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모르페우스를 갈망하며

(2009년 봄, 스물여섯살의 어느 날)


내가 나 자신을 의식적으로 놀라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어린 시절 딸꾹질을 멈추려면 깜짝 놀라게 해야한다는 말을 듣고서, 혼자 가만히 있다가 어느 순간 내 가슴을 쾅 내리친 적은 있었다. 물론 이런 수작으로 스스로를 놀래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놀라게 만들려는 객체가 주체 그 자체이니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런데 조금 더 철이 들어서 나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의문을 가졌다. 내가 꾸는 꿈은 어떻게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일까? 내 꿈 속에서 어떻게 나도 결말을 모르는 소설을 쓸 수 있을까? 비록 자주 꿈을 꾸는 편은 아니지만, 몇 안 되는 꿈들을 되짚어보면 나는 꿈속에서 많이도 웃고, 울고, 놀라기도 했다. 내가 쓴 소설을 내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어떻게 꿈속에서는 내 머리 속에서 나온 무의식이 나를 놀라게 하는 걸까?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이후 학기 중에 나는 늘 수면부족에 시달린다. 시험이 끝난 직후가 아니라면 웬만해서 하루 수면시간은 4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꿈을 꿀 겨를도 없이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지고 만다. 꿈을 잃은(?) 요즘에는 꿈이 그립다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생각까지도 하곤 한다.

수업시간에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을 돌이켜보면, 수면이라는 본능이 고등교육이라는 문명을 여지없이 꺾고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실제로 깨어있음이 이성을 상징한다면, 잠은 본능이다. 이들의 관계는 다른 이분법들로도 정리할 수 있다. 밝음과 어두움, 삶과 죽음 등등. 인간이 문명의 옷을 두껍게 걸침에 따라 자꾸만 외면하려는 본능의 모습. 그 때문에 잠이라는 것 또한 그 존재와 가치를 주목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부쩍 잠이 그립고 소중해진 요즘이기에, 나는 꿈꿀 수 있는 여유로운 휴식을 갈망하나보다.

인간에게 생生에 대한 의지가 있듯, 그 못지않게 죽음死에 대한 의지도 강한 것 같다. 깨어있는 사람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거나, 숙면을 취하던 사람이 괴로워하며 알람시계를 내던지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깊은 잠을 자던 사람이 의지와 상관없이 정신이 맑아지는 경우는 드물다. 고통을 잊게 하고 최면에 빠지도록 도와주는 모르핀morphine이 꿈의 신 모르페우스Morpheus를 어원으로 한 데에는 이 같은 이유가 있다. 꿈은 결코 이성이 생각하는 내가 만들지 않는다. 신화에서처럼 모르페우스가 현실과 똑같은 모습을 한 채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삶을 아름답게 해주는 소소한 일상을 꼽으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이른 아침 잠에 취해 눈을 떠 시계를 보았는데, 너무 일찍 깨어나서 아직 한두 시간 더 잘 수 있을 때, 비록 기운이 없어서 펄쩍 뛰지는 못하지만 난 이 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그 순간을 돌이켜보면 生이 아닌 死를 염원하는 내 모습에 조금 놀라곤 한다. 한편으로는 자궁의 어둠 속에서 마음껏 누리던 쾌락과 본능을 벗어나, 이성이 지배하는 빛으로 괴롭게 쫓겨나는 태아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태아에게 生이라는 이름으로 축하를 보낸다.

시어도어 드라이저Theodore Dreiser의 <시스터 캐리 Sister Carrie>에서는 인간을 동물에 비하면 본능에서 많이 탈피했지만, 아직까지 완벽하게 이성의 영역으로 진입하지는 못한 불완전한 존재로 묘사한다. 나는 이 말 자체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완전하게 이성의 영역에 도달한 존재만을 인간이라 칭하는 듯하지만, 사실 이처럼 불완전한 존재 자체를 지금 우리는 인간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또한 드라이저는 인간의 역사가 끊임없이 이성을 향해 달려간다고 착각한 것 같다. 그리스 시대의 찬란한 이성이, 도킨스Dawkins의 말을 빌리자면‘종교라는 집단적 망상’에 천 년 동안 억눌렸던 암흑시대를 그는 까맣게 잊었나 보다.

우리는 어느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가 잠깐 방심한 나머지 작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인간적인 실수를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가리켜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 부른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른 것과 구분짓는 경계선은 이처럼 이성도 아니고, 본능도 아니다. 인간은 이러한 이중적인 기준을 인식조차 못한 채 그때그때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자신을 차별화한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는 작품의 영감을 얻기 위해 스푼을 든 채 접시를 땅에 두고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잠을 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잠에 들 때 스푼을 놓쳐 “쨍그랑” 소리에 깨는 순간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이성이 지배할 때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자유로운 영감을 그는 꿈 내지는 잠을 빌려 얻었던 것이다. 아마도 내가 꿈을 그리워하는 이유도 이처럼 내가 반인반수半人半獸 켄타우로스Kentauros가 되어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그야말로 불완전한 존재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꿈은 잠과 깨어있음이, 이성과 본능이 다투는 전쟁터이다. 아니, 전쟁터라기 보다는 밤과 아침 사이의 새벽처럼, 나르치스와 골트문트Narziss und Goldmund가 사이좋게 악수를 나누는 평화로운 중립지대다. 완벽한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의 인간에게, 꿈은 안식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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