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숫자로 씌어진 일기장

(2011년 여름, 스물여덟살의 어느 날)


작년 7월에 입사하여 연수 등등을 마친 후, 근 1년간 엑셀로 가계부를 꼬박꼬박 써오고 있다. 매번 돈을 쓸 때 마다 장부에 쓰는 계속기록법은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얼마 안 돼 포기했다. 그 대신에 나는 매달 말일에 일종의 변형된 실지잔액조사법을 이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먼저 전월 이월 잔액에다 이번 달 통장에 찍힌 급여, 상여 등등을 합친다. 물론 그 기준은 세금을 비롯한 각종 공제금액을 제외한 순수령액이다. 여기서 월말에 각종 계좌 잔액의 합계를 뺀다. 이제 이 차액들 가운데 쉽게 추적 가능한 내역은 소비/투자로 구분하여 기록한다.

* 카드값 ∙ 관리비 ∙ 통신비 ∙ 이자비용 등등은 소비처리한다.

 *주식-펀드매매 ∙ 보험료-연금납입 ∙ 저축 등등은 투자처리한다

  (다만, 보험/연금은 당장 환매할 수 없으니 그냥 소비처리함)

* 전체 차액과 소비/투자액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모두 현금소비로 처리한다.

 이번 달의 가계부를 정리해보았다. 아직 말일은 아니지만 마지막 영업일로서 종가는 나왔으니 주식, 펀드 평가액은 확정이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은 입사 1년을 맞이하여 새삼 지금까지 기록한 내용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계부란 마치 숫자로 기록된 일기장과 같다고 생각한다. 1년간 써온 가계부를 보며 느낀 점 몇 가지.

상여금 없이 기본급만 받는 홀수달은 그 달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살기 힘들다. 평균 카드값을 포함하면 기본으로 나가는 금액만 해도 벅찬 수준. 이 때 마다 나는 한달간 열심히 일해서 우리 회사 돈을 꺼내와 카드회사로 토스해주는 역할만 하는 것 같다.

나는 경제학 책에 나오는 “샤워실의 바보”와 같다. 지금 소비하는 카드값은 다음 달에 현금으로 지출된다. 그런데 무의식중에 나는 짝수달에 풍족함을 느껴 더 많이 긁고 홀수달엔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카드 청구서는 정확히 그 반대로 날아왔다.

합리적인 소비를 위해 가계부를 쓰는 것에 회의를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이 가계부가 내 소비/투자 성향을 파악하는 리뷰 역할은 훌륭하게 해내지만,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피드백 역할은 거의 못하는 것 같다. 소비가 많은 달에도, 수익률이 좋지 않았던 달에도 “음, 그랬군” 하고 넘어간다. 그리고 새로운 한 달을 또 비슷하게 반복한다.

부모님, 동생한테 용돈을 거의 안 줬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1년치를 모아놓으니 꽤나 큰 돈었이다. 약 5초 동안 “우와…저 정도 돈이면 이것도, 이것도, 또 이것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5초간 반성했다. 이렇게 10초 후 나는 평온을 되찾았다.

별 생각 없이 소비하고 투자하지만, 몇 달을 놓고 보면 개인의 소비성향은 어느정도 와꾸(?)가 잡히는 것 같다. 관리비, 통신비, 이자비용, 보험료, 연금 등등이야 당연히 거의 고정되어 있지만 그 밖에 소비도 평균에서 그닥 많이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이 “평균” 자체가 높다는 게 문제…. 하지만 확실히 가계부를 쓰다 보면 미래에도 내가 어떻게 자금을 운용할지를 꽤나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매달 이만큼 버는데 내가 이만큼 쓰고 저축하니 몇 년 뒤면 얼마가 모여 무엇을 살 수 있겠다” 라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데 가계부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대학 때 주식에 살짝 발담그고, 지금은 기관투자자로서 주식 관련 업무를 맡고 있지만 이것이 개인투자 차원에서 “의미있는 수준으로” 시장을 이기는 충분조건은 못 되는 것 같다. 다행이 벤치마크에 비해 부끄러울 만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디가서 자랑할 수익률은 못 된다. 블루칼라의 직접노동에 비해 금융자산에서 나오는 자본이익(capital gain)은 돈을 더 쉽게 버는 듯한 어감을 주지만 역시 세상은 공평하다. 주가의 상승으로 얻는 이득도 본질적으로는 그 주식을 발행한 회사 직원들이 피땀흘려 창출한 가치를 나눠갖는 것에 불과하다. 수많은 기업의 일선에서 노동자들이 흘린 땀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려 공부할 때 비로소 내 잔고도 불어날 것이라 믿는다. 적어도 장기적으로 세상은 정의롭고 공평하다고 믿(고싶)기 때문에.

