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명예와 신용


(2005년 겨울, 스물두살 어느 날)



담보란 좁은 의미에서 돈을 빌리는 대신 빌리는 사람의 신용을 보증하기 위해 돈을 빌려주는 사람에게 맡기는 물건이나 증서를 의미한다. 하지만 좀 더 넓게 생각하면 돈 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하는 많은 약속에 있어서도 우리는 은연중에 담보를 주고받는 것 같다. 비록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 담보는 바로 '나의 신용' 혹은 '명예'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상대방으로 부터 잃게 될 나의 신용과 명예는 웬만해서는 되찾기 어렵다. 비록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한두번 약속을 잃은 사람은 신용과 명예라는 아주 소중한 자산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잃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내가 다른 누군가의 비밀을 알게되었는데 약속을 깨고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누설함으로써 신용을 잃는 것은 치명적인 손실이다. 인간은 비밀을 말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오죽했으면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땅을 파고 소리를 질렀다는 전설까지 있을까?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도 자주 남의 비밀을 떠벌리고 다니기에 그 죄책감은 실제 자신이 잃는 신용에 비해 미미하게 느끼는 것 같다.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매우 무섭고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나를 믿고 자신의 비밀을 말해준 당사자가 나의 누설 사실 알게될 경우 깨어지게 될 우정이나 믿음이다. 이 위험은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비밀을 누설하면서도 그 사실이 다시 당사자의 귀에 되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또 다른 한가지의 위험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지금 내가 누설하는 비밀을 들으며 함께 즐거워하는 이 사람이 앞으로 절대 나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내 눈앞에서 이렇게 다른 이의 비밀을 쉽게 말하며 즐거워하는 사람에게 진정 믿음을 줄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있을까?

첫번째 위험이야 내가 조심함으로써 당사자의 귀에는 그럭저럭 들어가지 않은 채 넘어갈 수 있다. 물론 하늘과 땅과 나와 내가 털어놓은 비밀을 들은 친구는 알겠지만. 반면에 두 번째 위험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신용과 명예를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손실이기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담보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의 후반부에는 십자군의 발리앙(발리앙 디블랭)과 무슬림 아이유브조의 살라딘(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이 협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살라딘은 자신의 조건에 대한 담보로 매우 간단한 몇 마디밖에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족속의 인간들과는 다르다. 나는 살라딘이다."
("I'm not those men. I am Salah ad-Din")

이 말에 발리앙은 곧바로 그 조건을 믿고 승락하게 된다.

오랜 세월 쌓아온 신용과 명예라는 자산은 결국 살라딘의 경우처럼 큰 협상 마저도 아주 쉽게 성공하도록 만든다. 애초 그런 자산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아무리 큰 군대와 돈을 들여도 이뤄낼 수 없었을 것을 살라딘은 정정당당하고 믿음직한 지금까지의 행적으로 인해 말 한마디로 성취한 것이다.

이처럼 매우 중요한 약속을 할 때 상대방으로부터 그 약속을 자발적으로 지키도록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너의 명예와 자존심과 신용을 걸고 약속해라" 라고 말하는 것인 듯 하다. 누구나 사람은 자신의 명예와 신용을 다른 무엇보다 소중히 생각할 것이며 그것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서 구겨지는 자존심을 참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존심이고 명예고 신뢰고 전혀 개의치 않는 족속들에겐 먹히지 않을 수도 있다.)

명예와 신용이라는 자산은 얻기 어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경제적인 자산인 것 같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돈 한푼도 들지 않지만 사용할 땐 돈이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엄청난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 일생 살면서 꽤나 욕심부려볼 만한 자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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