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겨울, 스무살 어느 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간의 본성을 덮어놓고 비판할 수 있을까? 아무런 동기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실 우리는 고통을 참아가면서까지 쓴 것을 삼켜야 할 이유가 없다. 사람이 자기가 좋은 것은 하려고 하고, 싫은 것은 안하려고 하는 것은 아주 원초적인 습성이다. 그리고 그 원칙에 근거하면 쓴 것을 뱉으려고 하는 것 또한 너무나도 자연적인, 좀 더 옷을 입히자면 "순수한" 모습이다. 어쩌면 이런 습성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 역할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은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피할 때 대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어왔다.
쓴 음식을 삼키기 싫어서 뱉을 때 우리는 뭐라고 말하는가? "아~ 내 혀가 참 잘못됐어. 언제 병원 찾아가야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백이면 백 모두가 "음식이 상한 것 같애" 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우리 미각 기관에 이상이 생긴 경우보다는 음식이 상한 경우가 더 많다.
'쓴 사람'은 말 그대로 쓰기 때문에 쓰다는 소리를 듣는다. 평소에 원만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타인에게 쓴 맛을 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쓴것을 뱉는 인간의 자연적인 (부정하려 해도 인정해야하는) 욕구 자체를 부정하는 것 보다는, 그 습성을 인정하고 우리 각자가 '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잘 가꾸어야 한다고 본다.
순자는 화성기위(化性起僞)라는 말로 이 생각을 압축했다. 순자의 논리를 들었다고 해서 난 인간이 악하게 태어났느니 어쩌니 하는 논리까지 발전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먼저 자기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본다.
반면 맹자는 순자의 성악설을 부정할 때 우물가의 아이 일화를 자주 든다. 즉, 한 행인이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해준 것은 행인이 그 아이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행한 행동이 아니기에, 즉 순수하게 본능적으로 구해준 것이기에 인간의 본성은 선하고 이타적이라고 맹자는 주장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나는 행인이 그 아이를 구하게 만든 것은 그의 본성적 습성이 아닌 다른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
하나는 그가 지금껏 받아온 학습에 의한 세뇌를 들 수 있다. 생명은 고귀한 것, 남을 도와 주어야 착한 행동인 것 등을 어려서 부터 배워 온 행인은 아이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고 조건 반사에 의해서 아이를 구해준 것이다. 내가 행인이 아이를 왜 구해줘야 했는지를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뜻 느끼기엔 본능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도 역시 파블로프의 개와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만약 그에게 그 아이를 구해줌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엄청난 고통이나 손해가 온다면 과연 그는 그 아이를 구해줬을까? 내 생각엔 아니올시다~
나머지 하나는 스스로의 인격에 대한 긍정에서 오는 쾌락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에겐 내가 뭔가 남보다 뛰어나 보이길 바라고 특별한 존재이길 바라는 본성이 있다. 하지만 자신을 보는 남들의 인식 못지않게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매우 중요하다. 남이 아무리 나를 멋지다고 해도 내가 나에 대해 불만족스러우면 결코 완벽히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따라서 우린 스스로에게 나 자신을 합리화 시키고 싶어한다. "이 정도면 됐어",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닐거야" 라고 자기 자신의 과오나 게으름을 정당화 시킨 기억이 누구에게나 한 두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뻔히 우물에 떨어지는 어린이를 구경만 하고 넘어갔다면...언젠가 나에게 돌아올 양심의 가책 내지 스스로의 도덕성에 대한 비난은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아이를 구해줌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의 인격을 정당화 한다. "난 아주 멋진 놈이야!" ... 이렇게 함으로써 우린 양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는 쾌락을 얻는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쓴 것을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아무런 동기 없이는 싫은 사람을 좋아해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원만한 인간 관계를 위해서 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노력이 바로 소위 "예의" "배려" "자제"와 같은 것이다. 초등학교 '바른생활' 부터 고등학교 '윤리' 까지 모두가 '단 사람 만들기'의 과정이다. 물론 이것은 자기가 쓰다는 사실을 교묘하기 숨기기 위한 '위선','아첨'과는 구별 돼야 한다.
인간은 인간인 이상 이성에 의해서 사고하고 행동하긴 하지만 그 기저엔 본능이라는 더욱 원초적인 힘에 의해 지배받는다. 이성에 의해 본능을 억압하던 계몽주의의 허상은 이미 실존주의나 생철학에서 충분히 비판받았고 검증되었다. 무조건적으로 이기심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이기심은 인간이 외부의 고통으로 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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