연봉 총액이 비슷한 회사라 할지라도 그것을 지급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우리회사처럼 단위를 잘게 나누어 홀수달에 월급 한 번, 짝수달엔 두 번 주는 방식은 그닥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냥 연간 총 지급액을 열두번 나눠서 분할지급 하는 게 최고다. 어차피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매달 비슷하다. 짝수 달이라고 하루 여섯끼를 먹지는 않으며, 홀수달이라고 연금/보험료를 반만 내는 건 아니다. 문제는 많이 받는 달에 두 배로 쓰는 건 내 몸과 기분이 알아서 잘 되던데, 홀수달이라고 아끼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아니, 절대 안 된다. 사람은 컴퓨터도, 로보트도, 계산기도 아니니까.

아둥바둥 살고, 불평불만 가득하고, 투덜대기도 하지만… 막상 1년간 받은 순수령액만 더해봐도 꽤 많다. 우리회사에 직원만 4천 명이고 FP는 2만명 정도라고 한다. 매년 들어오는 보험료 총액에서 사고/사망을 당한 고객에게 지급하는 보험금을 빼고도 이 만큼의 잉여가 발생하다니, 회사 직원으로서도 새삼 놀랍다. 물론 내가 회사를 위해 일하는 노동 가치가 나에게 주어지는 급여보다 크기 때문에 회사는 나를 채용한 것이다. 하지만 회사라는 조직이 아니라면 이 정도의 노력에 대해 이만큼의 수고비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 개인이 얼마나 될까?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나 역시도 회사 급여에 대해 내 노력을 지불할 용의가 있으므로 딜이 성사된 것이다. 회사라는 조직이 없다면 이런 기회조차 없다.

마지막으로 좀 슬픈 현실 이야기. 어차피 티끌모아 티끌덩어리 같다. 현실에서는 자회사의 손익계산서보다 모회사의 빵빵한 대차대조표가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물론 그 손익계산서도 안 좋은 것 보단 좋은 게 더 나으니 매일 졸린 눈을 비비며 출근해야지.

불쌍한 자들의 생존법

(2011년 여름, 스물여덟살의 어느 날)


원하는 방향과 그것에 맞지 않는 현실 사이의 인지부조화를 해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내 스스로가 현실에 맞추어 변하는 것, 다른 하나는 현실이 어떻든 그것을 원하는대로 해석하여 둘 사이의 갭을 좁혀서 일치시키는 것.

인지부조화 상태로 평생을 살 수는 없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주위에서 아무리 이 방향이 옳은 것 같다고 해도 스스로가 변할 수 없다면, 혹은 그럴 의지조차 없다면 후자의 방법을 택해야 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자기가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못마땅한 것도 있게 마련. 하지만 후자를 택한 사람은 마음에 드는 것만을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의식적으로 외면하려 한다. 그리고 그 훈련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실제로 보기 싫은 것, 듣기 싫은 것은 알아서 걸러내어 마음 속에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의식적인 자아도, 무의식적인 자아도 스스로를 속이는 데 익숙하다 보니 판단력을 잃고 만다. 자기가 만든 시뮬레이션과 바깥 현실을 혼동하는 셈이다. 자기만의 매트릭스에 갇힌 채로..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는구나." (과연...)
"거봐 내 말이 맞지?" (당신 생각과 일치하는 극히 일부분만....)

