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라캉을 손에 든 지하철의 어느 대학생

(2008년 이른 봄, 스물 다섯 살의 어느 날)


소설가 김영하씨는 "책의 일차적 기능은 전시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도, 북 커버 디자이너도 아닌 책의 속살을 만드는 사람이 한 말이라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확실히 책이란 단순히 읽히기만을 위해 태어나지는 않은 것 같다. 비록 읽히지는 않았지만 내 책장에 꽂힌 책은 개발되지 않은 지식의 금광처럼 느껴져서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실내 장식용으로도 책은 훌륭한 아이템이다. 깨끗하게, 심지어는 무질서하게 채워진 알록달록한 책장은 웬만한 미술작품 못지않게 아름답다. 우표나 동전을 모으는 사람이 있듯이 책을 수집하는 것도 썩 괜찮은 취미이다. 물론 돈이 적잖게 들기는 하지만 다른 수집 활동과 비교해볼 때 '읽을 수 있다', '들고 다닐 수 있다'는 실용적인 측면까지 있으니 더욱 추천할 만하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대학생들이 지하철에서 읽는 책들'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초점을 둔 부분은 '어떤 책이 읽기 좋으냐?'가 아니라 '어떤 책이 들고 다니기에 더 폼나게 보이는가?'였다. 글쓴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폼나는 책의 조건을 몇 가지 들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기억나는 대로 요약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았다.

1)반양장이나 페이퍼백 보다는 예쁘고 고급스런 양장본.
2)한국인 저자가 쓴 것 보다는 외국인 저자가 쓴 책. 번역서가 아닌 원서라면 더 좋음.
3)우직하게 큰 책 보다는 작은 책.
4)가능하면 현대 작가가 쓴 책. 철학서의 경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것 보다는 라캉이나 들뢰즈를 비롯한 현대 철학책.

 이런 글이 많은 애서가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는 사실은 책에도 전시적 기능이 크다는 주장을 충분히 뒷받침한다. 책에도 외면과 내면이 있다. 책의 전시적 기능은 얼굴에 해당하는 외면이요, 책의 본질적 기능, 즉 읽히는 것은 책의 내면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열거된 폼나는 책의 조건은 현대의 지성이라 불릴 대학생들이 선호하는 사상思想의 외면적 조건을 반영한다. 싼 것 보다는 비싼 것, 우리 것 보다는 외국 것, 무거운 것 보다는 작고 부담없는 것, 고전 보다는 현대의 것을 좋아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대학생들의 성향이다.

 확실히 옛날과 비교할 때 오늘날 대학생들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이것은 결코 고학번 운동권 선배들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후배들을 보며 한탄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머물렀던 3년 동안에도 매년 대학생들은 변하고 있었다. '고려대는 막걸리, 연세대는 맥주'와 같은 학교의 정체성은 말 그대로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나마 학교라는 집단은 이렇게 명목상으로나마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지만 학생들의 경우엔 그것 마저도 사라진지 오래. '어떤 학교'의 정체성은 있지만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를 가나 똑같으니까. 자신이 속한 국가와 민족, 나아가 이 세계에 대한 소속감과 애착심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제 이런 문제들은 학생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세상의 중심은 수많은 각각의 개인으로 흩어져버렸다.

