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헤파이스토스의 작은 망치
(2007년 가을, 스물네살의 어느 날)
오랜만에 실용서 두 권을 주문했다. 특별히 시험을 준비할 때가 아니면 이런 책들을 경멸하는 나로서는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의외의 결정이었다. 제목은 《일반인을 위한 글쓰기 정석》,《글쓰기의 전략》. 물론 내가 작가가 되리라 마음먹은 것은 아니다. 그저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기왕이면 더 좋은 글을 쓰고픈 욕심 때문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한 편의 글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라는 말은 식상할 만큼 남발된 경향이 있지만 확실히 나는 수많은 좋은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나의 사고와 행동까지도 무의식중에 변해왔다.
항상 자유노트를 갖고 다니며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때 마다 글을 쓰는 나이지만 예외 없이 문장력의 부족을 실감하곤 한다. 그래서 최근 들어서 머릿속 생각을 생생하게 전달하면서도 간단 명료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 책이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문장력을 다듬는 첫걸음인 만큼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참 매력적인 일이다. 첫째로는 나의 막연하던 생각이나 주장을 하나의 완결된 글로 표현하고 나면 '서론-본론-결론' 혹은 '주장-근거'가 어느 정도 뒷받침 된 작품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작품이란 위대한 걸작msterpiece가 아닌, 작은 완성품 정도로 축소해석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이것은 단순히 머릿속 주장이 노트 위에 정리되어 옮겨지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주장을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해 구조를 갖추고 근거를 찾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추가되기도 하고 조금 막연했던 주장이 더욱 윤곽이 잡히기도 한다. 그래서 누군가와 그 주제에 관련된 대화를 하는 상황이 와도 훨씬 효과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된다.
둘째로 글은 내 느낌과 감상의 배출구가 되어준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 욕구가 음향을 통해서 전달된다면 음악이, 빛을 통해서라면 미술이, 육체의 움직임을 통해서라면 무용을 비롯한 공연예술이 탄생한다. 글이란 시, 소설, 수필, 희곡과 같은 문학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는 논설문까지 모두 작가의 자기 표현이므로 '언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똑같은 객관적 세계라 하더라도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글들이 탄생한다. 그러므로 설명문, 기사문, 광고문까지도 넓은 의미에서는 글쓴이의 표현 방식이 드러나는 언어예술이다. 음악가, 미술가, 무용가들이 각자의 방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듯, 나는 활자를 통해 나의 표현욕구를 충족시킨다.
셋째로 글은 말과 달리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말은 화자의 입에서 청자의 귀로 전달되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그 말은 녹음이 되거나 활자로 기록되지 않는다면 인간 기억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순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나의 기억, 상대방의 기억, 그리고 제 3자의 객관적 세계에서 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애초 없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나는 글을 더 사랑한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남긴 그들은 나의 사상과 사고思考의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는 막연한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나의 과거 세계가 일부나마 내 눈앞에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다. 물론 사진이나 영상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지만 이런 시청각적 자료들은 나의 외면적 모습밖에 보여줄 수 없다. 내 머리 속 세계는 글을 통해서만 시간의 벽을 넘어 재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머릿속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늘 수많은 생각들이 부유浮游하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이 생각들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다음으로는 의식 속에서 그 생각들을 적절히 재구성해야 하며 마지막 단계에서는 의미있는 문장을 통해 풀어내야 한다. 비유를 하자면 공중에 날아다니는 곤충들, 그것을 잡을 잠자리채, 그리고 잡은 곤충을 분류할 기준이 될 곤충도감, 마지막으로 분류된 곤충들을 예쁘고 깔끔하게 전시할 미美적 표현력이 필요하다.
곤충과 잠자리채에 비유된 '소재'와 '소재를 잡아내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이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요구한다. 확실히 많이 경험하고 많이 공부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지식이 무조건 많은 소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 인간 머릿속에는 누구나 거의 무한에 가깝다고 할 만큼 많은 생각들이 마치 돌고래처럼 솟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아일랜드의 천재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소설 《율리시즈 Ulysses》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작품 대부분은 이들의 의식 속에서 18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들로 이루어져있다. 이렇게 탄생된 작품의 분량은 가장 최근의 한국어 번역본을 기준으로 약 1,400페이지에 달한다. 조이스는 인간이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물론 조이스가 '의식의 흐름flow of consciousness'이라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확실히 인간은 누구나 머리 속에 무한한 소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 중요한 것은 소재 자체 보다는, 자신이 보거나 생각한 것을 글의 소재라고 인식하는 데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더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 막연한 생각을 글쓰기의 소재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늘 깨어있는 감수성과 문제의식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곤충도감에 속하는 것은 '논리력' 내지는 '구성 능력' 정도가 될 것이다. 일단 소재가 되어 도마 위에 오른 주제는 적절하게 '서론-본론-결론'과 '주장-근거 및 예시'를 갖춘 완결된 글이 되어야 한다. 영국의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따로 구성이나 초고草稿를 작성하지 않은 채 바로 글쓰기를 시작한다지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글도 음악처럼 일종의 흐름을 지닌다. 그것이 어떤 구성이든 간에 특별한 파격을 노리지 않는 이상 하나의 글은 마치 모자이크나 콜라주처럼 의미있는 각 문단이 유기적으로 모여 더 큰 의미를 지니도록 구성되야 한다. 이렇게 매끄러운 구성을 짜는 방식은 어느 정도 자신이 편리한 방법을 따르면 된다. 중요한 것은 글을 읽는 사람이 첫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내려갈 수 있도록 매끈하게 구조를 짜는 것이다. 예술가는 감상자의 미적 쾌감을 만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작품을 구상한다. 독자가 매끄럽게 읽는 글 뒤에는 글쓴이의 땀이 숨겨져있다.