애초에 세상과 어긋날 수 밖에 없이 태어난 사람이 정상적으로 자기 수명만큼 살아가려면 생존을 위한  필사의 방법을 써야한다. 내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후자를 택한 사람은 어찌 보면 참 불쌍한 사람이다. 60억 명 중 한명인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나머지 5,999,999,999 명의 소리에 귀를 막아야 하니까. 부적응자들의 필연적인 자기방어기제라고나 할까?

타조는 사냥꾼에 쫓길 때 자기의 머리를 구덩이에 파묻는다고 한다. 자기가 사냥꾼을 보지 않으면 사냥꾼도 자기를 못 본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세상이 자기 눈 하나 감음으로서 바뀐다고 생각한다. 기억력이 짧은 사람을 붕어, 뻘짓하는 사람을 닭대가리라고 하듯이, 세상을 왜곡하여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은 타조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영웅과 멍청이, 그리고 모범시민

(2010년 가을, 스물일곱살의 어느 날)



요즘 매일 5시 45분에 일어나 6시 25분에 집을 나선다. 늦어도 6시 45분 정도에는 버스에 올라타고 직장 근처에는 7시 10분에서 15분 사이에 내린다. 출근 초기에 잔뜩 긴장해서 7시 10분 쯤 회사에 도착할 때 보단 군기가 빠졌지만, 그래도 대부분 제일 먼저 사무실에 도착하여 열쇠로 문을 열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한 번은 출근 길에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다. 분명 평소대로 현관을 나섰는데 20분이 넘도록 내가 기다리는 400-1번 버스는 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 동안 449번은 3대나 지나갔다. 이 버스가 두 번 지나갈 때 까지만 해도 평소보다 조금 늦었다 싶을 뿐이었지만 세 번째 버스가 지나가고 나서는 더이상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그날 따라 왜 이렇게 길이 막히던지. 지산동에서 2.28 공원까지 6,800원이 나왔고 평소와 같이 나는 7,000원을 내고 내렸다. 회사 옆 편의점에서 산 커피까지 합치면 업무 시작도 하기 전에 10,000원 가까이 써버린 셈이다. 그나마 지방에 내려와 돈 쓸 곳 없이 차곡차곡 잘 모으는 요즘인지라 새삼스런 지출이 더 크게 와닿았다.

며칠 후 부모님께 그날 아침의 소동을 말씀드렸다. 이런 경우 시청에 신고를 하면 관련기사를 처벌하거나 심지어 증명할 수 있는 경우 택시비까지 보상 가능하다고 한다. 요즘은 시간대별로 버스기사가 실명제로 운행을 하고 있으며 GPS를 비롯하여 전산 장치가 워낙 잘 돼 있다. 내가 기다린 정류장, 시간, 버스 번호 등을 알려주면 당시에 운행중인 버스기사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사실 며칠이 지났다 해도 내가 몇시 무슨 요일에 그 정류장에 있었는지 똑똑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신고는 가능하다고 한다. 다만 시일이 너무 지났으니 실질적으로 택시비 보상을 받긴 힘들 것이다. 워낙 경황이 없었고 이런 경험도 없었으니 신고는 꿈도 못꿨는데, 막상 지나고 보니 아쉬웠다.

실제로 오늘 낮, 나는 근무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시청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핸드폰을 손에 쥐기까지 했다. 아깝게 버린 7,000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음 졸이며 기약없이 기다렸던 30분 때문에 버스회사가 괘씸했다. 그 기사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만약 그 사정이 정당한 것이라면 그는 정당한 해명을 하고 회사나 시청으로부터 용서를 받겠지. 근무 태만으로 늦었다면 이 신고로 인해 그가 처벌 받는다 해도 결코 그는 억울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머지 않아 나는 핸드폰을 놓아버렸다. 내가 신고를 해서 불만이 접수된다 해도 지금 와서 달라질 것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차피 내 택시비를 보상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 시간과 정신적 노력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달라질 것은 그 기사가 처벌을 받느냐 무사히 넘어가느냐 여부일 뿐이다.

