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친구란

(2005년 겨울, 스물두살의 어느 날)


시트콤 <프렌즈 Friends>를 보며 즐겁게 웃다 보면 그 웃음이 반드시 우스운 농담이나 말투, 에피소드 때문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바로 그들이 기쁨과 슬픔을 진정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기에 행복해 보이고 덩달아 나까지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시트콤에 비춰 자신의 초라한 현실을 한탄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인 줄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대학에 입학한 3년 전, 이미 <논스톱>과 실제 대학생활이 전혀 상관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깐. 하지만 '우정'이라는, 아주 일상면서도 어려운 것을 저렇게 당연하듯 누리는 <프렌즈> 속 인물들의 모습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심리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친구라는 단어를 남발한다. "나와 같은 반 친구가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지나고 보면 이 단어는 아무 생각 없이 입에서 뱉어내기엔 너무도 무겁고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일상적으로 "친구"라는 말은 쉽게 하지만 "넌 친구를 몇명이나 두고 있니?" 라는 물음에 답할 땐 유난히 신중해지는 참 묘한 관계가 바로 친구가 아닌가 싶다.

친구가 아닌 다른 관계는 어찌 보면 참 명확하고 간단하다. 가족이나 친척관계야 피로 맺어진 객관적 증거가 있다. 연인은 일반적인 경우에 한 시점에서 한 명만을 두기에, 그리고 맺고 끝는 시점이 있기에 누군가가 나의 연인인지 아닌지를 헷갈리는 일은 없다. 그 밖에 선생과 제자, 선배와 후배, 직장사람 등등 많은 관계는 내 의지에 관계없이 맺게 되는 객관적 관계이다.

하지만 친구는 다르다. 공식적인 기준이 없기에 친구인 듯 하면서 실상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도 많다. 어쩌면 대부분의 소위 '친구'들은 바로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진지하게 "넌 친구를 몇명이나 두고 있니?" 라는 질문에 답할 때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친구는 극소수인 듯 하다. 오죽하면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진정한 친구를 한 명이라도 둔다면 그 사람 인생은 성공한 것이란 말이 있을까?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람은 친구를 사귀기 점점 힘들어진다고 한다.  나로서는 고등학교 때 처럼 같이 하루 종일 수십명과 좁은 공간에 모여서 몇 년을 지낼 땐 잘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내 주위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걸?" 이라며 의아해 했었다.

그러나 내 의지에 따라 더 많은 친구를 둘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나이에 서서 나는 저 말에 공감하고 말았다. 가끔은 새로 누군가를 알게될 내 머리 속에 든 생각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와 계속 알고 지낼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저울질하곤 하는 내 머리. 심지어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사람이라면 별로 친해지려는 노력 조차 하지 않는 내 모습을 발견한 적도 있다. 이렇듯 스스로 변해버린 내 모습에 안타까울 뿐이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반성하곤 한다.

숫자상으로 볼 때 내가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 편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위안으로 삼는 점은 비교적 가깝게 지내며 심지어 깊은 고민까지 나눌 만한 사람은 많다는 사실이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본 적이 없기에 나에게 친구가 많은지 아닌지 가늠할 방법은 없지만 모자랄 정도는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다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군대로 가버렸다. 그것 때문에 나는 유난히 이번학기에 종종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외로움을 안 타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번 학기만은 문득 '누군가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잠시라도 혼자서 있기 싫어하는 사람에 비해서는 - 주위에 이런 사람 꽤 많다 - 정도가 덜하지만 나 역시도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가보다.

친구라는 개념에 대해서 나는 어릴 때 부터 유난히 민감했다. 부모님이 나와 친하든 친하진 않든 같은 반 아이를 가리킬 때 "준령이 친구"라고 하는 것을 싫어했다. 친구란 그저 나와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많은 것을 공유함으로써 맺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서로가 마음까지 나눌 수 있을때 비로소 나는 그를 친구라고 인정했다.

한편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나를 두고 "넌 내 친구다"라고 말하는 것은 듣기 좋다. 하지만 나는 친구에 의해서 소유되고 싶지는 않다. 왜 한글과 영어 모두 "난 친구를 몇 명 가지고 있다.", "I have many friends"라는 표현을 쓸까? 친구는 결코 가지는 것이 아니다. 친구는 내것이 아니며 나 또한 친구 것이 아니다. 친구란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일 뿐.

혹자는 말한다. "친구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지금 하는 일을 박차고 나가줄 수 있다"라고...... 하지만 나는 결코 내 일을 방해받으면서 까지 친구를 위하지는 않는다. 어떤 방향에서든 그가 나에게 부담으로 다가온다면 난 더 이상 그를 좋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시트콤 <프렌즈> 주제곡 가사 중에 "I'll be there for you"라는 부분이 있다. 물론 좋은 내용이지만 친구란 필요할 때 언제든지 달려가서 웃어주는 강아지가 아니다. 서로의 사생활과 개인적 시간을 존중하는 것도 친구로서 지니는 의무라고 생각한다.

편한 친구라는 명목하에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친구가 아니다. 허물없이 지내는 것과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친구는 감정적인 친근함 뿐만 아니라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마음이 수반되어야 한다.

내가 누군가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와 친구로 지내는 이유는 다른 장점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친하다는 이유로 예의를 지키지 않아 친구에게 상처를 입히곤 한다. 상처를 입은 쪽만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처를 줌으로써 그가 좋아하는 많은 장점을 지닌 사람 한 명을 잃게 되는 것이 더 불행할 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외모와 성격, 취미가 완전히 동일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다만 공통점이 많고 적고가 있을 뿐. 그리고 그 공통점이 많은 사람끼리 더 가깝게 느껴지고 친해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가끔씩 보이는 차이점과 단점이 그것을 가로막곤 한다. 우리는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단점보다 친구의 단점을 더 크게 느끼곤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쌓았던 그에 대한 호감이 너무도 크기에 실망도 크기 때문이리라.

다만 이 단점 때문에 그와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차피 그는 장래에도 나와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쉽게 변하는 듯 하지만 많은 경우 세살 버릇 여든살 가게 마련이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넘어간다 해도 앞으로 계속해서 그의 단점을 보며 괴로움을 참을 순 없다.

또한 인간은 자기가 옳든 그르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어리석은 습성이 있다. 설사 내가 그의 단점을 고쳐주기 위해 잘못을 지적한다 해도 그것이 너무 잦아지면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결국 가장 좋은 친구는 어느 정도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나머지 장점에 이끌려서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인디언 말로 '친구'는 '나의 슬픔을 등에 짊어지고 가는 자'라고 한다. 장점에 이끌려 그를 좋아하는 것 만으로 친구가 되지 않는다. 즉, 필요할 땐 찾지만 그렇지 않을 땐 무관심하다면 결코 그는 친구가 아니다. 그의 단점, 슬픔, 괴로움까지 내가 짊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그의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의 등에 너무 많은 짐을 실어서는 안 된다. 친구라 할지라도 짐을 지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또한 힘이 들 때 인간은 지쳐 쓰러지거나 언제든지 화를 내며 짐을 놓아버릴 수 밖에 없다.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기에 내 짐을 짊어지는 친구의 고통을 인정하고, 가능하면 적은 짐을 안기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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