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숫자로 씌어진 일기장

(2011년 여름, 스물여덟살의 어느 날)


작년 7월에 입사하여 연수 등등을 마친 후, 근 1년간 엑셀로 가계부를 꼬박꼬박 써오고 있다. 매번 돈을 쓸 때 마다 장부에 쓰는 계속기록법은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얼마 안 돼 포기했다. 그 대신에 나는 매달 말일에 일종의 변형된 실지잔액조사법을 이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먼저 전월 이월 잔액에다 이번 달 통장에 찍힌 급여, 상여 등등을 합친다. 물론 그 기준은 세금을 비롯한 각종 공제금액을 제외한 순수령액이다. 여기서 월말에 각종 계좌 잔액의 합계를 뺀다. 이제 이 차액들 가운데 쉽게 추적 가능한 내역은 소비/투자로 구분하여 기록한다.

* 카드값 ∙ 관리비 ∙ 통신비 ∙ 이자비용 등등은 소비처리한다.

 *주식-펀드매매 ∙ 보험료-연금납입 ∙ 저축 등등은 투자처리한다

  (다만, 보험/연금은 당장 환매할 수 없으니 그냥 소비처리함)

* 전체 차액과 소비/투자액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모두 현금소비로 처리한다.

 이번 달의 가계부를 정리해보았다. 아직 말일은 아니지만 마지막 영업일로서 종가는 나왔으니 주식, 펀드 평가액은 확정이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은 입사 1년을 맞이하여 새삼 지금까지 기록한 내용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계부란 마치 숫자로 기록된 일기장과 같다고 생각한다. 1년간 써온 가계부를 보며 느낀 점 몇 가지.

상여금 없이 기본급만 받는 홀수달은 그 달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살기 힘들다. 평균 카드값을 포함하면 기본으로 나가는 금액만 해도 벅찬 수준. 이 때 마다 나는 한달간 열심히 일해서 우리 회사 돈을 꺼내와 카드회사로 토스해주는 역할만 하는 것 같다.

나는 경제학 책에 나오는 “샤워실의 바보”와 같다. 지금 소비하는 카드값은 다음 달에 현금으로 지출된다. 그런데 무의식중에 나는 짝수달에 풍족함을 느껴 더 많이 긁고 홀수달엔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카드 청구서는 정확히 그 반대로 날아왔다.

합리적인 소비를 위해 가계부를 쓰는 것에 회의를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이 가계부가 내 소비/투자 성향을 파악하는 리뷰 역할은 훌륭하게 해내지만,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피드백 역할은 거의 못하는 것 같다. 소비가 많은 달에도, 수익률이 좋지 않았던 달에도 “음, 그랬군” 하고 넘어간다. 그리고 새로운 한 달을 또 비슷하게 반복한다.

부모님, 동생한테 용돈을 거의 안 줬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1년치를 모아놓으니 꽤나 큰 돈었이다. 약 5초 동안 “우와…저 정도 돈이면 이것도, 이것도, 또 이것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5초간 반성했다. 이렇게 10초 후 나는 평온을 되찾았다.

별 생각 없이 소비하고 투자하지만, 몇 달을 놓고 보면 개인의 소비성향은 어느정도 와꾸(?)가 잡히는 것 같다. 관리비, 통신비, 이자비용, 보험료, 연금 등등이야 당연히 거의 고정되어 있지만 그 밖에 소비도 평균에서 그닥 많이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이 “평균” 자체가 높다는 게 문제…. 하지만 확실히 가계부를 쓰다 보면 미래에도 내가 어떻게 자금을 운용할지를 꽤나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매달 이만큼 버는데 내가 이만큼 쓰고 저축하니 몇 년 뒤면 얼마가 모여 무엇을 살 수 있겠다” 라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데 가계부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대학 때 주식에 살짝 발담그고, 지금은 기관투자자로서 주식 관련 업무를 맡고 있지만 이것이 개인투자 차원에서 “의미있는 수준으로” 시장을 이기는 충분조건은 못 되는 것 같다. 다행이 벤치마크에 비해 부끄러울 만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디가서 자랑할 수익률은 못 된다. 블루칼라의 직접노동에 비해 금융자산에서 나오는 자본이익(capital gain)은 돈을 더 쉽게 버는 듯한 어감을 주지만 역시 세상은 공평하다. 주가의 상승으로 얻는 이득도 본질적으로는 그 주식을 발행한 회사 직원들이 피땀흘려 창출한 가치를 나눠갖는 것에 불과하다. 수많은 기업의 일선에서 노동자들이 흘린 땀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려 공부할 때 비로소 내 잔고도 불어날 것이라 믿는다. 적어도 장기적으로 세상은 정의롭고 공평하다고 믿(고싶)기 때문에.

연봉 총액이 비슷한 회사라 할지라도 그것을 지급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우리회사처럼 단위를 잘게 나누어 홀수달에 월급 한 번, 짝수달엔 두 번 주는 방식은 그닥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냥 연간 총 지급액을 열두번 나눠서 분할지급 하는 게 최고다. 어차피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매달 비슷하다. 짝수 달이라고 하루 여섯끼를 먹지는 않으며, 홀수달이라고 연금/보험료를 반만 내는 건 아니다. 문제는 많이 받는 달에 두 배로 쓰는 건 내 몸과 기분이 알아서 잘 되던데, 홀수달이라고 아끼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아니, 절대 안 된다. 사람은 컴퓨터도, 로보트도, 계산기도 아니니까.

아둥바둥 살고, 불평불만 가득하고, 투덜대기도 하지만… 막상 1년간 받은 순수령액만 더해봐도 꽤 많다. 우리회사에 직원만 4천 명이고 FP는 2만명 정도라고 한다. 매년 들어오는 보험료 총액에서 사고/사망을 당한 고객에게 지급하는 보험금을 빼고도 이 만큼의 잉여가 발생하다니, 회사 직원으로서도 새삼 놀랍다. 물론 내가 회사를 위해 일하는 노동 가치가 나에게 주어지는 급여보다 크기 때문에 회사는 나를 채용한 것이다. 하지만 회사라는 조직이 아니라면 이 정도의 노력에 대해 이만큼의 수고비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 개인이 얼마나 될까?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나 역시도 회사 급여에 대해 내 노력을 지불할 용의가 있으므로 딜이 성사된 것이다. 회사라는 조직이 없다면 이런 기회조차 없다.

마지막으로 좀 슬픈 현실 이야기. 어차피 티끌모아 티끌덩어리 같다. 현실에서는 자회사의 손익계산서보다 모회사의 빵빵한 대차대조표가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물론 그 손익계산서도 안 좋은 것 보단 좋은 게 더 나으니 매일 졸린 눈을 비비며 출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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