경제학자 제임스 뷰케넌이 창시한 공공선택학파는 특수이익집단의 생리를 "합리적 무시(rational ignorance)"라는 말로 요약한다. 5,000만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인구의 1%에 해당하는 50만 명으로 이루어진 이익집단이 있다. 이들이 5억 원을 들여 어느 국회의원에게 로비를 하여 어떤 재화의 물가 하한선을 두는 데 성공하였고, 이로 인해 이들은 100억 원의 이익이 발생했다고 가정하자.

50만 명의 이익집단은 5억원을 지출하여 100억 원의 이득을 얻었으니 1인당 19,000원의 이득 본 셈이다. 반면 나머지 국민 4,950만 명은 1인당 202원의 손실을 보았다. 일반 시민은 자신이 입은 손실을 빤히 알고 있지만 이익집단을 견제하는 데 드는 비용이 202원 이상이라면 차라리 가만이 있는 편이 이득이다. 전화비, 교통비 등등 아무리 생각해도 202원을 맞추기는 무리다.

하다 못해 나는 버스기사를 신고해도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 그저 근무 태만으로 수많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혔음에도 아무 일 없는 듯 살고 있을 기사를 떠올리면 분통이 터질 뿐. 흔히 "귀찮아서 신고 안 한다."는 말도 결국엔 이 같은 계산을 직관적으로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작은 일에도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분통 터뜨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가끔씩 인간이 합리적 존재인지 의심한다. 저렇게 열 내서 얻는 게 대체 뭘까. "보상금이고 뭐고 필요없다. 너 한 번 혼 나봐라" 하며 갈 데 까지 가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싸워서 이기면 속 시원할까? 지극히 이론적으로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 역시도 개인의 입장에선 비합리적 행동이다. 내 표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수천만 분의 일 밖에 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은 소중한(?) 한 표를 위해 기꺼이 소중한 연휴 아침을 반납하고 교통비를 소비한다.

사람들은 내가 참을성 있고 순하다고 말한다. 뭐 특별히 남한테 피해 안 주고, 가끔씩 입는 이런 피해도 그저 씨익 웃으며 넘어가니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내가 입은 피해에 대해 참을지 그렇지 않을지를 판단하는 것은 결국 어느 쪽이 더 나은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괜시리 온 동네 시끄럽게 해서 이긴들 상처뿐인 영광이라면 무슨 소용이람.

그래도 스스로에 대해 약간의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자면, 주위 사람들에게 202원 이하의 합리적 피해를 입히며 편익을 취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정도이다. 진정으로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라면 최적의 선택은 상대방이 분개하지는 않을 만큼 편익을 가져오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떳떳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런 합리적 무시가 쌓이고 쌓여 집단 이기주의를 방조하기 때문이다.

평일 아침 7시 30분에 400-1 버스를 타는 사람은 최소한 수십-수백 명은 될 테니 그 중에 한 명은 신고를 했으리라 믿는다. 내 경험상 이 사회에는 굳이 자신의 노력을 들이면서도 사회 정의를 위해 아낌없이 불의를 신고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내가 잘 되는 문제 보다는 남이 못 되는 문제에 더 민감한 사람들이 넘치고 있다. 이들은 과연 수많은 시민들의 202원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 영웅일까, 앞뒤 안 가리고 일차원적 감정에 휩싸여 너 죽고 나 죽자 달려드는 멍청이들일까. 난 그냥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영웅이 되기 보단 남에게 피해 안 주는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살고자 한다.

