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삼국지 속 유비의 재조명

(2004년 여름, 스물한살 어느 날)


삼국지는 여러 장편 문학을 통틀어서도 아주 드물게 내가 여러 번 읽은 책으로 손꼽힌다. (초등학교 때 3권짜리는 5~6번, 15권 짜리는 2번 정도 읽은 듯) 그만큼 알게 모르게 그 작품은 지금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도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들 중에 하나로 절대 빠지지 않는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시절 담임 선생님은 내가 삼국지를 읽고 있는 것을 보며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그 인물들의 유형만 분석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그 유형 중에 하나에 속해 있고, 그 사람을 삼국지에 등장하는 해당 인물로 간주하여 대하기만 해도 대인 관계에선 절대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라고 말이다. 뭐 물론 그 작품에 등장 인물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어쩌면 저 많은 인물들의 유형 다 피해가는게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삼국지 만큼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보이는 다양한 인물형을 제시해 줄 만한 훌륭한 표본 자료는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

워낙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중에 비중 있는 인물만 골라낸다 해도 사실 누구를 딱히 절대적인 주인공이라고 잡기는 힘든 것 같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주인공은 '유비'라는 인물이다. 또한 나에게는 이 인물은 어린 시절 부터 지금껏 삼국지를 읽어오는 과정에서 인물 평가가 가장 자주 변경된 사람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초등학생 시절 내가 그에게 내린 평가는 '인자한 아저씨' 라 할 수 있다. 명목상으로만 본다면 난세를 바로잡기 위해 스스로 발벗고 나선, 매우 혈기 넘치는 사람이지만 구체적인 행동이나 대인 관계의 스킬을 볼 땐 늘 인자하고 자상한 모습이었다. 비록 집안이 가난하여 배운 것은 많지 않지만 언제나 의리와 인간 사이의 정을 중요시 하는 모습.,,,어쩌면 용궁에 간 토끼, 흥부와 놀부. 심청전 등등을 들으며 성장하던 그 당시 나의 세계에서는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는 것을 철떡같이 믿고 있었기에 유비처럼 인자하게 사는 사람이 가장 복을 많이 받는 존경스런 영웅으로 비춰졌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재조명한 그의 모습은 '착하기만 하고 무능한 사람'에 불과했다. 제갈량이 자신의 완벽한 계략을 통해 거의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후 유비에게 익주를 차지하라고 그렇게도 간청했지만 유비는 익주의 우두머리인 유장이 자신과 친척관계라는 이유만로 끝내 그의 청을 거절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유장의 항복으로 유비가 다스리게 되긴 했지만) 또한 관우가 손권의 손에 죽은 후에 스스로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여 승산이 없는 전투에 국력을 낭비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유비는 자신에게 온 많은 기회를 사사로운 정과 의리에 이끌려서 큰 것을 잃고 마는 어리석은 결정을 많이 내린 소심한 사람으로 비춰졌다. 소탐대실이란 말을 이 때 쓰는 것이 아닐까 하며 나는 그를 답답하게 여기곤 했다.

게다가 고등학교 말에 와서는 이문열이 조명한 것과 같이 유비가 멸망해가는 후한을 지키기 위한 '보수적 수구세력' 으로 비춰지기까지 했다. 즉, 조조는 부패해가는 후한이라는 국가를 그대로 따르는 대신에 자신이 나서서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여 개혁을 도모하는 데 반해서 유비는 자신이 속한 국가에 (특히 후한의 왕족은 유비와 같은 혈통이었다) 집착하며 변화를 거부하며 조조와 대립하는 부질없는 고집을 부리는 자로 보였다. 한창 수능을 공부하던 시절, 고려말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이미 낡아버린 고려를 뜯어고치고, 정도전이 급진적인 개혁을 감행함으로써 세종대에 와서 태평성대가 왔다는 사실을 암기하던 나로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시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에 나는 유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다. 경영학 전공 필수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물으셨다. 기업에서 최고 경영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정도일까? 대답은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시진 않았지만 최소한 50%로는 넘는 비중을 암시하셨다. 즉, 최고에 자리에 오른 사람은 그 자신의 실무적 능력도 중요하지만 '경영자'라는 직책을 생각해 본다면 사람을 다루는 것에 더욱 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유비는 분명히 조조나 손권에 비해서 능력이 부족했다. 아는 것도 많지 않았고 싸움도 잘 하지 못했다. 일을 추진해 나가는 데에도 확실한 결단력이나 카리스마가 부족했다. 하지만 유비는 관우, 장비, 조자룡, 마초와 같은 자신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자기 밑에 두고 부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갈공명, 손건, 간옹, 방통을 비롯하여 자신보다 식견이 높고 해박한 책사들도 보유하고 있었다. 유비가 그들을 자기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는 신하로 만들었던 것은 그의 무예나 지적인 능력이 아닌, 바로 '인화력'이었던 것이다.

물론 경영자에게 사업 계획을 수립/추진하고, 기술을 개발하고, 시장을 조사하여 결과를 도출하거나 분석하는 능력이 필요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삼성의 이병철과 같은 뛰어난 경영자도 실제 반도체라는 데 대해서는 박사학위 이상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덕과 인자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유비의 촉나라는 조조의 위나라에게 멸망하게 되지만 그나마 그가 한 때 조조와 천하를 다투는 영웅으로 맞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가 뛰어난 재주를 많이 갖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실제 촉나라가 가장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에도 영토의 넓이는 위나라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한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그나마 유비가 조조를 몇 차례 골탕먹인 것도 놀라운 일이다.) 만약 유비 혼자서 장비의 힘과 관우의 굳은 심지와 제갈공명 만큼의 머리를 지녔다 가정해도 그것은 그 능력이 각각의 사람에게 분산된 경우보다 그리 좋은 결과를 낳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 사람에게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관우와 장비와 제갈량이 각각 능력이 뛰어났다 해도 유비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없었다면 삼국지라는 소설에서 그들의 이름은 단순히 지나치는 무장과 선비들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최근 내 생각엔 유비는 '이상적인 경영자' 인 것 같다. 나는 늘 내 자신이 무능력한 데 대해서 자책하곤 했다. 실제로 나는 운동도 잘 못하고 그 많은 사람들이 즐긴다는 스타크래프트도 할 줄 모른다. 생긴 것도 그저 그렇고 키도 작은 편이다. 게다가 성적도 아마 이 바닥에서는 (물론 워낙 우수한 수재들이 모인 집단이라 그렇긴 하지만)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닐 것 같다. 하지만 유비는 이런 나에게 또다른 길을 열어준 인물이다. 비록 나는 보잘 것 없지만 더욱 뛰어난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 성공할 수도 있다. 능력이 없으면 능력 있는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면 된다. 오히려 내가 부족함을 느끼기에 성공한 후에도 나는 겸손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뛰어나서 영웅이 된 것이 아니라 내 주위 사람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영웅인 동시에 겸손한 사람" 을 지향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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