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이런 사람

(2008년 겨울, 스물다섯살의 어느 날)


내가 학창시절에 꿈꿨던 대학생활을 제시한 것은 바로 드라마 <카이스트>였다. 여느 드라마와는 달리 <카이스트>는 대학 학부과정이 아닌, 대학원 학생들을 소재로 했다. 그만큼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언젠가 연구실에서 교수님, 선후배와 함께 밤새 선학들이 이루어놓은 학문을 배우고, 또 새로운 지식을 창조해내고 싶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스스로를 상아탑에 걸맞는 아카데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내가 그나마 제일 잘 했던 건 공부밖에 없었고, 미래에도 내가 학문의 길 위에서 성공을 거두리라 믿었다. 남들이 이해한다면 나도 할 수 있으리라 장담했고, 나아가 대학원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낼 능력도 지녔다고 생각했다. 2003년, 2004년 두 차례 대학에 들어와서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먼 미래에는 비즈니스계에 종사하리라 생각했고 그래서 경영학과로 왔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강의실과 연구실이 내 삶의 무대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며 조금씩 내 생각은 바뀌었다. 스무살 중반의 젊은이가 가장 열심히 찾아야 하는 세 가지는 ‘하고싶은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것’. 마지막으로 ‘이 둘의 교집합’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조금씩 이 세가지를 찾아야 하는 나에게 있어서 학문의 길은 첫 번째 조건은 충족했지만 두 번째 조건에서 탈락했고, 자연히 세 번째 조건에서는 고려조차 되지 못했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것인 셈이다.

“하면 된다.” 라는 믿음은 아직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않은 게으름뱅이를 자극시키는 데는 좋은 말이다. 반면에 이미 최선을 다해서 과부하가 걸린 사람에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최선을 다 했지만 넘을 수 없는 벽에 좌절한 사람에게 이 말은, 실패의 원인을 끝내 자신의 게으름으로 돌리게 만들어 스스로를 죄인으로 몰아세울 뿐이다. 내 마음 속 재판관은 수 천 번도 넘게 나라는 인간에게 유죄선고를 내려왔다.

한편 사람들은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차라리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에겐 후회의 여지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에게는 적어도 언젠가 다시 한 번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면 이루어내리라는 희망이라도 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지만 이루지 못한 사람에겐 후회도 미련도 없다. 스스로의 두뇌와 유전자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있을 뿐. 이제 운명을 탓하는 것도 면역이 되어 별 감흥이 없을 만큼 나는 이미 무디어졌다.

물론 학문의 길을 걷지 않는다 해서 삶 자체가 막막한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상아탑을 내 평생의 무대로 고려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믿어왔던, 그것도 내 삶을 통틀어 유일하게 나의 자존심을 지켜줬던 하나의 능력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된 젊은이의 마음을 누가 이해해줄까. 그나마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긴다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았다는 판단력 정도인 것 같다. 마치 3인칭 관찰자 시점이나 전지적 시점과 같이 스스로를 성찰하며 산다고 생각했지만, 이처럼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조차 사반세기나 걸렸던 것이다.

이처럼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새롭게 깨닫는 나의 모습이 꽤나 많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껏 내 자신을 너무도 완벽하게 속여왔던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가 변한 것일까?

나는 내 자신이 스스로 동기부여하는 유형의 사람인 줄로 믿어왔다. 그래서 누군가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생각해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주어진 괴로운 일들을 해나가는 원동력이 분명 누군가의 강요 때문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동기는 경쟁자에 대한 승부욕이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 막상 나는 결코 승리에 초연하거나 패배에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시인 서정주를 키운 8할이 바람이라면, 나에게 그 8할은 '이기고 싶은 욕망'이었다. 순진해보이는 인상과 온건한 행동 뒷면에는 남모르는 질투가 감춰져있었다. 물론 내가 승부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예컨데 게임, 스포츠 등- 실제로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가 진정 가치를 두는 일에 대해서는 내 마음 속에 언제나 상대평가 계산기가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결코 지혜로운 아테나도, 용맹한 헤라클레스도, 여유롭고 쿨한 디오니소스도 아니었다. 그저 질투에 불타는 헤라였을 뿐.

