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인연이란

(2006년 가을, 스물세살의 어느 날)




현악기의 줄을 머리 속에 떠올려 보자. 한 쪽 끝에는 여러 개의 줄들이 메어져있다. 그리고 그 줄들은 주욱 평행선을 그으며 올라간다. 하지만 만약 이들 가운데 한 개의 줄이 다른 줄과 꼬인다면 그 줄은 어느 순간에 합쳐질 것이고 거듭 꼬여간다면 계속 합쳐진 채 함께 위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풀려서 제 자리를 찾을 때 두 줄은 각자의 위치로 되돌아갈 것이다.

각각의 줄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생이라 생각한다면 두 줄의 만남은 곳 두 사람간의 만남을 뜻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런 줄들과 같이 수없이 만났다 헤어짐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만약 이 세상 사람 모두의 만남과 헤어짐을 이 그림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면 결코 종이 위에는 그릴 수 없는 엄청 복잡한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한 사람을 기준으로 그가 일생동안 누구와 언제 만나고 헤어졌는지를 알고싶다면 그 사람의 줄을 잡고 주욱 위로 당겨서 팽팽한 직선으로 만들면 된다. 짧게든, 길게든 누군가의 줄과 한 번이라도 맞닿은 사람은 그 사람과 인연이 닿은 사람일 것이다.

인연이란 만남 그 자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이 만나서 엃히고 설킨 그 시간 동안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 여부 또한 인연을 결정짓는 또 다른 큰 변수이기 때문이다.

인연은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이다. 지금의 나는 나를 거쳐간 수 많은 인연들이 영향을 미친 결과물, 결정체이다. 나의 선천적 본능을 제외한 모든 지식, 감정, 사상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다른 이로 부터 가져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행동이 나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었다면 나는 그런 행동을 많이 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반면 그의 행동이 나에게 고통과 혐오를 유방했다면 나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내가 혼자서 방 안에 틀어박혀 읽은 책 속의 교훈도 그 책을 쓴 작가, 출판사, 운반업자, 서점 주인의 손을 거치지 않았다면 결코 내것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연이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전제 하에서는 어떤 시간과 공간 아래에서도 유효하다. 나와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누군가라 하더라도 그가 존재할 때의 나와 그렇지 않을 때의 내가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나와 다른 시,공간을 살다 가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존재가 내 삶의 고요한 호수에 작은 파문의 동심원을 그려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나와 인연을 지닌 것이다.

인연은 영원한, 무한한 것이 아닌, 조건적으로 지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연은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다. 그 인연의 개구간과 폐구간을 결정하는 것은 당사자간의 의지가 아니다. 아무리 누군가와 얽히고 싶어도 얽힐 수 없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뼈에 사무치도록 떼어내고 싶어도 언젠가 또 만날 수 밖에 없는 악연도 있다.

인연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또 그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기회로서 주어진 것이다. 내가 다른 누군가의 일생에서 그를 위할 수 있는 때는 그와 인연이 닿았을 때 뿐이다. 언제 두 사람의 줄이 풀려서 각자의 길을 향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인연이 끝난다면 이미 나는 그 사람의 일생에 어떠한 선도, 악도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뜻한다. 인연이 닿을 때 열심히 사랑하자. 인연이 끝났을 때 구차하게 미련을 갖지도 말자.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혹은 감정이 구속하는 관습적 의무감에 이끌려 인연이 끝나는 시점에서 힘겹게 다음 인연을 기약하지 말자.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기회도, 심지어 최선을 다 해야 할 책임 조차도 오직 그 사람과의 인연이라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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