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교실청소를 빠진 두 아이

(2008년 가을, 스물다섯살의 어느 날)


요즘은 중학교 청소도 용역 업체에 위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우리 시절엔 어림도 없었다. 매주 분단별로 돌아가며 교실과 복도를 청소하는 일은 우리에겐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담임 선생님에 따라서는 그날 지각한 학생, 말썽 부린 학생을 청소 담당으로 정하는 분도 계셨다. 집도 가까웠고 별다른 사고도 안 치던 나로서는 매년 새학년을 눈앞에 둘 때 마다 이런 담임 선생님이 걸리기를 기대하곤 했었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고 나서 돌아보면 별 것 아닌 일이지만 당시로선 교실 청소란 은근히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분단이 청소 당번이었던 어느 날, 같은 분단의 한 학생이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가려고 했다. 그 때 청소를 하던 다른 어느 학생이 그를 불러서 왜 도망가냐며 따져 물었다. 그 때 녀석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나 부진아 수업 가야 된다!"

당시 우리 학교는 학업 성취도가 뒤쳐지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과 후 특별 수업을 하고 있었다. 이유야 정당하다만 어떻게 그 학생은 저렇게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을까. 청소를 하던 우리 친구들은 그저 웃음 밖에 안 나온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행실과 당시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보건데 그는 그다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자기는 아무렇지 않았고 우리 친구들에겐 작은 웃음을 선사했으니 결과적으로 재미난 에피소드로 웃고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른 이유'로 몇 차례 청소를 빠져야 했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실직失職으로 가정의 수입원이 끊기고 나서 얼마 후, 나는 3학년을 맞게 되었다. IMF 한파寒波로 우리 학교에도 갑작스레 많은 학생들이 어려운 가정 환경에 처했다. 정부에서 시급하게 대책을 마련한다고 나온 것이 '실직자 자녀 특별 무료 수업' 비스므레한 이름의 방과후 수업이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수업 명칭을 저렇게 정하지는 않았다. 명목상으로는 방과후 보충 수업을 희망자에 한해 실시하되, 실직자 자녀는 무료로 들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만약 자발적으로 저 수업을 듣겠다고 신청한 '일반 학생(비실직자 자녀)'이 많았다면 나같은 실직자 자녀는 자연스레 끼어서 공부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실은 그 정책을 제안한 높은 분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고등학생들도 대부분은 수업 시간 내내 하교 종 치는 시간만을 기다리는데, 하물며 아직 철도 안든 중학생들은 오죽할까? 어느 정도 공부의 열의가 있는 학생들도 학원을 다니면 다녔지, 아침부터 오후까지 지겹게 얼굴을 보던 학교 선생님한테 또 비슷한 수업을 듣기는 싫었을 것이다. 결국 자발적 신청자는 전교 학생 2백여명을 통틀어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었다.

아마도 학교측에서는 이런 이유 때문에 특별 수업을 백지화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교육청의 지시였던 만큼 학교에서는 구색맞추기로 실직자 자녀들이 사실상 반半강제적으로 이 수업을 듣게 했다. 결국 나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은 방과 후 학교에 남아 한 시간 가량 보충 수업을 듣고 가야 했다.

당연히 수업은 정상적인 분위기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선생님들 역시도 눈가리고 아웅식의 이 수업을 맡기 꺼려했고 성의있게 가르치지도 않았다. 학생들의 불만은 그 이상이었다. 학구열에 불타서 자발적으로 신청을 한 것도 아닌데다 곤란한 가정 환경이 전 학교에 알려져야 하는 부끄러움까지 더해졌으니,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분위기가 산만하거나 학생들이 떠들어서 수업이 차질은 빚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모두의 눈은 흐리멍텅했고 마음은 무기력했으며 가슴 속엔 수치심과 좌절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우리 학교 방과후 수업의 양대 산맥이던 '부진아不振兒 수업'과 '실직자 자녀 특별수업'. 가르치는 내용도, 수업이 마련된 취지도 달랐지만 실질적으로 학생들에게 가장 와닿는 차이점은 엉뚱한 데 있었다. 부진아 수업은 방과 후 수업을 듣지 않고 도망간 학생을 다음 날 아침에 불러내어 그야말로 흠씬 엉덩이를 두들겨 팼다. 반면에 내가 듣던 특별 수업은 그렇지 않았다. 애초부터 탁상행정의 결과 말도 안되게 구성된 학급이었다. 선생님들도 우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 마당에 차마 도망간 아이들을 나무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공부는 자기 하기 나름이다.' 라고 스스로 되뇌이며 나 혼자서라도 열심히 수업을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역시 학생은 학급의 분위기와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나 보다. 나중에는 나도 뻔한 내용의 수업에 질렸고 무기력한 분위기에 동화돼 갔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수업이란 말인가?

자기 스스로 공부를 안 해서 '부진아'가 되어 청소를 빠져야 했던 그 학생. 그는 스스로 무덤덤했고 친구들은 그를 마음껏 비웃으며 놀릴 수 있었다. 반면에 열심히 공부했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실직자 자녀'가 되어서 청소를 빠지고 보충수업을 들어야 했던 나. 나는 무덤덤하지 못했고 친구들 역시도 웃을 수 없었다. 도대체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논리적으로야 정답은 뻔하다. 그런데도 그는 "나 부진아 수업 가야된다!" 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청소를 빠졌지만 차마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절대 말처럼 쉽지 않다. '도움'이란 것 또한 모든 소통疏通이 그러하듯 수신자와 송신자,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채널이 모두 원활하게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지껏 누군가의 순수한 호의가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자존심 내지는 자격지심 때문에 엉뚱하게 오해받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또한 도움의 손길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횡령橫領, 부패 때문에 쌍방이 상처를 받을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 나의 경우처럼 -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서투른 도움의 손길 때문에 도움을 받는 사람은 이중의 상처를 입기도 한다.

어느 노승老僧이 말하기를, 칼에는 사람을 살리는 활인검活人劍과 사람을 죽이는 살인도殺人刀가 있다고 한다. 곤란한 환경에 처한 사람을 돕고자 든 칼은  이 사회의 병든 부분을 치료하는 메스가 될 수도, 병든 자들의 심장을 찔러 거듭 상처를 입히는 망나니의 칼이 될 수도 있다. 도움의 칼을 손에 쥔 사람들은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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