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펩시콜라 뚜껑 이야기

(2008년 여름, 스물다섯살의 어느 날)


우리 집 화장실 세면대에서는 수도꼭지를 왼쪽으로 틀면 따뜻한 물이, 오른쪽으로 틀면 차가운 물이 나온다. 물론 수도꼭지 가운데에는 왼쪽 반은 빨갛게, 오른쪽 반은 파랗게 칠해져있던 동그란 플라스틱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사오기 전에 전 주인이 수도꼭지를 험하게 써서인지 그 동그란 스티커가 떨어져버렸다. 그래서 이사 온 초기에는 어느 쪽으로 틀어야 따뜻한 물이 나오는지 헷갈리는 때가 많았다. 그 바람에 꼭지를 오른쪽으로 틀어놓고서는 한참 동안 따뜻한 물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뒤늦게 그 쪽이 아님을 알아차려 아까운 물을 낭비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수를 하려고 세면대 물을 틀었다. 그런데 꼭지 왼쪽에 있는 손잡이에 음료수 페트병 뚜껑이 씌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손잡이는 세면대에 물을 채울 때 바닥 부분에 있는 배수구를 열고 막는 데 쓰는 손잡이었다. 나는 그저 그 손잡이를 밀고 당길 때 잡는 부분을 크게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뚜껑을 씌우셨다고 생각했다. 마침 지난 번에 펩시 콜라 1.5리터짜리를 다 마신 적이 있었다. 기왕 버릴 거 이렇게 조금이라도 편리하게 쓰려는 아이디어가 참으로 기발하다고 생각하며 여느 날처럼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런데 며칠 후 아버지가 나에게 그 뚜껑을 봤냐고 물으셨다.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자 아버지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사실 그 펩시 뚜껑은 아버지가 수도꼭지의 따뜻한 물, 찬 물이 나오는 방향을 표시하기 위해 씌워놓은 것이었다.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적잖이 놀랐다. 만약 내가 펩시의 빨간, 파란 로고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분명 아버지의 의도를 한눈에 알아챘을 것이다. 사실 펩시 로고는 예전에 수도꼭지에 붙어있었던 동그란 플라스틱 스티커와 거의 다른 점이 없다. 파란 색과 빨간 색을 가르는 경계부분이 물결 모양이냐 직선이냐만 제외하면 그 둘은 사실상 똑같은 모양이기 때문이다.

빨간 색이 따뜻함, 파란색이 차가움을 뜻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라면 특별한 교육 없이도 인지할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펩시라는 지식이 빨강과 파랑의 기초적인 늬앙스를 받아들이는 과정에도 장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끝없이 배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끊임없이 또 다른 색깔의 색안경을 겹쳐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 조직 안에도 다양한 출신, 성별이 공존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를 나는 수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우리 집 화장실의 펩시 뚜껑은 그저 피상적으로 인정했던 그 주장을 몸소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마케팅의 힘은 무섭다. 코카콜라가 매년 말 어린이들을 설레게 하는 산타클로스의 복장을 빨갛게 만든 것, 제록스가 전 세계의 다양한 기업에서 만든 복사기들을 자기 이름으로 불리게 만든 것 정도는 마케팅 성공신화로 치부해도 좋다. 하지만 나처럼 펩시 때문에 빨강 파랑의 기초적 정보 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은 그저 웃고 넘어갈 일일까? 혹여나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태극기를 보고 펩시를 먼저 떠올린다면?

무언가를 판단할 때 모든 선입견을 벗어던지고 객관적 시선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은 아주 쉽고 진부하게 들린다. 하지만 한갖 수도꼭지를 왼쪽으로 혹은 오른쪽으로 틀지를 결정하는 단순한 문제에도 선입견은 내 머리 속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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