 예전에는 함께 논의해보자며 학과 게시판에 올라오던 글이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그 대신에 그것들은 모두 개인의 블로그로 넘어갔다.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여 비판받는 것도 싫고 심지어 애초에 나의 생각을 남들에게 보여야 할 필요성 조차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대담론의 해체, 다원주의와 극히 파편화된 개인주의의 대두는 바로 오늘날의 대학생들을 표현할 키워드다. 플라톤 보다는 라캉이, 고대 그리스 철학 보다는 현대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주목받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실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하기에는 기본적인 자격 조차도 갖추지 못했다. 일단 무언가에 대해 토론을 하려면 그 주제를 정의하는 과정이 우선돼야 하지만 나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재의 내공으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이 철학이 우리가 살고있는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궁극적 진리와 정답을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 누구도 정답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니, 정답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조차도 알 수 없다. 이 때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든 없다고 생각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한 가지는, '정답이 있다고 증명하는 것'은 '정답이 없다고 단정짓는 것' 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이다. '있다는 자'의 정답을 향한 피나는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갈 때 마다 - 실제로 대부분은 실패한다 - '없다는 자'의 주장은, 적어도 귀납적 측면에서는 강화된다. '있다는 자'는 "정답이 존재하는가?" 대한 불확실성 뿐만 아니라 "그 정답이 무엇인가?"에 대한 불확실성까지 모두 떠맡아야 한다. 반면에 '없다는 자'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벌써 논쟁을 회피할 수 있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두 번째 질문은 대답할 필요조차 없으며 때로는 불가지론으로, 혹은 진리무용론으로 흐를 수도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은 젊은이들이 어설프게 이해할 경우 진리 탐구를 향한 괴롭고 먼 길을 회피하고자 하는 달콤한 유혹이 될 소지가 크다. 상아탑 아래 모여 앉아 진지한 토론을 벌이는 대신에 "정답은 없다." 혹은 "모든 것이 다 정답이다."라고 말하며 새침하게 홱 돌아서는 것. 그리고 그것이 현대 철학의 정신인 양 당당해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자세일까?  또한 이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남용될 땐 현대 젊은이들의 이기주의-개인주의와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를 합리화할 우려도 있다.  물론 개인이 어떤 시각을 지지하느냐는 각자의 자유이다. 하지만 하나의 철학을 선택하는 이유가 다른 한 쪽이 어렵고 불확실하다는 것이 이유라면 그것은 호오好惡가 진위眞僞를 결정하는 주객전도의 결과를 낳는다. 이것은 어느 고등학생이 수학이 싫어서 문과를 가는 것과 다를 것이 전혀 없다.

  내가 그들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이렇게 함부로 입을 놀리는지도 모른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어쩌면 나는 마치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따먹지 못하는 포도를 눈 앞에 두고서 그 포도는 신 포도라고 우기는 여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명한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조금 진일보해서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근거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비판했다. 심지어 그들의 주장을 '헛소리'라고 못박기도 했다. 실제 그가 예로 든 라캉의 어느 증명 과정은 철학과 수학에 거의 까막눈인 내가 보아도 어이가 없었다.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e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이었는데 고등학교 정도의 수학 지식만 갖춘 사람이면 그의 주장이 궤변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라캉, 들뢰즈, 가타리, 푸코를 비롯한,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신중하다. 적어도 그들의 주장은 근거없는 궤변은 아닐 것이라고. 무식한 선배이지만 조심스레 오늘날 저학년 대학생들에게 부탁을 하나 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은 그 이전 수많은 철학들이 연구해온 주장과 동일한 위상의 학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라보는 수많은 방법들 중 하나로 이해돼야 한다. 시기적으로 현대 철학이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절대적인 진리로 여겨져서는 곤란하다.

 언어는 언중의 선택에 따라 의미가 변화한다. 이렇게 극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이해하는 '진정한 의미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칫 잘못된 방향로 남용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오염되어 의미 자체가 변질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이 단어는 '진리무용론', '불가지론'. '극단적 다원주의'를 뜻하는 철학으로 오해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들에게 폼나게 보이기 위해서 원서로 씌어진 라캉의 하드커버 책을 당당히 들고 있는 지하철의 대학생 머리 속엔 어떤 철학이 둥지를 트고 있을까? 그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진정한 의미의 그것일까 아니면 변질되어 새침하고 무책임한 철학일까? 과연 그는 라캉의 사상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벌거벗은 임금님을 바라보는 데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하나는 그가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고 보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의 눈이 선하지가 않기에 임금님의 옷을 보지 못한다고 믿는 것이다. 전자의 시선은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갖춘 사람에게만 허락된다.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무지를 탓하며 후자의 시선으로 임금님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임금님의 옷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엄청난 학문적 권위를 쥐고 있다면 십중팔구의 대중은 자신의 눈을 탓하지 벌거벗은 임금님을 비웃지 못한다. 과연 내 눈이 먼 것일까, 포스트모더니즘이 옷을 입지 않은 것일까?

 플라톤의 완벽한 세계idea에 대한 나의 이상과 믿음은 21세기를 사는 오늘날 점점 설자리를 잃고 있다. 진정 이 우주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황금 열쇠는 존재하니 않는 것일까? 만약 그 정답이 존재한다면 내 머리와 가슴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외면받게 되리라. 하지만 설사 정답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한동안 쉽사리 라캉, 들뢰즈, 가타리의 책을 집지 못할 것 같다. 첫째로는 깨어져버린 믿음에 대한 미련 때문이요, 둘째로는 이런 무질서하고 유리조각같은 세상을 받아들이기가 선뜻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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