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봄, 스물네살의 어느 날)
튤립 사이에서 우뚝 솟아올라 돈키호테를 돌진하게 만든 네덜란드의 풍차. 비록 TV를 통해서지만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풍차 날개를 보다 보면 마치 내 주위의 시간과 공간도 이렇게 끝없이 돌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벽에 걸린 시계, 매일 자전하며 동시에 공전하는 지구, 이 모든 것들은 빠르게 혹은 느리게 움직이며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온다.
우리는 시간을 한 번 내 앞을 스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동시에 공교롭게도 시간을 인식하기 위한 기준으로 쓰이는 시계바늘이나 각 행성의 움직임은 모두가 원운동을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일정하게 나누어 놓은 시간의 주기를 표시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 인간의 역사에서 지금과 같이 시간이란 수직선(數直線) 상에서 한 방향을 향해 끊임없이 흐른다고 생각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리스 시대에는 매일 해와 달이 뜨고 매년 계절이 반복되는 것에서 보듯이 시간이란 순환하는 것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생겨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것을 공인해 널리 퍼뜨림으로써 로마시대 이후로 인간의 시간관(觀)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인간은 태초에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것을 비롯한 구약의 사건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전에도 후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믿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은 이렇게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일련의 수직선과 같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갈릴레오의 《대화편 Dialogo》, 뉴턴의 《프린키피아 Principia》를 비롯한 16세기 과학혁명시기의 저술에서는 이미 완전한 운동을 크게 직선 운동과 원운동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 표기하는 방식이 각각 전자와 후자인 것도 결국엔 시간 또한 물리적 작용과 무관한 것은 아니란 것을 뒷받침 하는 것이 아닐까?
매일 해가 뜨고 지는 시점을 도식화 된 시간의 도형위에 표시한다고 가정해보자. 직선의 경우에는 일출과 일몰의 숫자 만큼의 무한히 많은 마디가 필요하다. 하지만 원은 그렇지 않다. 처음 몇 개만 그어준다면 시간은 원을 따라 끝없이 마디에서 마디를 옮겨가며 우리 머리 위에 해와 달을 번갈아 띄워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감각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판단하려 드는 이기적이고 게으른 동물이다. 초침이 돌아 분침을 돌리고 결국엔 시침도 돈다. 시간은 매일 다른 하루를 반복시키고 이렇게 쌓여가는 하루는 계절의 순환을 불러온다. 일부 동양철학에서는 원(元), 형(亨), 이(利), 정(貞)과 같은 우주의 계절과 순환을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생애를, 혹은 기록의 역사를 벗어나는 시간의 단위 앞에서는 태도가 돌변하고 만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지구상 네 군데 땅이라 확신하려 한다. 원래 있던 곳에 함부로 발을 들이고서는 계란을 탕탕 깨며 첫 발견자라 우기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도 '세계 최초' 타이틀을 따기 위해 분주히 달리는 60억 인구가 여기에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데카르트가 《성찰》에서 그토록 두려워하던 '유능한 악마'의 요술이 아닐까?
지구가 요철없는 이상적인 구형(球形)이라 가정해보자. 작은 참새 한 마리가 지표면으로 부터 일정한 고도를 유지하며 날고있다. 지표면에서 참새를 보는 우리는 새가 직선으로 날고있다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그 참새는 원으로 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큰 원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며 언젠가는 처음 시작한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큰 원의 일부를 잘라내면 그 조각은 비교적 직선에 가깝다. 잘라낸 조각이 작으면 작을수록, 원래의 원이 크면 클수록 조각은 더 직선과 비슷한 모양이 된다. 혹시 우리는 둥근 지구를 날고 있는 참새처럼, 인간의 수명에 맞춰진 작은 안경을 쓴 채 둥근 시간의 조각을 직선으로 잘못 알고있는 것은 아닐까?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 혹은 시간 이동을 다룬 - 공상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들 속에서 시간 여행의 원리를 설명할 때는 곧잘 시간의 차원 전환을 근거로 삼곤 한다. 즉 2차원의 종이 위에 곧게 그은 시간의 직선이 우리가 지금껏 인식해온 시간이라 한다면 영화 속에서는 그 종이를 둥글게 말아서 직선의 처음과 끝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 새롭게 느껴지는 인식의 전환도 결국엔 그리스인이 생각하던 시간의 관념으로 회귀하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그리스도교와 함께 지난 2천년을 이어져왔던 시간의 직선적 관념. 공교롭게도 아담과 이브가 딴 사과와 함께 시작된 이 관념은 뉴턴의 사과로 인해 반환점을 돌기 시작했고 오늘날에 와서는 다시 출발점을 바라보고 있다.
16세기 오스만 제국엔 피리 레이스(Piri Reis)라는 해군 제독이 있었다. 그가 이전까지 내려오던 자료를 토대로 만든 지도가 있는데 거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측량 기술의 발달로 겨우 알아낼 수 있었던 남극 대륙 얼음 아래 지형이 피리 레이스 지도에서는 이미 자세히 묘사돼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지도가 만들어질 때 보다도 수 천년 전, 남극이 얼음으로 뒤덮이기 전에 이미 그 곳을 항해하고 지도로 후세에 남긴 문명이 존재 했다는 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 지도는 둥글게 생긴 시간의 트랙을 한 바퀴 먼저 떠난 우리 조상 주자(走者)가 실수로 떨어뜨리고 간 바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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