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슬픈 거북이

(2007년 겨울, 스물네살의 어느 날)


새 학교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던 신입생 시절, 교양수업으로 러시아 문학을 수강한 적이 있었다.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운운하려는 사람이 적었던 탓인지 늘 교실은 한산했다. 그래서 나는 이 수업을 좋아했다. 많아야 10명 내외가 앉은 작은 교실에서 우리는 비교적 많은 발언 기회를 가졌고, 그래서 나중에는 학생들 사이에 일종의 '암묵적 친근함'까지도 가질 수 있었다. 출석 체크때도 선생님이 호명할 때 우리는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선생님은 출석 용지에 적힌 우리 이름을 보고서는 고개를 들고 그 학생을 찾는다. 서로 눈이 마주치고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수업을 맡으신 선생님은 정교수가 아닌, 30살을 갓 넘긴 젊은 여자 강사였다. 작은 키에 차분한 말투, 늘 밝은 웃음을 띤 얼굴이셔서 나는 그 분을 좋아했다. 친근한 선생님이었기에 문학 작품에 대해 부담없이 내 견해를 말할 수 있었고 선생님은 항상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그리고 나의 어설픈 비평 위에 차분한 존댓말로 깔끔한 코멘트를 얹어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지어주셨다. 그럴 때 마다 나는 학창시절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 사이를 다니시며 내 보잘 것 없는 그림 위에 한두번 쓱쓱 색칠을 해주자 어딘가 모르게 작품이 확 살아난다고 느꼈던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약 3년 반이 지난 후 신문의 북 섹션 신간 소식에서 나는 그 선생님의 이름을 발견했다.  도스토예프스키F.M. Dostoevskii의 《카라마조프가家의 형제 The Brothers Karamazov》를 새롭게 선보였는데 바로 그 선생님이 번역자였던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인터넷에서 번역자 정보를 찾아보았다. 동명이인이 아니란 사실을 확인한 후 그분의 이력을 보고서 나는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학부생 3학년 때 첫 소설을 출간하며 문단에 등단. 이후 몇 차례 소설을 내놓으며 매번 신선한 문체와 형식으로 주목받음. 28세였던 2002년에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와 《악령 The Devils》을 번역. 현재에도 활발한 문학 연구 및 강의 중.

어처구니 없는 감정인 줄 알지만 나는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꼈다. 한 학기 동안 수업을 하시면서도 어떻게 선생님은 그렇게 겸손하기만 했을까? 속된 말로 '편안하고', 더 막말로 하자면 '만만한 누나같던' 소박한 모습 뒤에 이런 이력을 숨기고 있을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나 혼자서 사람을 지레 짐작하여 과소평가하고서는 뒤늦게 또 혼자서 당황해하는 말 그대로 쇼를 한 셈이다. 선생님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같은 사람이지만 이제 내 마음 속에서 그분은 더 멀게 느껴졌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그나마 잘 할 줄도 모르는 영어도 아닌 러시아어로 쓰여진 소설을 28살에 번역한다는 것. 그리고 그 전에 23살의 나이로 비교적 잘 된 소설을 쓴다는 것.  나로선 꿈만 같은 일이다.

미셸 투르니에, 파트리크 모디아노,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등등과 함께 프랑스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는 J.M.G. 르 클레지오Jean-Marie-Gustave Le Clezio가 있다. 그는 24살때 장편 소설 《조서 Le Proces-verbal》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한국에는 1960년대 한국 문학에 '감수성의 혁명'을 가져온 작가로 평가받는 김승옥이 있다. 그는 20세 초반의 나이 때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과 같은 수작秀作들을 내놓았다. 굳이 이렇게 시대를 뛰어넘는 거장들만을 들 것도 없이 요즘 TV나 잡지를 장식하는 유명인사들은 더이상 나에게 무조건 형, 누나들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TV속 인물들은 내 또래뻘의 친구들이 되고 또 잠깐 사이에 내 동생뻘 녀석들이 장악하며 나는 원치않는 추월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나 요즘은 더 가관이다. 나보다 어려도 한참은 어린 여고생들이 떼지어 9명씩이나 몰려나와 화면을 꽉 채운다. 내가 멍청하게 누워서 그들의 미니스커트 아래로 쭉 빠진 매끈한 다리에 넋이 나간 동안 그들은 한심하게 나이만 먹고 있는 이 오빠를 향해 힘차게 하이킥을 날리고 있다. 그리고 며칠 전 부터는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란다. "그래, 미안하다. 나는 이 나이 먹도록 해 놓은게 하나도 없다."

