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학문과 언어장벽


(2004년 가을, 스물한살 어느 날)

모레까지 제출해야하는 수학 숙제가 있다. 이 숙제는 '인문사회계를 위한 수학'이라는 과목인데 이 과목 이름의 의미는 인문,사회계 학문을 해나갈 학생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수학적 내용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절대로 인문,사회계 학생들이 수1과정까지 배웠다는 것을 감안했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 이 숙제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15~20 문제 정도를 풀어가야 하는 정도...(물론 각 문제의 길이와 풀이 과정이 그리 녹록치 않았긴 하지만) 다만 손과 머리로 해결 가능한 계산들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엑셀과 계산기를 사용해가며 문제를 풀어야만 했다.

하지만 내가 이 숙제에 대해 부담을 느꼈던 것은 그 수학적 학문의 깊이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부담을 느낀 이유는 그 문제들이 모두 영어로 쓰여져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영어의 수준은 우리가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높았던 것은 아니다. 그저 수능 외국어영역 정도의 독해 실력이면 큰 무리 없이 모두가 문제가 요구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한글로 쓰여진 문제와 영어로 쓰여진 문제를 대할 때 느낌은 같을 수 없다.

실제 우리는 한글을 볼 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읽지 않는다. 한 단어의 전체적인 대략적 모양을 통해 그 단어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영어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지난번에 어디서 주워읽은 것이 있는데 우리가 영어를 읽을 땐 각 단어의 처음과 끝 알파벳만 정상적으로 주어진다면 중간 철자의 순서가 섞여있어도 큰 무리없이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Sueol Ntiaoanl Usitvenriy" 와 같이 마구 뒤섞인 철자로 이뤄진 영어를 보자. 우리는 이것을 스르륵 읽고 넘어간다 해도 큰 무리 없이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내 생각에 이런 원리는 해당 언어가 익숙해질 경우 한 단어에서 뿐만이 아니라 몇개의 단어에 걸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 같다. 학창시절 나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언어영역...나는 독해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가능한 글을 빨리 읽으려 노력했었다. 그 때 나의 느낌은 마치 내가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문단 단위로 하늘 위에서 지형을 살피듯 글을 훑어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나에겐 너무나도 미숙한 영어의 경우엔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 아직도 나는 영어를 한 단어 단위로 읽어나가는 수준인 것 같기 때문이다. 오늘 영어로 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점은 '학문적 진보의 패권을 결정하는 요소로는 학문적 깊이 그 자체에도 있지만 언어라는 요소도 엄청나게 크게 작용한다' 라는 것이다.

나는 오늘 약 16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이 문제들을 푸는 데 약 2~3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만약 이 문제들이 모두 한글로 이루어져있어서 한 번 읽고 문제의 요구를 즉시 이해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같은 시간 내에 30문제 이상을 풀어냈을 것 같다.

아직 우리나라는 유럽, 북미권에 비해 학문적 수준이 뒤떨어진다. 따라서 대학에서는 대체로 우리나라 교재가 아닌 외국어로 된 책을 수입해서 보는 것이 현실이다. 똑같이 주어진 24시간 동안 유럽,미국 학생들이 50페이지의 진도를 나가는 동안 한국 학생들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30페이지를 넘기 어려운 것이 냉혹한 학문의 현실인 것이다. 따라서 학문적 수준은 더더욱 벌어지고 이런 현상은 또 다시 다음 세대로 되풀이 되곤 한다.

18세기 미국은 자국의 모국어를 결정하기 위해 투표를 한 적이 있었다. 오늘날 처럼 미국이 영어를 쓰게 된 이유는 당시 영어표가 독일어표보다 불과 단 1표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고 하지만 만약 당시 영어를 선택한 딱 한 사람 만이라도 독일어를 찍었다면....과연 세계 학문적 흐름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독일어로 쓰여진 맨큐의 경제학, 스티글리츠의 경제학... 참 흥미로울 것 같다. 또 다시 만약....미국과 영국, 독일의 대학생들이 한글로 된 이준구의 미시경제, 정운찬의 거시경제, 조동성의 국제경영을 공부하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대한민국이 학문적 깊이로 세계를 앞서기 위한 노력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 언어인 한국어, 우리 글자인 한글을 좀 더 아끼고 사랑하며는 것도 - 그렇게 까진 못하더라도 멀쩡한 우리 말글 놔두고 외국어로 오염시키는 추태만 줄이는 것이라도 -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오늘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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