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프레젠테이션 단상


(2005년 겨울, 스물두살의 어느 날)


어두운 교실. 고요히 앉아 저 어둠 속에서 나를 주시하는 수많은 청중들. 시선의 갯수는 내 앞에 앉은 청중의 두배. 각각의 시선은 시각으로 감지되지 않지만 제6감으로 감지될 땐 엄청난 무게와 부담을 지닌다. 조명은 오직 나만을 향해있다. 내 뒤에는 빔프로젝터를 통해 투사된 예쁜 PPT 화면. 내 말 한 마디와 내가 짓는 표정, 내가 가리키는 손짓, 내가 행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적절한 PPT 화면과 함께. 그들을 이해시키거나 웃길 수도, 감동시킬 수도 있다.

발표 전날 밤 마지막 연습은 반드시 내 방 거울 앞에서 한다. 늦은 밤이고 내 방인데도 불구하고 외출할 때의 차림으로 서있다. 양말까지 꼭꼭 신고서......바로 다음 날 발표시간에 똑같이 차려입을 코디이다. 거울 바로 옆 책상엔 물론 컴퓨터가 놓여져 있다. 그 화면엔 말할 것도 없이 PPT 화면이 떠있다. 나는 거울을 보며 내가 취할 제스쳐와 표정을 가능하면 실제와 같이 연습하려 한다. 이 순간 나는 발표자이자 유일한 청중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링에 오르는 순간을 하루 앞둔 날 밤의 복서다.

발표를 할 때 결코 메모지나 대본을 손에 들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의 발표를 들을 때 종이를 손에 들고 읽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며칠을 준비했을 당신 조차도 이해하거나 숙지하지 못한 내용을 날더러 듣고 이해하란 말씀입니까?" 뭔가 불공평한 것 같다. "이봐요! 날 쳐다보라구요. 여기는 어두컴컴한 데서 혼자 조명 받으며 분위기 잡는 시 낭송회가 아닙니다."

유난히 나는 발표를 할 때든 들을때든 청중과 발표자와의 아이 컨텍트(Eye-contact)를 좋아한다. 강단에 서서 나에게 똑바로 향해진 수많은 시선 중 하나를 골라 눈을 마주친다. 평소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서 교실에 앉아 같은 칠판을 쳐다볼 땐 상상치도 못했던 아이 컨텍트. 하지만 이젠 발표자와 청중이라는 정당한 자격으로 그와 나는 눈을 마주치며 교감을 나눌 수 있다.

이때 마음 속으로 늘 주의하는 사실. 절대 시선을 청중 가운데 앞쪽에 앉은 몇 명에게만 줘서는 안 된다. 모든 시선들은 앞에 앉은 사람이든 뒤에 앉은 사람이든 공평하게 나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내 시선의 보답이 몇명에게만 주어진다면 나머지 대다수는 소외된 청자에 불과하다. "너가 아무리 날 봐라. 난 이 사람들하고만 놀테야!" 그 순간 내가 아무리 멋진 화술을 구사한다 해도, PPT 화면이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발표의 효과는 반으로 줄어든다.

나는 한 자리에 고정되어 발표를 하지 않는다. 발표의 주체는 비단 PPT 화면 뿐만이 아니다. 그 화면을 적절히 설명해줄 나 자신도 청중에 의해 보여질 존재라고 생각한다. 내가 한 쪽 구석에 앉아 화면 설명만 해준다면 라디오와 다를바가 뭐가 있을까? 나는 유난히 강단 위를 어슬렁거리는 편이다. 때론 말을 할 때 천장을 보거나 땅을 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거만하게 강단을 가로질러 걸어가기도 한다. 심지어 강단 가운데 서서 잠시 화면 보다는 나를 쳐다봐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내 한 손엔 마이크, 한 손엔 레이저 포인터가 쥐여져있다. 마이크는 옵션이다. 좀 더 크게 발표하면 되지 뭐. 레이저 포인터가 없으면 그냥 지시봉이라도 좋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평소 필통에 넣어두고 다니는 하이테크도 쓸만하다. 길이가 짧으면 내가 화면에 다가가서 그 부분을 가리키면 되지. 완전 빈 손으로 서있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이렇듯 대부분의 물건들은 옵션이지만 절대 껴서는 안 될 옵션은? 앞서 말했다시피 메모지나 대본이다. 물론 내가 발표할 때 말할 대사를 달달 외우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그것은 무식한 삽질. 그리고 그럴 경우 아무래도 발표는 어색해질 것 같다. PPT 한 화면에 그와 관련된 키워드 몇개만 머리 속에 숙지한다면 대충 그것을 연결한 자연스런 발표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어둠 속에서 가끔씩 보여지는 청중의 끄덕임. 내가 이 발표에서 목표로 하는 것들이 아주 작게나마 성공했음을 뜻한다. "당신에게 지식을 전달해준 쪽은 나 자신이지만 당신의 작은 끄덕임과 미소만으로도 오히려 제가 당신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나는 더 힘을 얻게된다. "나는 잘 하고 있어, 나는 잘 하고 있어......"

내 머리 속 지식이 아무리 칸트를 신다 버린 헌신짝으로 만들 만큼 위대한 것이라 할지라도 발표를 통해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그 신발에 묻은 흙조각만도 못한 것이 되리라. 발표는 재미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감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재미가 없는 발표는 소금과 후추가 빠진 영양 만점의 갈비탕과 같으리라. 공감이 없는 발표는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의.....사진에 불과하리라.

그래서 적절하게 농담도 던진다. 그리고 가능하면 우리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일과 연관짓는다. 아카데미에서 수십개의 상을 휩쓴 영화작품이라 할지라도 전혀 재미가 없는 작품은 보고싶지 않다. 그 뜻이 좋다한들 내 가슴 속으로 전달이 되지 않는 것을 어찌하리오? 오히려 속이 텅 빈 별 하나짜리 영화라 하더라도 나에게 진정 웃음과 감동을 주는 쪽을 택하고 싶다.

가능하면 옷도 정장을 차려입고 싶다. 그리 정장이 어울리는 옷걸이는 아니지만. 발표의 내용이나 화술 뿐만 아니라 외형적으로도 예쁜 PPT에 깔끔한 옷을 입는다. "나는 이렇게 속으로도, 겉으로도 당신들을 위해 준비해뒀습니다. 마음껏 듣고 마음껏 배워가시기 바랍니다."

발표가 끝나고 마지막 인사를 한다. "이상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의례적이든 진심이든 힘껏 쳐주는 그들의 박수소리는 지난 며칠간 잠을 줄여가며 들인 고생을, 그리고 바로 1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억누르던 긴장과 부담감을 떨쳐주기에 충분하다. 강단을 내려가며 나는 마음 속으로 두 번째 감사의 인사를 던진다. "첫 번째 감사 인사는 나의 미흡한 발표를 들어주신 것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되뇌인 두 번째 인사는 그 보람을 느끼게 해준 당신들의 박수소리에 대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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