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내 룸메이트 이야기

(2004년 여름, 스물한살 어느 날)


요 바로 밑에 자취에 대한 글을 썼던 만큼 그 다음엔 자연히 내가 현재 살고있는 기숙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상적인 패턴일 수가 있겠다. 하지만 자취와 기숙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무래도 혼자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들게 마련인 것 같다. 기숙사에 대한 다른 점들은 다음에 쓰더라도 오늘은 나와 반년을 함께 살고있는, 그리고 남은 반년도 함께 살게될 룸메이트(이하 룸메) 이야기를 쓰고싶다.

흔히 사람들은 같이 생활하는 여러가지 조건 중에서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것이 가장 친해지기 좋은 조건이라고 들곤 한다. 실제 그 말이 어느정도 사실인 경향은 있다. 부부는 물론이거니와 함께 방을 쓰는 동성 형제, 고등학교 기숙사 친구들 - 개인적으론 무려 50명을 한 방에 떠밀어놓고 재우는 무시무시한 환경에서 고3 생활을 보낸 곳 - 그리고 군대에서 같은 내무반을 보낸 동기 등등...대학교 기숙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와 룸메는 이 경우에서만은 그렇게 전형적이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사람 관계에서 실제로 나와 상대방이 별로 안 친한 사이라고 해도 직접적으로 "나랑 너랑 그리 친한 관계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없고 실제로 그래서는 안 된다. 실제 내 룸메가 이 글을 볼 일이 언젠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가 이 사실에 마음 상할 사람은 아니리라 믿는다. 아마도 이 사실은 그도 나도 암묵적으로든 인정하는 것일테니 말이다.

가끔 기숙사에 사는 다른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은 분명 우리들(나와 내 룸메) 보다는 훨씬 더 많은 대화와 교류를 갖는 것 같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은 컴퓨터로 영화를 본다거나 같이 놀러가서 논다든가 혹은 다른 방에 방해 안 되도록 조심하며 술을 마신 이야기도 듣는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관계에 비교하자면 나와 나의 룸메는 거의 같은 장소만 공유할 뿐 그저 '아는 사람' 정도에만 그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표면적으로 우리는 그리 대화도 많이 하지 않고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자꾸 이런 식으로만 이야기를 하니 누가 내 글을 읽는다면 마치 내가 꼭 내 룸메이트를 안 좋게 생각하는 것 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아니올시다. 하물며 납치범과 인질 사이에도 함께 오랜 시간 있다보면 유대감이 생긴다는 심리학적 결과가 있는 마당에 무려 반년간을, 그리고 방학동안 더욱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있는 나와 룸메 사이가 저렇게 냉랭하기만 할 리가 있겠는가?

나와 룸메이트 사이에는 다음과 같이 많은 공통점이 많다.
그는 남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 보다는 혼자 방에 앉아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가 방에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내가 없는 경우는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별로 없다.
한편 그는 독서를 좋아하기도 한다. 나도 책을 많이 끼고 사는 편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독서량은 따라잡지 못할 것 같다. 전공이 자연과학인 만큼 거기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는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사회과학에 걸친 넓은 분야의 독서를 한다.
또한 그는 개인주의자이다. 단체에 해악을 주는 일은 물론 도덕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나 자신이 손해보면서까지 단체를 위해 힘써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남에게 도움은 되지 않지만 절대로 피해를 주는 일은 없다.
그는 지식이나 학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보통 친구들이 볼 때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때론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생각을 한다.
그는 자존심이 강하다. 내가 얼마나 그를 잘 안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는 주위 사람에 비해 패배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언제나 칭찬과 부러움 속에서 자란 것 같다.
정치에 대한 견해에선 그는 다소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운동권을 비롯한 진보세력에 대한 비판을 무턱대고 근거없이 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마치 '진보'는 좋은 뜻이고 '보수'는 어딘지 부정적인 뜻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분통터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공통점이 많은 그와 나는 어쩌면 저런 점들 때문에 서로에 대해 늘 조심스럽고 그렇다 보니 마음을 트는 대화는 그리 많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지적인 면. 생활 습관적인 면 등등에서 몇 안 되는 거의 최고점을 부여한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사람을 볼 때 매우 눈이 촘촘한 채를 쓰고 보는 습관이 있다. 즉 나는 사람을 쉽게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까다로운 조건을 들이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아직도 그 많은 조건을 대체로 다 충족하는 사람은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어쩌면 그런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룸메이트는 저런 많은 조건의 많은 부분을 충족시킨 사람인 것 같다. 첫째로 나는 지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즉 이것 저것 많이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 내가 다른 글에도 썼다시피 나는 지-덕-체를 주장하는 사람이다. 즉 몸이나 인자함이나 덕스러움(德)과 같은 인성적인 면 보다는 지적인(知) 면을 더욱 중요시한다. 배움으로써 덕스러워질 수는 있지만 덕스럽다고만 해서 많이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룸메이트는 이 점에서 나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매우 많은 것을 알고있다. 정말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은...아직 어린 나이를 고려하자면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힌다 - 많은 것을 알고있었다. 그와 이야기 해보면 그는 전공에 관련된 지식 뿐 아니라 인문/사회/철학/종교 등등까지 폭넓고, 그러면서도 깊은 지식의 정도에 놀랄것이다.

