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여름, 스물네살의 어느 날)
경제학에는 최근 활발히 연구되는 분야로 '행동 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이 있다. 전통경제학에서는 인간의 경제 활동이 합리적인 계산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 행동 경제학에서는 그 주장을 부정하며 인간의 경제 활동은 수많은 심리적, 사회적 요소들의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여기에 관련된 여러 가지 연구 활동 중에 '마음의 회계mental accounting'라는 흥미로운 주제가 있다. 마음의 회계란 물리적으로 똑같은 가치를 가진 돈이라도 그 돈의 출처와 보관 장소, 용도에 따라 제각각 구분하여 사용하는 행태를 말한다. 똑같은 100만원이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길에서 주웠을 때와 힘들게 일해서 멀었을 때 소비하는 경향이 달라진다.
연말에 환급받은 세금(이것은 예전에 추가로 납부했던 것을 되돌려 받은 것이며 당연히 원래 자기의 돈이다.)을 공돈으로 여겨 쉽게 쓰는 것. 부모님이 유산으로 남겨주신 돈은 가능하면 잘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어느 돈을 쓰든 재산의 총액은 똑같이 줄어든다)도 모두 마음의 회계가 작용한 탓이다. 이렇게 마음의 회계는 대체로 합리적인 소비 성향을 왜곡시켜서 비합리적인 소비 행태를 조장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하지만 때로는 특정 돈뭉치를 묶어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금기화禁期化함으로써 불필요한 낭비를 줄여주는 순기능도 있다.
나는 마음의 회계를 나의 감정에 적용해보곤 한다. 그 때 마다 나는 감정에 있어서는 결코 마음의 회계가 적용되지 않으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소 부적절할지 모르나 나는 이것을 '감정의 회계emotional accounting'라고 이름 붙였다. 감정의 회계는 마음의 회계와는 달리 총액 중심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자기 기분이 나쁜 이유가 종로 때문인지 한강 때문인지 출처를 묻지 않은 채 아무 곳에서나 화풀이를 한다. 물론 감정의 회계는 오직 화anger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은 모두 마음의 회계가 아닌, 감정의 회계를 따른다.
감정의 회계는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의 마음 속 대차대조표를 짐작하기 어렵게 만든다. 어제 퇴근 후 기분좋게 술자리를 가진 후 헤어진 직장 동료가 오늘 아침엔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게 저기압이다. 나중에 이유를 알고 보니 집에 들어가서 부인과 심하게 다투었다는 것이다. 그의 감정 속에서 나의 계정은 분명 차변이 대변보다 많은 플러스였다. 간밤에 회계적으로 의미있는 사건이 있었다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의 부인과의 다툼 뿐이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도 괜히 퉁명스럽게 대하고 있다. 이렇듯 예측할 수 없는 상대방의 감정 상태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타인을 대할 때 신중해야 한다. 나와 직접적인 트러블이 없었던 사람일지라도 내가 그의 감정 상태를 100%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나 아직 서로 상대방의 ' 감정의 회계적 성향'을 파악할 만큼 친하지 못한 관계일 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감정의 회계 역시 마음의 회계처럼 규범적이기 보다는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옳다 그르다를 따지기 보다는 현상 자체를 분석하는 도구로써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감정의 회계도 개인에 따라 철저히 적용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감정의 회계가 극단적으로 적용되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보자. 다시 말해서 그는 무슨 이유에서 화가 났건 간에 그것과 상관없는 곳에다가 화풀이를 마구 해댄다. 확실히 감정의 회계는 별로 긍적적이지는 않다.
시중에 넘치고 넘치는 처세서들은 '매 순간 상대방 감정의 총액을 높이는 요령'을 논하는 책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해라'라는 식의 명령어로 된 제목을 가진 이런 책들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확실히 잘 팔리기는 하는가 보다. 그리고 잘 팔린다는 것은 꽤나 효과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최근에 올수록 이런 책들이 증가하는 것은 점점 많은 사람들이 쉽게 요령에 따라 화를 내거나 기뻐하며 반응을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정녕 인간은 이렇게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존재'일까?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표정이 옷과 같다면 인간 마음은 몸 내지는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옷은 쉽게 입고 벗을 수 있지만 몸은 결코 (쉽게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대할 땐 궁극적으로 그를 치장하는 옷 보다는 꾸밈없는 실체로써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은 서로간의 마음을 트는 진리 보다는 상대방의 행동과 감정에 즉각 영향을 끼칠 방법들만 궁리하는 것 같다. 인정하기 싫지만 어쩌면 인간이라는 본질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은 로봇이 아니다. 자신의 현재 감정이 기쁘거나 슬픈 이유의 출처를 모두 따져가며 누군가를 대하기에는 고려해야 할 요소가 너무 많다. 하지만 최소한 사람이 누군가를 대할 땐 어느 정도는 상대의 감정을 예측할 수 있는게 좋지 않은가? 가끔 우리는 상대의 감정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적절하지 못한 처신을 할 때 그를 '눈치 없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한다. 확실히 우리가 감정에다가 '감정의 회계'가 아닌, '마음의 회계'를 적용한다면 난데없는 싸움이나 오해를 현저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나와 함께하지 않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든, 최소한 나를 대할 땐 극단적으로 황당한 반응을 보이진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기 때문이다.
마음의 회계는 같은 초기 값에 같은 결과를 도출하는 함수와 같이 공정성을 지킬 수 있다. 내 감정을 상하게 한 사람에게만은 선별적으로 냉정하게 대한다고 해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내 감정에 상처를 준 사람은 언젠가 그 일만 풀린다면 다시 나와 정상적인 관계가 된다는 믿음 지닐 수 있다. 나는 가능하면 의식적으로라도 내 감정에 마음의 회계를 적용하려 노력한다.
특히 이런 덕목은 한 조직의 하급자 보다는 상급자에게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을 꾸짖을 때는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확실히 인식시켜야 한다. 그리고 해당 사항에 대한 지적이 끝나면 더 이상 화를 낼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인지시키며 과감히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가 끝난 후 다시 만날 때는 평소와 같은 태도로 대하는 것이 좋다. 언뜻 보기에는 감정의 기복이 심한 괴짜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감정을 컨트롤할 줄 알며 원칙에 충실한 상사로 대접받을 것이다.
만약 상사가 무턱대고 '감정의 회계'에 이끌려다닌다면 작은 원인에 의해 화를 낸다 해도 그는 결국 화에 지배당하는 것과 다름없다. 누군가를 꾸짖는 목적은 상대방의 특정 행동을 교정하는 데 있지, 결코 자신의 감정을 뒤틀린 방향으로 표출하거나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데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일 뿐이며 나아가 변태적인 가학 심리나 다를 바 없다.
화를 내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물론 틱낫한Thich Nhat Hanh 스님이 《화 Anger》에서 주장하듯, '의식적인 호흡과 보행'(나는 책에서 이 표현을 스무번은 넘게 본 것 같다.)을 통해 화를 가라앉히는 것이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삭막한 세상을 살아가는 나 같은 범인凡人에게는 불가능하다. 대신에 늘 '마음의 회계' 원칙을 떠올리며 내가 왜 화를 내는지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그것과 관계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안인 것 같다.
다만 희로애락 가운데서 기쁜 감정喜과 즐거운 감정樂에는 얼마든지 '감정의 회계' 원칙이 적용돼도 괜찮은 것 같다. 작고 사소한 일에서라도 기쁘고 즐거워한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확산돼도 좋다. 언제나 스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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