절대적인 기준에서 만족스런 성과를 거뒀다 해도 상대적으로 뒤쳐졌다면 나는 괴로웠다. 어쩌면 이것은 더 나은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모두의 성과가 좋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내 위치가 올라갔을 때 내 기분은 어땠었나? 부끄럽게도, 비겁하게도 나는 기뻤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주위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나이지만, 성과의 측정에 있어서 나의 존재는 타인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세상을 바라볼 때도 나는 모든 것을 자본주의의 경쟁원리와 적자생존의 틀에 맞춰서 보는 사람이었다. 경쟁을 통해 선택받음으로써 살아남는 비즈니스의 세계, 그것을 공부하는 경영학에 매료되었다.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변화시키는 물건들도 옛날처럼 장영실이 세종의 명을 받아 만들어낸 발명품들이 아닌,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그리고 이윤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기업인의 머리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래서 내 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 밑줄과 주석까지 달아가며 몇 차례 읽은 책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눈 먼 시계공>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측면에서 나는 겉보다 속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믿었다. 물론 남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는 그 사람의 본질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속된 말로 그 사람의 겉모습이 밥먹여주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는 조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을 내실을 다지는 일이다. 그러나 비슷한 수준으로 속이 꽉 찬 사람이 스스로를 어필하기 위해 겉을 치장하는 것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사실 나는 인성이든 지성이든 내실을 다지는 것이 능력이라면, 그것을 남들에게 전달하는 것 역시 별도의 평가항목을 지닌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스스로의 이런 모습을 깨달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만큼 나의 믿음은 강하다.

사람들은 내실을 100% 채우지 않은 사람이 겉치장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쓸 때 그를 허세부리는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속이 50%인 사람이라도 스스로를 50%이상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도 일종의 자기 관리이다. 반대로 속이 100%인 사람이 겉치장에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아 50%으로 평가받는다면, 그는 자기 게으름 때문에 스스로에게 50%의 죄를 짓는 셈이다. 극단적으로 코카콜라의 설립자 존 팸버튼은 “나에게 25,000달러가 있다면 24,000달러를 광고에, 나머지 1,000달러를 콜라 생산에 쓰겠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사람에게 적용할 때 광고란 단순히 사람의 외모와 옷차림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형식과 의미, 디자인과 컨텐츠, 말투와 내용 등 겉과 속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수도 없이 많다.

이렇게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은희경의 <새의 선물>에서처럼, ‘바라보는 나’ 뿐만이 아닌 ‘보여지는 나’가 함께 있다는 것을 늘 잊지 않고 있다. 나를 포함해 열 사람이 한 방에 있다면, ‘바라보는 나’는 하나지만 ‘보여지는 나’는 아홉 명이다.

외부 세계에 민감한 자아를 가진 나답게 타인의 사소한 칭찬과 비난에도 크게 반응한다. HP의 前CEO 칼리 피오리나의 자서전 <힘든 선택들>에는 그녀가 로스쿨을 자퇴한 직후에 부동산 업체에서 말단 비서로 일하던 시절이 나온다. 당시 그녀가 최선을 다해 일한 원동력이 바로 “상사에게 사람을 제대로 뽑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라는 구절이 있는데, 대수롭지 않은 부분일 수 있지만 나로서는 너무도 공감하는 글귀였다.

분명 나는 남들에게 잘보이고 싶은 욕심이 많은 것 같다. 군대에서도, 까짓거 못한다고 하면 될 것을 잘한다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열심히 하다가 남들보다 1.5배는 더한 것 같다. 대학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팀 프로젝트에서 조용히 묻어갈 수 있지만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경제학에서는 개인별 보상 시스템 보다 1/n로 보상이 돌아가는 프로젝트에서 모두가 열심히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누군가가 지켜볼 때 더 의욕에 불타오르는 것 같다.

새롭게 발견한, 어쩌면 바뀌어가는 지금의 내 모습 중 일부는 예전의 내가 손가락질하고 비웃었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젠 진심으로 지금의 내가 옳은 것만 같다. 인간의 자기주장은 99%가 자기합리화다.

고백하건데 정말로 나도 몰랐었다. 실제로 내가 이런 사람이란 것을.

댓글 1개:

  1. 방명록이 없는 것 같아 여기에 남깁니다.
    올리신 글들 정말 잘 읽고 갑니다. 깔끔한 글들에 한참이나 머물렀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참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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