실제 수치화되어 나타나는 지적 척도라 할 수 있는 성적, 학점 등등도 그는 단연 엘리트이다. 과학고 출신인데다가 거기서도 우등생, 대학 와서도 과 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그는 소위 말하는 '수재'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 입학 당시 원서도 그냥 다른 군은 지원도 안 하고 이 학교 한 군데만 썼었다. 지식에 대한 욕심이 많은 나로서는 이 점에 대해선 그가 너무도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생활 습관면에서도 그는 나같은 범인(凡人)과는 다르다. 주말이나 방학이면 늘어지게 잠자는 - 뭐 평소에도 주침야활하는 대학생들이 많긴 하지만 - 우리의 패턴과는 달리 그는 주중이나 주말이나 거의 똑같이 취침/기상한다. 그것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소위 새나라 스타일이다. 그는 매일 12시~1시 사이에 잠자고 6~7시 사이에 일어난다.

그는 매일 아침 샤워를 하고 방 청소를 깨끗이 한다. 그는 나와는 달리 아침을 꼭 챙겨먹는다. 아침에 수업이 있으면 수업을 가지만 수업이 없는 날에도 책을 펼쳐든다. 평소에는 교과서를 보지만 조금 시간이 남고 한가할 때엔 교양 서적이나 때론 소설책도 본다. 최근엔 운동까지 규칙적으로 매일 한다. 그는 매 끼니 식사를 거르지 않고 챙겨먹는다. 옷도 단정하고 깔끔하게 입는다. 나는 그가 실내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반바지를 입거나 샌들을 신은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는 세탁도 자주 하며 구두도 자주 닦는다. 이렇듯 언제나 규칙적이고 한결같은 생활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100마디의 말 보다 그에게 더 큰 신뢰를 부여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듯 완벽한 사람일수록 나같은 보통 사람은 다가가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를 대할 때 늘 긴장하고 조심한다. 혹여나 나에게 뭔가 잘못된 점이 있진 않을까...하다못해 내가 방을 너무 어지럽혀놓은건 아닐까 늘 걱정해야한다. 지금도 그가 자는 동안 이 글을 쓰느라고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그를 거슬리게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하지만 나는 늘 그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갖고있다. 만약 힘든 반년간의 재수를 마치고 그 해방감에 들떠 입학하자마자 흐뜨러진 정신상태에 룸메이트마저도 나에게 맞장구쳐줬다면 나의 지난 한 학기는 얼마나 엉망이었을까? 그나마 내가 다소 루즈한 마음가짐을 갖고있으면서도 최소한의 암묵적 무언의 규제를 해준 사람은 부모님을 제외하면 내 룸메 뿐인 것 같다.

때론 룸메 특유의 자존심이 과도하게 표출되어 내가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내가 지식적인 면에 있어서 다른 누군가로부터 '그것도 모르냐?'는 말은 사실 태어난 이래 거의 들은 적이 없는 말이다. 그나마 이 말을 가장 많이 들은 때가 2004년인데 그 말의 90% 이상은 나의 룸메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와의 논쟁 - 사회 문제 혹은 철학, 과학에 대한 문제 등등 - 에서 언제나 나는 결국엔 그의 논리에 무릎을 꿇었고 나는 그의 지식적 우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씩 다른 기숙사 친구들에게 지난 밤에 내 룸메와 했던 이야기들을 말해주면 그들은 내 첫마디에 웃고만다. "너는 룸메랑 방에 앉아서 그런 이야기도 하냐?" 라고...물론 나는 그들이 웃는 것이 이해가 된다. 나도 이 대학 입학하기 전에 룸메랑 대화를 하는 것은 상상을 했지만 기숙사 침대에 누워서 진화론과 창조론, 신의 존재 여부, 종교와 사람의 행동, 진보와 보수, 파병문제, 서울대 폐지 논쟁 등등을 논하는 것은 전혀 생각치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의 지식적 논쟁에서 언제나 패자이다. 또한 진다는 것은 이기는 것 보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때론 독단적이다 싶을 만큼 자신에 찬 그의 모습과 해박한 지식, 냉철하고 정확한 논리는 나로하여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만들었다. 물론 '상대가 자기보다 무지하다면 그의 무지를 비꼬기 전에 먼저 그가 모르는 그 점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태도'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내가 그에 대해 느끼는 일말의 아쉬운 부분이다.하지만 나는 그에게 미운 감정을 갖지 않는다. 나는 그로 인해 기숙사에 입소하기 전의 나보다 훨씬 더 성숙해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마 앞으로도 나와 룸메 사이에서 오손도손 정다운 대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내 성격상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 나는 괜히 과도하게 친해서 부담되는 사람 보다는 차라리 어느정도 거리를 두면서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둘이 있다 보면 서로 약간씩의 피해는 주게 마련이지만 내 경우에는 주로 대부분 내가 그에게 피해를 일방적으로 주는 것 같아 늘 미안하다. 앞으로 반년간 더 지낼 사이인 만큼 나도 좋은 룸메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좀 더 많은 것을 배워나가고 더 나아가 닮아가고싶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