미적 표현력은 글쓰기의 차원에서는 문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장은 대게 하나의 마침표를 가진 글의 단위이다. 의미를 가진 언어 단위로서는 형태소, 단어 다음 쯤에 속하는, 비교적 낮은 차원의 글의 단위이다. 그만큼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개인적으로도 내가 글을 쓸 때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바로 이 문장이다. 머릿속에서 언어화化되지 않은 생각들은 당연히 주어, 동사, 목적어 등등을 갖추지 않은 추상적 형태이다. 앞서 언급한 《율리시즈》에서 조이스는 인간의 언어화되기 전 의식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문장의 일부 요소를 누락시켰으며 한 문장 속에도 (마치 우리의 의식처럼)여러가지 생각을 동시에 담았다. 하지만 그의 문체는 의도적인 기법의 하나이다. 만약 우리가 주술 호응도 안 되고 부적절한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을 쓰고서 조이스를 들먹인다면 그것은 초등학생이 밑그림만 그리고 채색하기가 귀찮아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가리키며 '여백의 미美'를 논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언어를 사용하여 글을 쓰는 것은 소위 말하는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가능하지 않으며 음악, 미술 못지 않게 고뇌를 요구하는 예술활동이다. 세월을 거슬러 언어 예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참 재미있다. 언어 예술은 일반적으로 문학을 가리킨다. 문학 중에서도 소설은 가장 최근까지 - 특히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 - 천대받았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셰익스피어, 그리고 더 멀게는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 장르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언어 예술 중에서도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시詩문학이다.
오늘날 예술을 뜻하는 '아트art'는 라틴어' 아르스ars'에서 유래됐는데 이 아르스는 그리스어 '테크네techne'를 번역한 말이다(테크네는 오늘 날에도 기술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아르스와 테크네는 오늘날의 아트와는 달리 숙련된 제작, 정해진 법칙과 원리에 따라 행해지는 물질적 제작 활동을 일컫는 말이었다. 당연히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를 예술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때만 해도 시는 기술이나 연습에 의해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神의 영감을 받은 사람만이 - 정확히 말하면 뮤즈나 아폴론 - 지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로 부터 시작된 언어예술의 원류原流는 희곡, 소설을 포함하여 - 개인적으로는 다른 종류의 글도 포함 -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만약 내가 글쓰기를 통해 언어 예술을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예술'이란 말의 어감 때문에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조금은 멋대로 확장시킨 예술의 개념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무조건 헛소리만은 아니다. 이렇게 모든 글쓰기를 언어예술의 범주에 넣음으로써 그것은 '누구나 노력하면 가능한 것'이 된다. 나로서는 행운이다. 타고난 문재文才도, 우수한 두뇌나 남다른 감수성도 지니지 못한 나 역시도 노력만 뒷받침된다면 얼마든지 예술이란 이름 하에 자신을 표현할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20세기 미국 문학에서 윌리엄 포크너와 더불어 수위를 차지할 작가를 들자면 피츠제럴F. Scott Fitzgerald드와 그보다 3살이 어린 헤밍웨이Ernest M. Hemingway 정도가 유력한 후보에 오를 것이다. 이 둘의 인연은 절친한 동료로 시작되었으나 끝내는 앙숙관계가 되고 만다. 그만큼 두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당연히 그들의 작품도 대조된 모습을 보인다.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로 잘 알려진 피츠제럴드가 연약하고 섬세하며 여성적이라면 《무기여 잘있거라 A Farewell to Arms》,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를 쓴 헤밍웨이는 강하고 남성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인상적인 그들의 차이점은 글을 쓰는 태도에 있다. 피츠제럴드는 "훌륭한 작품은 저절로 쓰이고 좋지 않은 작품은 억지로 써야 한다"라고 말했다. 반면에 헤밍웨이는 보석처럼 언어를 다듬고 고치는 작가였다. 피츠제럴드가 천재형이라면 헤밍웨이는 노력파였다.
주목할 점은 피츠제럴드는 30대 초반에 《위대한 개츠비》를 쓴 이후로는 몇몇 단편을 제외하고 이렇다 할 대작을 내놓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처음 명성을 가져다 준 《무기여 잘있거라》 이후에도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조종弔鐘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태양은 다시 뜬다 The Sun Also Rises》와 같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수작을 계속해서 내놓았다. 물론 상대적으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피츠제럴드에겐 조금 억울한 비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천재에게 신의 영감靈感이 바닥나는 순간은 끝장이라는 사실이다.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피츠제럴드에 비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는 사실을 나는 영감에 대한 피나는 노력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나마 헤밍웨이가 신의 사랑을 받았다면 그 신은 뮤즈가 아닌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Hephaestos일 것이다. 그가 얻은 노벨상과 명성은 헤파이스토스가 올림푸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 아프로디테를 차지한 것에 빗댈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번에 글쓰기 책을 두 권 구입했다고 해서 한두달 만에 실력이 느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으며 공평하지도 않다. 다만 이제껏 두서없이 난잡하게 쓰여진 문장의 나열에 불구하던 나의 글을 조금이나마 다듬으려는 첫걸음이라는 데 의의를 두고 싶다. 이제 나는 헤파이스토스의 작은 망치를 두 개나 갖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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