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선배가 된다는 것

(2005년 이른 봄, 스물두살 어느 날)


꽤 오랜 기간 동안 바쁜 일정에 치이다 보니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글 쓰는 감이 많이 달아난 듯 하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나눌 이야깃거리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 보다 더 넘쳐나는 것 처럼 글도 감각을 잃을 때 쯤에 시간을 내서라도 한번씩 써줘야겠다.

요 근래 한참 바빴던 이유는 바로 05학번 새내기를 맞이하는 행사가 연달아 있었기 때문이다. 못놀아서 골병나는 우리 과 특성상 우리들은 수시 합격생 신입생 환영회(신환회)를 필두로 정시생들이 들어온 이후에는 정시 신환회를 1,2 차에 걸쳐 열었으며 바로 다음날 새터에서 3일간 미친듯이 놀아제꼈다. 새터 다녀와 하루를 쉰 후에 신입생 TEPS 고사일 오후에 또 사실상의 3차 신환회를 열었으며 이후에도 자잘하게 몇 차례의 새내기들과 사적인 만남도 가졌었다.

덕분에 이 기간 동안 나는 이들과 이미 많은 친분을 쌓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서로의 이름과 대략적인 성격 정도를 파악했다면 입학도 하지 않은 현재 시점을 감안할 때 꽤 큰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재수를 해서 대학을 들어온 사람이 한둘이겠냐마는 나같은 경우엔 다른 대학에서 03학번으로서 정상적 대학 생활을 꽤 오랜 기간 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일년 늦게 선배가 된 셈이다. 그만큼 이들에 대한 애착도 크고 선배로서 갖는 의미도 남다른 것 같다.

재작년과 작년, 내가 두 차례 새내기로 입학했을 때 선배들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몇몇 사람은 내가 미래에 선배가 되었을 때의 좋은 모델로 삼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반면 소수의 몇몇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할 모델로 낙인 찍곤 했다. 현재 내가 새내기들에게 보이는 모든 말과 행동은 2년간 내가 느꼈던 모델들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피하고자 했던 노력의 결과라 볼 수 있다.

첫번째로 노력한 점은 선-후배간의 관계가 아무리 상-하적 개념이라 하더라도 일단 이들이 절대적으로 나와 동등한 인격이란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과거 내가 대학에 합격한 직후 선배로 부터 걸려온 전화, 그 중 한번은 처음부터 나에게 "2월XX일에 신입생 환영회가 있으니 가능하면 그날 참석해라"라는 식의 거슬리는 말투였다.

내 나이가 선배와 같다 혹은 다르다는 사실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일년을 더 살고 덜 살고 여부는 각자의 절대적 가치를 평가하는 데 전혀 고려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뜻 생각해 보아도 1,2년 늦게 태어난 사람이 앞서 태어난 사람 보다 매년 20분의 1정도의 독서/식사/TV/공부를 많이했다면 20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을 때 그 둘은 사실상 같은 정도 수준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이 차이는 인간이 점점 더 성장함으로써 극히 미미한 정도로 작아진다.

따라서 나는 후배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대했다. 일이년 연륜을 구실로 유세를 떤다거나 권위를 강조하는 선배로 비춰지긴 싫었다. 절대로 술을 권하지 않았고 상황이 어쩔 수 없다면 술이 약한 후배들에겐 아주 작은 양의 술만을 권했다. 때로는 약간 오버하며 망가지기도 했고 말을 할 때도 쌍방의 합의를 보기 전 까지는 조심스럽게 경어을 택했다.

두번째로는 신입생을 맞이하는 행사가 신입생을 앞에 두고 선배들끼리 신나서 떠드는 행사로 전락하지 않길 바랬다. 물론 수십년을 전해 내려오는 관습이 깨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가능하면 후배들이 선배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부담이나 소외를 느끼지 않게 하려 노력했다.

내가 새내기였던 시절, 많은 행사에서 선배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우리들은 재미있는 장기자랑을 준비하느라 머리를 쥐어짜내며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했다. 물론 겉으론 웃음만 띤 채 지낼 수 밖에 없었지만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았다.

물론 올해 나도 선배로서 부담없이 그들의 장기자랑이나 벌칙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새내기 시절 가졌던 약간의 양심은 아직 남아있었던걸까? 혼자서 후배들 방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아이디어를 짜내려 노력했고(사실상 도움은 안 됐겠지만) 술자리에서의 대화가 동기들만의 화제로 넘어가면 후배에게 의식적으로라도 말을 걸어주려 했다.

세번째는 그들이 진정 궁금해할 대학교 1학년의 생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새터나 술자리에서의 대화는 많은 부분이 영양가 없는 농담따먹기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러한 대화에서 서로를 편하게 여기고 친분을 쌓을 수는 있겠지만 술자리가 끝나는 순간 그 대화들은 시간과 함께 묻혀버리고 만다.

나는 새내기 입학 전 즈음, 워낙 소심하고 때론 불필요하게 꼼꼼하기도 한 성격 때문에 다가오는 대학 생활이 두려웠다. 소위 공부 잘 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용서되던 학창시절을 벗어나 성인이 된다는 것, 지방 학생으로서 처음 서울로 올라와 살림을 스스로 꾸려나가야 한다는 것, 다소 소극적 성격에 친구를 사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등등 등등 많은 부분이 불안감으로 점철돼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새내기 관련 행사 내내 나는 이런 걱정을 보듬어주는 이야기를 그리 많이 듣지는 못했다. 어쩌면 내가 그리 활발하지 못했기에 선배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시간이 부족해서였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 쳐도 이런 대화를 나눠야 할 사람은 오히려 선배들과 많은 대화를 갖지 못하는 소심한 새내기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이번 행사 중에 때때로 나는 어쩌면 고리타분할지도 모르는 인생론을 펼쳐보인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앞에서 나는 새내기와 나 사이의 1,2년 나이 차는 거의 무시해도 좋을 것이라 했기에 어쩌면 내가 그들에게 펼치는 경험담은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객관적으로 대학생활에 있어서는 나는 경험자고 그들은 무경험자이다. 그래서 이 사실에 한정된 부분에 있어서는 때때로 나의 성공과 시행착오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이렇게 의식적으로 노력했던 사항들이 얼마나 지켜졌는지는 나도 잘 알 수 없다. 그 판단의 의사봉을 세번 '땅땅땅' 두드릴 권한은 내가 아닌 후배들에게 있으니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이 나를 '닮지 말아야 할 선배'로 찍었다면 그것이 정답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돌아보아도 요 며칠간 나는 백프로 이상적인 선배의 노릇을 하지는 못한 것 같다. 왠지 모를 쑥쓰러움과 부끄러움, 어색함 때문에 내가 먼저 다가가기를 꺼려하다 보니 후배들과의 사이가 크게 가깝다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그 흔한 msn 대화나 싸이월드 방문 등등도 나에게 다가온 후배들만 챙겨줘버렸다. 한편 나 자신이 워낙 술이 약하다 보니 새터날 밤이나 환영회 술자리에서 너무 일찍 자리를 떠버리고 말았다. 다른 동기들 처럼 재미있게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도 많지 않아서 어색한 대화만을 나누다 헤어진 적도 있었다.

물론 앞으로 기회는 많다. 입학식도 치르지 않은 만큼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같이 듣는 수업에서 함께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하며, 공강 시간에 나누는 잡담에서, 그리고 수업을 마치고 오가며 혹은 등하교길을 함께하며 나누는 대화에서...나는 위에서 아쉬워했던 점들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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