 교재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시간과 노력을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1997년 외환위기때 많은 국민들은 나라를 위해 애지중지하던 금반지, 금목걸이를 내놓았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영화 <타이타닉 Titanic>이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지불해야했던 외화外貨가 그 금값과 비슷한 액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이슬람 교리에서처럼 서양의 문화에 적극적, 배타적으로 저항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나의 정신, 나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오늘날 나의 정신세계를 형성해온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는 지금껏 읽어온 책을 빼놓을 수 없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다. 따라서 풍부하게 섭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편식하지 않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런 생각에 나는 지금까지 문학, 예술, 역사, 과학 등등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하기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잊고있었던 사실은 '다양성'이란 말이 오직 이렇게 여러 분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닌, 여러 문화권과 여러 지역의 사상, 감정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문학 작품들을 한국 문학과 외국 문학으로 나누어 정리해보면, 그리고 그 외국 문학도 국가별, 언어권별로 정리해본다면 나의 편중된 독서 성향을 쉽게 알 수 있다.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최근 유행하던 '된장녀' 이야기가 떠올랐다. 원래 된장녀란 말은 서양 남자, 서양 물건, 서양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여자를 비하할 때 쓰는 말이었다. 그 말이 한 연예인 때문에 의미가 변질되어 고가高價의 외국 명품을 밝히는 말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나의 편중된 독서 경향도 '문학적 된장남'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지금껏 나는 쪼달리는 돈으로 책을 사다 보니 가능하면 좋은 문학책을 고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대체로 노벨문학상, 퓰리쳐상, 공쿠르상 등등의 이름으로 검증된, 이름바 '명품 문학'만을 탐닉해왔다. 하지만 대체로 이 작품들은 외국 작가가 쓴 작품에(알다시피 노벨문학상 수상 목록에 한국 작가는 없다.), 그것도 영미문학(퓰리처상 픽션 부문은 미국 국적을 가진 자에게만 주어짐.) 내지는 프랑스문학(공쿠르상은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이다.)에 편중돼있다. 내가 과연 외국 명품 밝히는 된장녀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을까?

내가 갖춰야 할 사상적 다양성을 이루는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나의 모국어로 이루어진 우리 사상, 우리 말일 것이다. 이것은 결코 "한 손엔 칼을, 한 손엔 국어책을!" 이라고 외치는 민족주의적, 나아가 국수주의적 결론이 아니다. 그렇다고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을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의 정체성을 찾고자 함이며 동시에 내가 가장 잘 할 줄 아는(아니,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언어를 올바르게 사용하고자 함일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나의 잘못된 문장 습관을, 나아가 외국어 번역투로 오염된 언어 인식 체계 자체를 뜯어고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여기저기서 추천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서점에 가서 우리나라 작가의 단편집이나 수필집을 여러 개 읽어본다. 그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을 선택하여 반복적으로 읽는다. 자연스럽게 읽힌다는 것은 그 작가의 문체와 나의 호흡이 일치한다는, 다시 말해서 궁합이 맞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작가의 문체에 익숙해져서 나도 그 문체에 따라 글을 쓰게 된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손으로 베껴 적는 방법도 있었다. 비교적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확실히 내가 글을 쓰는 상황과 비슷한 상황에서 그 작가의 글을 쓰기 때문에 더 효과적일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작가 신경숙은 소설을 배우던 시절 김승옥의 작품을 손으로 베껴적어가며 문체를 익혔다고 한다. 두 방법 모두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모범적 문체 위에 나만의 개성적인 문체를 얹을 수만 있다면 말 그대로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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