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게으름에 대한 변명
(2005년 겨울, 스물두살의 어느 날)
대학생들은 공부는 안 하고 빈둥빈둥 놀기만 한다? 뭐 굳이 고3 시절의 그들과 비교를 하자면 100%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겪어본 두 대학에서의 나를 비롯한 친구들의 모습은 빈둥빈둥이란 표현으로 수식되기엔 지극히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다. 어쩌면 바쁨의 기준을 우리나라 고3 학생에 두는 건 적절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대한민국 고3이 정상적 생활인가? 그건 지옥이다.
특히 이번 학기의 요맘때가 유난히 살인적 스케줄로 넘쳐나긴 하지만 대학에서의 한 학기 전체를 주욱 살펴보면 완전히 마음놓고 한가히 지낼 수 있는 시기는 그리 많지 않다. 아침에 등교해서 대부분의 경우 저녁을 학교에서 먹고 남은 공부를 한다든지 조모임, 숙제, 시험공부를 하곤 한다. 의외로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을 때도 양자 모두 스케줄이 없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바쁜 삶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혹자는 바쁜 삶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하지만 나를 비롯한 범인의 경우엔 늘 빡빡한 일정에 불평을 하며 괴로워할 것이다. 특히 나는 이런 빡빡한 스케줄을 잘 견디지 못한다. 여유있는 성격이니 유유자적이니 자기변호를 하지만 나 자신으로 부터도 게으른 성격이란 비난을 면치는 못한다.
하지만 2~3년동안 이런 모습의 나를 바라보며 느끼는 점이 있다. 나의 이런 특성은 마음을 다잡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사실이다. 즉, 현대사회에서 바쁘고 부지런하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경우가 많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생활패턴에 적합한 유형은 아닌 것 같다는 뜻이다.
남들이 보기엔 내가 공부를 하거나 팀 프로젝트에 참석하는 절대적 시간이 꽤나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정이 며칠에 걸친 빡빡한 스케줄 하에서는 나는 책상에 앉든 팀 미팅을 하든 적극적으로 참여할 기운을 내지 못한다. 그 시간의 1/3 정도는 멍하게 딴생각 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하루라도 잠을 3시간 이하로 자거나 심지어 밤을 새는 경우에는 다음날 수업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렇듯 나는 하루 일정에서 상당분량의 시간은 자유시간으로 남겨둬야 하는 유형이다.
그렇다면 자유시간에는 무얼 하는가? 딱히 직접적으로 나의 지식의 폭을 넓혀주는 다른 교양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에 어찌 보면 정말 쓸 데 없는 공상을 많이 한다. 남들에게 말했다간 십중팔구 비웃음을 살 만한 유형의 생각들 말이다. 예를 들자면 "길가다 누군가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 왜 웃음이 나올까?" 와 같은 생각......이런 공상은 나의 24시간 중 상당부분에 걸쳐 점철돼 있다. 만약 이 시간을 할애하여 레포트나 숙제, 팀미팅을 해버린다면 - 심지어 잠을 자버려도 - 나의 심적, 육체적 항상성에 문제가 생긴다.
- 말 나온 김에 진심으로 묻고 싶다. 그 사람이 넘어짐으로써 내가 기뻐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동정', 혹은 '공감'이라는 성향으로 인해 슬픔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직접적 고통, 혹은 부끄러움에 대한 안쓰러움에 가슴아파야 하지 않은가? 아니면 익숙치 못한 장면에 대한 신선함 때문일까? 정말 모르겠다.
정신병이란것도 결국엔 한 사람의 성격적 특성이 이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이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에 혹시 나도 아주 사소하지만 일종의 정신병에 걸린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한 적도 있다. 어쨌든 저런 잡다한 생각 때문인지 모르지만 확실히 나는 남들과는 다른, 매우 특이한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잘만 활용된다면 남들은 생각치도 못한 독특한 아이디어로 이어지지 않을까?
얼마 전 인사관리 시간에 최종태 교수님으로 부터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서울대 내 여러 단과대 교수님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경영대 교수님들이 가끔씩 들으시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 "경영대 교수님은 학자라기 보단 마치 기업의 간부들 같습니다." 학문의 특성상 늘 바쁘고 여기저기 발로 뛰어다니기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컴퓨터 앞에서 눈에 불을 켜는 모습이 아마도 그렇게 비춰진 것 같다.
이어서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주어진 일상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쁘고 부지런하게 사는 것이 좋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이런 유형에 속하므로 부지런한 타입의 인간형이 적합하다. 하지만 학자들과 같이 학문을 비롯한 본질적 문제를 탐구하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일상에 얽매여버리면 정작 본업인 진리탐구를 연구할 시간적, 심적 여유를 잃고 만다."
늘 고민해왔던 문제이기 때문일까?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의 게으름을 변명할 그럴듯한 말이 교수님 말씀이라는 권위있는 이름으로 나타나줬기 때문일까? 난 이 말이 그렇게 와닿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어떤 유형에 속한 사람이 다른 유형의 삶을 살 땐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없다.
내가 바쁜 삶을 힘들어하듯, 바쁜 삶을 살아야 할 유형의 사람은 한가한 삶에서 오는 권태를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 한다. 내 주위 친구들 중에서는 늘 바쁘다고 불평하면서도 막상 아무 약속이 없는 날엔 지루함을 토로하는 부류들이 있다. 아마 앞으로도 기업에 관련된 진로를 나아갈 경영학도에 적합한 유형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진리, 학문과 같은 고매한(?) 개념을 들먹이며 학자로서 살아갈 능력을 지녔다고 자신있게 말하지는 못한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나의 집중력이나 지능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니까. 하지만 어쨌든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기준으로 인간을 유형화 시킬 땐 확실히 나는 회사원 보다는 학자 타입인 것 같다.
다만 이런 유형의 사람은 자신만의 독특한, 한방을 터뜨릴 무언가가 없다면 그야말로 사회의 무용지물이 될 확률이 큰 것 같다. 사실 부지런한 타입이야 대충대충 그렇게 살아가면 자기 앞가림 할 밥벌이는 되겠지만 나같은 유형은 그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다른 고민들을 할 때도 자주 내려지는 결론이지만 역시 나만의 Core Competence(핵심역량)를 길러야만 한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나만의 독특한 능력!!
어쨌든 만약 내가 남들과 스케줄이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바쁘다는 이유로 당신들의 약속을 거절할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이럴 땐 위에서 말한 나의 성향을 어느정도 이해해주기 바란다. 내가 스케줄이 빡빡하다고 말할 땐 그 스케줄 속에 자유시간도 포함돼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매일 아침 샤워를 할 시간이 필요하듯 나에겐 '아무것도 예정돼있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에 앞서 말했듯 공상을 할 수도 있고 원하는 책을 볼 수도 있으며 인터넷 서핑을 할 수도 있다. 가끔은 지금과 같은 장문의 글을 쓰기도 한다.
같은 트랙을 돈다고 할지라도 거기엔 100m 200m 400m 800m 1,500m 5,000m 10,000m와 같은 다양한 유형의 러너가 있다. 10,000m 선수가 5,000m 선수에게 지구력이 약하다고 탓해서는 안되지 않은가? 자신과 다른 생활 패턴을 가진 유형의 사람을 조금은 이해해 줄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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