모르페우스를 갈망하며

(2009년 봄, 스물여섯살의 어느 날)


내가 나 자신을 의식적으로 놀라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어린 시절 딸꾹질을 멈추려면 깜짝 놀라게 해야한다는 말을 듣고서, 혼자 가만히 있다가 어느 순간 내 가슴을 쾅 내리친 적은 있었다. 물론 이런 수작으로 스스로를 놀래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놀라게 만들려는 객체가 주체 그 자체이니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런데 조금 더 철이 들어서 나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의문을 가졌다. 내가 꾸는 꿈은 어떻게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일까? 내 꿈 속에서 어떻게 나도 결말을 모르는 소설을 쓸 수 있을까? 비록 자주 꿈을 꾸는 편은 아니지만, 몇 안 되는 꿈들을 되짚어보면 나는 꿈속에서 많이도 웃고, 울고, 놀라기도 했다. 내가 쓴 소설을 내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어떻게 꿈속에서는 내 머리 속에서 나온 무의식이 나를 놀라게 하는 걸까?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이후 학기 중에 나는 늘 수면부족에 시달린다. 시험이 끝난 직후가 아니라면 웬만해서 하루 수면시간은 4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꿈을 꿀 겨를도 없이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지고 만다. 꿈을 잃은(?) 요즘에는 꿈이 그립다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생각까지도 하곤 한다.

수업시간에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을 돌이켜보면, 수면이라는 본능이 고등교육이라는 문명을 여지없이 꺾고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실제로 깨어있음이 이성을 상징한다면, 잠은 본능이다. 이들의 관계는 다른 이분법들로도 정리할 수 있다. 밝음과 어두움, 삶과 죽음 등등. 인간이 문명의 옷을 두껍게 걸침에 따라 자꾸만 외면하려는 본능의 모습. 그 때문에 잠이라는 것 또한 그 존재와 가치를 주목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부쩍 잠이 그립고 소중해진 요즘이기에, 나는 꿈꿀 수 있는 여유로운 휴식을 갈망하나보다.

인간에게 생生에 대한 의지가 있듯, 그 못지않게 죽음死에 대한 의지도 강한 것 같다. 깨어있는 사람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거나, 숙면을 취하던 사람이 괴로워하며 알람시계를 내던지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깊은 잠을 자던 사람이 의지와 상관없이 정신이 맑아지는 경우는 드물다. 고통을 잊게 하고 최면에 빠지도록 도와주는 모르핀morphine이 꿈의 신 모르페우스Morpheus를 어원으로 한 데에는 이 같은 이유가 있다. 꿈은 결코 이성이 생각하는 내가 만들지 않는다. 신화에서처럼 모르페우스가 현실과 똑같은 모습을 한 채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삶을 아름답게 해주는 소소한 일상을 꼽으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이른 아침 잠에 취해 눈을 떠 시계를 보았는데, 너무 일찍 깨어나서 아직 한두 시간 더 잘 수 있을 때, 비록 기운이 없어서 펄쩍 뛰지는 못하지만 난 이 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그 순간을 돌이켜보면 生이 아닌 死를 염원하는 내 모습에 조금 놀라곤 한다. 한편으로는 자궁의 어둠 속에서 마음껏 누리던 쾌락과 본능을 벗어나, 이성이 지배하는 빛으로 괴롭게 쫓겨나는 태아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태아에게 生이라는 이름으로 축하를 보낸다.

시어도어 드라이저Theodore Dreiser의 <시스터 캐리 Sister Carrie>에서는 인간을 동물에 비하면 본능에서 많이 탈피했지만, 아직까지 완벽하게 이성의 영역으로 진입하지는 못한 불완전한 존재로 묘사한다. 나는 이 말 자체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완전하게 이성의 영역에 도달한 존재만을 인간이라 칭하는 듯하지만, 사실 이처럼 불완전한 존재 자체를 지금 우리는 인간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또한 드라이저는 인간의 역사가 끊임없이 이성을 향해 달려간다고 착각한 것 같다. 그리스 시대의 찬란한 이성이, 도킨스Dawkins의 말을 빌리자면‘종교라는 집단적 망상’에 천 년 동안 억눌렸던 암흑시대를 그는 까맣게 잊었나 보다.

