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다이어리를 선물한다는 것

(2007년 겨울, 스물네살의 어느 날)


 고마운 분께서 크리스마스 겸 연말연시를 맞아 2008도 다이어리를 선물해주셨다. 새해나 새달을 맞이할 때 마다 나름 계획을 세워가며 살아왔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다이어리를 이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쁜 다이어리를 한 손에 꼭 쥐고 있으니 막연하게 느껴지던 1년이란 시간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을 것만 같다.

 화가가 작품을 그리기 전에 새하얀 도화지를 이젤에 얹듯, 작곡가가 음표를 채우기 전에 팽팽하게 줄이 당겨진 오선지를 바라보듯, 우리는 매년 새해의 문턱에서 마음 속에 보이지 않는 다이어리를 써내려간다. 다이어리를 선물하는 것은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 속에는 선물을 받는 사람이 결코 시간에 지배당하지 않는, 반대로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있다.

 다이어리 초반에는 달력과 같이 월별 계획을, 그 뒤 부터는 하루에 한 쪽씩을 할당하여 일일계획을 짤 수 있도록 돼있다. 하루에 한 쪽씩 모여 만들어진 400여 페이지가 꽤나 두껍고 묵직하다. 새삼 1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도, 가볍지도 않음을 깨닫는다. 하루에 명언名言 하나씩, 좋은 책 50페이지씩만 읽어도 1년은 충분히 나를 성장시킬 만한 시간이다. 물론 태어나서 이제껏 스무 번 넘게 무심코 지나쳐왔던 각각의 1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일까? 그렇다는 이도, 그렇지 않다는 이도 있다.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작가인 마크 트웨인은 "담배를 끊는 것 만큼 쉬운 일은 없다. 나는 그것을 수백번도 더 해봤다."라고 말했다. 계획을 세우기가 쉽다고 말하는 이는 혹시 이제껏 지키지 못할 계획을 남발하고 그것을 수백번 새로 짠 것은 아닌지, 때문에 계획 세우기를 쉽게 여기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일이다. 계획은 소원이 아니기에 무작정 달님에게 빌듯이 세우는 것이 아니다. 또한 계획은 꿈이나 장래희망과도 달라서 현실을 벗어나 허황되게 세우는 것도 아니다.

 앞날은 늘 불확실하다. 눈앞에 펼쳐진 시간의 도화지는 어느 순간 찢어질 수도 있고, 나의 물감과 붓이 불량품일 수도 있다. 의도치 않게 그림을 망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상화理想化된 자신의 계획에 취해버린 나머지 그것을 실천하기 보다는 달콤한 꿈 속을 헤매다가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이것은 마치 화가가 자신의 능력과 현실을 외면한 채 거창한 작품을 그리려다 좌절하는 것과 같다. 의지가 계획을 따라가지 못하는 때도 있다. 적절하게 작품 구상을 하고서도 정작 화가가 붓을 든 후에는 귀찮음,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깨끗하던 도화지는 더럽혀지고 버려진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같은 회사에서 만들어진 같은 모델의 다이어리는 크기와 두께가 똑같다. 하지만 각자의 마음 속에 써내려가는 다이어리를 다시 종이로 인쇄한다면 그 두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우리 영혼의 다이어리는 마치 나무의 나이테와 같다. 그것은 똑같은 1년 동안에도 누군가에겐 두툼한 백과사전처럼 빼곡히 채워지지만 다른 이에겐 구겨지고 더럽혀진 미농지가 되기도 한다. 먼 훗날 튼튼한 아름드리나무가 되느냐, 마르고 비틀어진 죽은 나무가 되느냐는 이렇게 각자가 마음 속에 써내려가는 다이어리의 두께에 달려있다. 다이어리를 선물하는 것은 받는 이의 마음 속에 두꺼운 나이테를 얹어주는 것이다. 그 속에는 상대방이 어떤 비바람과 추위도 이겨내어 슬기로운 노송老松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져있다.

 계획을 짠다는 것은 시간을 관리한다는 말이다. 황진이의 시조 가운데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 순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임 오시는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라는 작품이 있다. 시간을 시각화示覺化한 황진이의 기발한 비유가 무릎을 치게한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을 관리하는 방법도 실상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점은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시간을 줄이고 떼어내어 유용한 곳게 배분하는 것이다. 사랑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어느 노래 가사처럼('Love is All Around'), 우리가 유용하게 바꿀 수 있는 시간도 어디에나 존재한다. Time is All Around. 그것은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벤치 위에도, 무심코 걸어가는 보도블럭 위에도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시간은 금이다"라고 말했다. 하루 24시간은 마치 신神이 모든 이에게 매일 똑같이 내려주는 24만원과 같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 돈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로 누구도 24만원을 초과해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 둘째로는 다 쓰지 않고 남은 돈은 다시 회수해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능하면 이 돈을 욕심껏 유용한 곳에 사용하려 한다. 다이어리를 이용하는 것은 한정된 돈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사용하기 위한 재테크와 같다. 펀드매니저가 최적화된 비율로 주식, 채권, 정기예금, CMA 등등에 돈을 배분하듯이 우리는 적절한 곳에 적절한 만큼의 시간을 배분해야한다.

 한편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도 있다. 시간이 금이고 침묵도 금이니 결국 시간은 침묵이라고 해도 될까?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결론이겠지만 나는 이것 또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다이어리에 씌어진 계획들을 요란하게 떠벌리기 보다는 묵묵히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다이어리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다이어리를 벗어나야한다.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채워진 활자화된 계획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진정 중요한 것은 종이 위에 씌어진 계획을 나의 영혼을 살찌우는 나이테로 바꿔나가는 일이다. 그것은 끝없는 땀과 눈물을 필요로 한다. 이 땀과 눈물은 우리 마음 속의 아름드리나무를 살찌우는 비료가 되어줄 것이다.

 공자는 "생生의 계획은 어릴 때, 일 년의 계획은 봄에,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연말이면 다음 해의 다이어리를 선물한다. 인간이 연속적인 시간을 마치 대나무 줄기처럼 연월일年月日로 분절시킨 것은 확실히 의미가 있다. 한 마디의 끝에서 우리는 지난 시간을 반성할 수 있으며 동시에 다가올 시간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이어리를 선물하는 것은 365일이라는 시간의 한 마디를 이어주는 것과 같다.

 하지만 어느 가수의 노래 가사와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대사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오늘은 내 남은 생애의 첫 번째 날이다.("Today is the first day of the rest of my life.") 우리는 인위적으로 나눠진 연월일에 상관없이 늘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하는 시간의 기로에 서있다. 당연히 한 해를 시작하는 날과 한 해의 가운데에 위치한 날의 중요도는 똑같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관습적으로 분절된 시간의 마디에 얽매여 매년 초마다 작심삼일에 그치는 계획들을 남발하곤 한다.

 다이어리의 어느 페이지를 펴더라도 우리는 남은 생의 첫날을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살고있다. 계획과 실천은 적분積分처럼 구간을 두고 분리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분微分과 같아서 어떤 시점에서든 남은 생애를 계획하고 동시에 그것을 피땀흘려 실천해야한다. 다이어리를 선물하는 것은 오늘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사람들은 매년 초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행운이 많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말이다. 반면에 다이어리를 선물하는 것은 "새해 복 많이 만드세요."라는 인사와 같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만들 수 있는 복을 되도록 많이 챙길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인삿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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