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상아탑 속 병아리

(2005년 여름, 스물두살의 어느 날)


시험이 끝난 직후 요즘 갑작스레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할수록 나란 사람은 참 간사한 것 같다. 학교를 다니며 과제와 레포트, 시험 공부에 시달릴 때는 시간이 없다고 투덜대면서도 막상 이렇게 시간이 많을 때는 허송세월을 보내곤 하니 말이다. 아마도 나는 평생토록 적당히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살아야만 할 것 같다.

한여름 햇볓아래의 엿가락 처럼 늘어만 가는 잠, 늦어져만 가는 취침, 기상시각. 비워내기도 귀찮아서 이젠 빽빽한 꽁초 사이 공간을 찾아내어 조심스레 방금 핀 꽁초를 꽂아야 하는 재떨이, 책상 위에 쌓여만 가는 책과 고지서들, 영화 CD 등등의 잡동사니...책이라도 많이 읽고 군 입대 전에 평소 못했던 자기계발의 시간을 가지려고 벼르던 이번 방학을 보내는 현재 내 모습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아르바이트였다. 보통 대학생들이 하는 알바라면 짧은 시간을 일해서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는 과외를 생각하지만 이번의 나는 조금 달랐다. 돈 보다는 그간 접하지 못했던 사회생활, 윗사람의의 꾸중이나 잔소리같은 것을 겪어보고 싶었다. 바깥 세상은 피나는 전쟁터 같을진데 이렇게 상아탑이라는 철벽 속에서 공부라는 핑계로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씩 불안과 걱정이 되어 나를 엄습하기 때문이다.

사회에 계신 어른들의 시선으로 볼 땐 사실 대학교 1학년이나 4학년이나 모두 같은 어린애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집단 속에서 바라본 내 시선으에서는 군입대를 기준으로 입대 전 저학년의 모습과 전역 후 고학번 모습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재수를 하고 학교를 옮겨 2학년으로서 대학생활의 반환점을 눈앞에 둔 21살의 나. 이제는 진로나, 직업선택 고민과 같은 직접적인 압박 없이 무심하게 사는 것이 차츰씩 허락되지 않을 것 같다.

부쩍 상아탑이란 철통 요새 밖을 자꾸만 기웃거리게 된다. 수백만원에 달하는 비싼 세금을 받고 20대 초반 주민들을 외부의 치열한 경쟁 세계로부터 보호해주는 철통 요새. 하지만 계약기간은 단 4년이다. 군입대 남자들을 감안해도 8년을 넘지는 못한다. 나 역시 그 안에 거주하는 주민으로서 지금은 안전하고 편하게 살지만 언젠가는 벗어나야 할 이 요새 밖이 궁금하기만 하다. 특히 세월이 갈수록, 그리고 군 입대라는 문제가 피부로 느껴질수록....

나는 무언가를 말로만 듣다가 실제 맞닿았을 때 그 체감적 충격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자주 경험해왔다. 미래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칠 사건인 '요새 탈출'은 아무런 준비가 없다면 그 충격이 너무 클까봐 두렵다. 어쩌면 바깥 세상은 그 충격의 완화기간을 줄 만큼 관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작은 첫걸음으로 며칠간 알아본 알바나 인턴 지원 때문에 요즘 꽤 많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해보았다. 그러다 보니 나에겐 막상 대학교를 제외하면 스스로를 자신있게 소개할 사항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직업 세계에서 실무와 직결되는 능력에 있어서는 이력서를 내기 민망할 정도로 내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남들은 초등학교 때 부터 따놓았다는 컴퓨터 관련 자격증, 자격증은 아니라도 엑셀이나 PPT, 워드프로세스 솜씨, 영어회화능력, 활발하고 넓은 대인관계 등등 어느 것 하나 자신있는 게 없다.

어쩌면 방학동안 경력을 쌓겠다는 생각 자체도 나한테는 아직 욕심이란 생각이 든다. 경력이란 미래에 더 큰 일을 하기 위한 일종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그 작은 경력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능력은 수반돼야 한다. 지금 단계의 내가 목표해야 할 것은 경력 그 자체 보다는 먼저 차근차근 기초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 아닐까?

나 역시 여느 학생들 처럼 매번 방학때면 크든 작든 결심을 몇 가지씩 하곤 했었다. 대부분 만족스럽게 지키지는 못했지만 이번 방학땐 큰 욕심을 부리기 보단 기초적인 능력을 길러보고 싶다. 아무리 빨라도 군 입대는 방학 이후가 될 것이다. 제대 이후엔 마음이 급해지고 초조해진다는 것이 고학번 선배들의 공통적인 조언이다. 그 전에 이번 방학동안 조금씩이나마 스스로를 업그래이드 해야겠다. 큰 욕심 내지 말고 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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