초등학생 시절에 '모차르트는 3살 때 부터 피아노를 능숙하게 쳤다'라고 쓰인 위인전을 보아도 별 감흥이 없었다. 이렇게 나는 10살도 안 되어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는 신동들에게는 애초부터 부러움이나 질투심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저 그들은 원래 나와는 다른 유형의 인간이며 신의 사랑을 받았겠거니 하고 말 뿐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내 또래뻘 내지는 동생뻘 되는 친구들의 화려한 성공을 지켜볼 땐 자꾸만 이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정된 범위를 공부해서 치르는 시험 성적으로 학생들을 줄세우는 학창시절엔 그나마 나았다. 그 땐 심지어 남용된 의미로서의 수재秀才라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처럼 공부 이외에 다른 대안을 찾을 생각조차 못하고, 기성 세대의 가치관에 대한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는 상태라면 누구나 자신의 에너지를 공부에 집중하지 않을까?  내가 마치 책 제목 처럼 '천재처럼 꿈꾸'진 못했더라도 '바보처럼 공부했'던 데에는 일탈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큰 원동력이었다.

이렇게 24년 동안 나는 끝내 철들지 않은 착한 소년으로 자라온 것 같다. 변덕도 부리고 모험도 즐기며 새로운 것을 찾기 보다는 기성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천재도 수재도 아닌, 오히려 모든 면에서 조금씩 부족했던 나로서는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같은 시간에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해내기가 두려웠던 것 같다.  자연히 오랜 세월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 고전古典문학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변화를 주도하는 진보주의자 보다는 안전한 보수주의자를 옹호했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성과를 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고전예찬론자, 온건한 보수주의자라는 명칭은 나의 소극적이고 느릿느릿한 성격에 그럴듯한 피난처를 제공해주었다. 어쩌면 무의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내 취향와 정치적 성향을 어린 시절 부터 지녀왔던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불신 혹은 열등감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르 클레지오는 현재 이화여대 불어불문과 초빙교수로서 프랑스문학 강의를 맡고 있다. 한국에 머무르는 만큼 부쩍 최근에 신문에서 그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금발의 영화배우같은 외모에다,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지적인 중년 남자 르 클레지오. 남자인 나도 참 멋있다고 느끼건만 그의 수업을 직접 듣는 여대생들은 어떤 심정일까?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거론되는 그가 프랑스 문단에 깜짝 데뷔하여 문학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앞서 말했듯 그가 겨우 24살 때였다. 바로 지금의 내 나이다. 내가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그 때로 돌아간다면 동갑내기 친구가 "읽어봐!" 하면서 내민 소설을 보고서는 머리를 긁적이며 "너무 심오해서 잘 이해가 안 돼" 라고 해야할 것이다. 실제로 나는 아직도 우리 집 책장의 프랑스 문학 파트에 꽂힌 《조서》를 읽으며 - 세계 문학이 종종 그렇듯- 의무감과 인내심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뇌했었다.

24살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나는 지금 하사, 중사 및 장교들에게 커피를 타주고 라면을 끓여준다. 설거지는 기본이다. 그러고는 홀로 밖으로 나와 면세 담배를 꺼내고 털어내는 재 속에 울적한 마음을 담아 바람에 날리며 연기를 뱉는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밤이 뒤면 무릎이 툭 튀어나온 추리닝을 입은 채 차가운 모포를 덮고 자유를 그리워하며 잠에 든다. 자꾸만 내 청춘이 마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화자話者 모습 같아서 우울해진다. 시를 직접 인용하고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고 '내 가슴이 꽉 메여 울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이'고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운' 것이다.

현실을 잊으려 시간이 날 때 마다 닥치는 대로 읽고 또 읽는다. 소설은 말 그대로 픽션fiction인지라 나는 그 속에서 잠시나마 현실을 벗어나 자유롭다. 하지만 연극이 끝난 후 막이 내린 후에 느끼는 이유 모를 눈물처럼, 책의 본문이 끝나고 작가의 프로필로 넘어갈 땐 씁쓸한 웃음이 난다. 연극과는 달리 이것은 이유를 확실히 알고 있다. 이렇게 환상적이고 놀랍게 창조된 픽션의 세계마저도 나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천재들에 의해서나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청년 르 클레지오와 김승옥에 패배한 나의 20대는 이제 곧 반환점을 돈다.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를 쓴 시절의 청년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가 떠오를 나의 30대는, 그리고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역대 최연소로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40세는 또 어찌할까? 아마도 남은 평생 나는 약 2,500년 전 공자가 만들어놓은 인생의 레벨 업 스테이지인 불혹(不惑,40세) 지천명(知天命,50세) 이순(耳順,60세) 종심(從心,70세)에 이를 때 마다 괴로워할 것 같다. 세상은 자꾸만 "구하구하龜何龜何 머리를 내놓아라" 하는데 어찌 두각頭角을 나타내야 하나? 다들 알다시피 거북이는 느림보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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