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드라마 '카이스트'

(2005년 여름, 스물두살의 어느 날)


방학을 맞아 숙제, 레포트, 시험이 뭔지 조차도 까마득해지는 지금. 특별히 약속이 없는 날은 곧 자유시간을 의미한다. 시간이 많이 남다 보니 옛날 드라마를 다운받아 보게 되었다. 최근 본 드라마는 99년 방영되어 지금까지도 꾸준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카이스트>였다. 옛날 본방송 때(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제목 정도는 본 적이 있지만 제대로 TV앞에 앉아서 이 드라마를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나였지만 이틀 전 <카이스트> 1기의 마지막회인 67회를 약 보름여만에 다 보았다. 뒤에 <카이스트> 2기가 더 있지만 너무 갑작스레 바뀐 등장인물들과 소재의 고갈 때문인지 1기 만큼의 흡입력이 없어서 몇 회 보다가 그만뒀다. (그래서인지 1기가 70회에 달하는 데 반해 2기는 14회에서 조기종영했다.) 어쨌든 한 회가 50분이란 사실을 감안하면 67회를 보름만에 본 건 거의 집착에 가까운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교육 현장을 무대로 삼은 드라마는 꽤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무대는 고등학교였다. 설혹 대학교를 다루는 드라마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대학은 특별히 뛰어나거나 열등한 학생들이 다니는 대학교가 아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보통의 대학교였다. 재미있는 점은 그런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전공도 비교적 쉽게 일반인에게 이해될 수 있는 인문,사회,예체능계열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드라마가 방송사나 광고업체의 상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속의 등장 인물에 자신을 투영시킨다. 그리고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등장인물의 기쁨, 슬픔, 사랑을 함께 느낌으로써 쾌락을 얻는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 학교 드라마의 소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거치게 되는 고등학교이며 설혹 대학생들을 다룬다 하더라도 되도록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도록 보통의 대학생을 소재로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카이스트>는 다른 학교 드라마와는 차별되는 별종의 대학 드라마였다. 카이스트의 학생들은 전혀 보통 수준의 사람들이 아니다. 또한 그들의 전공에 관련된 내용은 그 분야를 연구하거나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80% 이상은 생소할 어휘로 구성돼있다. 게다가 다른 학교 드라마나 영화가 학교라는 소재만 빌렸을 뿐, 대부분의 내용이 교실 밖에서의 사랑,질투,갈등을 다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언제나 공부하고 연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 드라마는 더더욱 특별하다. 덧붙이자면 이 드라마의 무대는 서울도 아닌 충청도이며 가끔 교실이나 연구소 밖의 장면이 나온다 하더라도 기숙사나 동아리방이다. 즉, 일반 사람은 공간적으로 전혀 공감하기 힘든 것들 투성이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느 드라마 보다 오히려 <카이스트>를 보며 많은 공감을 했다. 사실 내가 평소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이유도 그 드라마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러브스토리가 너무 비현실적이고 나에게 와닿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걸핏하면 이복형제니 불륜이니 첫눈에 반한 사랑이며 1,000분의1의 확률에 기댄 인연이거나 신데렐라와 왕자이야기 투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보는데 내가 공감 못한다면 내가 비정상이겠지만 별 감흥이 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반면 <카이스트>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를 듣다 보면 혹시 내가 자는 동안에 작가가 몰래 나의 뇌를 꺼내서 살펴보았나 싶을 정도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있었다. 엄청난 과제와 시험공부의 압박 속에서 괴로워하는 모습, 우수한 두뇌들 속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에 부딪히는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모습. 현실적으론 어떤 손해와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존심이 꺾이는 것은 허락하지 못하는, 어찌 보면 어리석은 인물들의 모습. 때로는 불타는 경쟁심에 휩싸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지으며 서로를 위로하는 우정어린 모습 등등. 대부분의 인물들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껴지거나 내가 전형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인물형에 대입되곤 했다.

이젠 고인이 된 이은주를 포함하여 이민우, 채림, 김정현, 허영란, 추자현, 지성, 강성연, 이나영, 연정훈 등등의 앳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최근 이공계의 위기라는 우려와 관련되어 우리나라 과학 정책에 대한 문제점, 더 나아가 우수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는 도구적 인력으로밖에 간주되지 않는 많은 과학도들의 애환도 엿볼 수 있었다. 심지어 과학이란 분야에 전혀 문외한인 나 조차도 기회가 된다면 과학 분야를 공부해보고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카이스트>가 매력있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느끼는 괴로움과 기쁨을 멋진 배우들의 연기로 객관화시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쉬운 점은 <카이스트> 이후 대학교를 다루는 드라마에서는 '진지하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없다는 점이다. 또 다시 술먹고 놀고 연애만 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만 나올 뿐. 이 사실은 오히려 <카이스트>가 드라마로 다루기 어려운 것들을 거부감 없이 잘 표현한 수작이란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카이스트>에 버금가는 멋진 캠퍼스 드라마가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현실을 잘 반영하는 대학생은 <카이스트> 학생이 아닌, <남자셋 여자셋>, <논스톱>의 학생일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학생이란 이름답게 최소한 학문에 대해 진지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주는 드라마가 나왔으면 좋겠다. 하버드라는 이름 앞에도 꼭 '러브 스토리'를 붙여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 대학 드라마의 현주소라도 말이다.

한편 조금 벗어난 이야기지만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부쩍 4학년 졸업 후에 대학원에 진학하고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천성이 기업보다는 상아탑 속에서 조용히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란 건 원래부터 인지하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이미 이루어진 지식의 소비자가 아니라 프로젝트 수행하고 연구를 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것이 참 매력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꿈은 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보다는 어린 시절의 감성적 느낌이 오히려 더 크게 작용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카이스트>가 방영된 해에는 카이스트의 합격선이, <허준>이 방영될 땐 한의대의 합격선이, <애드버킷>이 방영된 해엔 법대 합격선이 높아졌다는 말도 있다.(그런데 왜 <상도>가 방영됐을 땐 우리 경영학과 인기가 높아졌단 말은 못 들었을까?^^) 비록 내가 <카이스트>를 좋아해서 이공계로 전과할 리는 없겠지만 졸업 후 진로에 관련해서는 작게나마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겠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