우리는 어느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가 잠깐 방심한 나머지 작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인간적인 실수를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가리켜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 부른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른 것과 구분짓는 경계선은 이처럼 이성도 아니고, 본능도 아니다. 인간은 이러한 이중적인 기준을 인식조차 못한 채 그때그때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자신을 차별화한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는 작품의 영감을 얻기 위해 스푼을 든 채 접시를 땅에 두고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잠을 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잠에 들 때 스푼을 놓쳐 “쨍그랑” 소리에 깨는 순간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이성이 지배할 때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자유로운 영감을 그는 꿈 내지는 잠을 빌려 얻었던 것이다. 아마도 내가 꿈을 그리워하는 이유도 이처럼 내가 반인반수半人半獸 켄타우로스Kentauros가 되어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그야말로 불완전한 존재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꿈은 잠과 깨어있음이, 이성과 본능이 다투는 전쟁터이다. 아니, 전쟁터라기 보다는 밤과 아침 사이의 새벽처럼, 나르치스와 골트문트Narziss und Goldmund가 사이좋게 악수를 나누는 평화로운 중립지대다. 완벽한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의 인간에게, 꿈은 안식처와 같다.

이런 사람

(2008년 겨울, 스물다섯살의 어느 날)


내가 학창시절에 꿈꿨던 대학생활을 제시한 것은 바로 드라마 <카이스트>였다. 여느 드라마와는 달리 <카이스트>는 대학 학부과정이 아닌, 대학원 학생들을 소재로 했다. 그만큼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언젠가 연구실에서 교수님, 선후배와 함께 밤새 선학들이 이루어놓은 학문을 배우고, 또 새로운 지식을 창조해내고 싶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스스로를 상아탑에 걸맞는 아카데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내가 그나마 제일 잘 했던 건 공부밖에 없었고, 미래에도 내가 학문의 길 위에서 성공을 거두리라 믿었다. 남들이 이해한다면 나도 할 수 있으리라 장담했고, 나아가 대학원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낼 능력도 지녔다고 생각했다. 2003년, 2004년 두 차례 대학에 들어와서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먼 미래에는 비즈니스계에 종사하리라 생각했고 그래서 경영학과로 왔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강의실과 연구실이 내 삶의 무대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며 조금씩 내 생각은 바뀌었다. 스무살 중반의 젊은이가 가장 열심히 찾아야 하는 세 가지는 ‘하고싶은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것’. 마지막으로 ‘이 둘의 교집합’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조금씩 이 세가지를 찾아야 하는 나에게 있어서 학문의 길은 첫 번째 조건은 충족했지만 두 번째 조건에서 탈락했고, 자연히 세 번째 조건에서는 고려조차 되지 못했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것인 셈이다.

“하면 된다.” 라는 믿음은 아직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않은 게으름뱅이를 자극시키는 데는 좋은 말이다. 반면에 이미 최선을 다해서 과부하가 걸린 사람에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최선을 다 했지만 넘을 수 없는 벽에 좌절한 사람에게 이 말은, 실패의 원인을 끝내 자신의 게으름으로 돌리게 만들어 스스로를 죄인으로 몰아세울 뿐이다. 내 마음 속 재판관은 수 천 번도 넘게 나라는 인간에게 유죄선고를 내려왔다.

한편 사람들은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차라리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에겐 후회의 여지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에게는 적어도 언젠가 다시 한 번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면 이루어내리라는 희망이라도 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지만 이루지 못한 사람에겐 후회도 미련도 없다. 스스로의 두뇌와 유전자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있을 뿐. 이제 운명을 탓하는 것도 면역이 되어 별 감흥이 없을 만큼 나는 이미 무디어졌다.

물론 학문의 길을 걷지 않는다 해서 삶 자체가 막막한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상아탑을 내 평생의 무대로 고려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믿어왔던, 그것도 내 삶을 통틀어 유일하게 나의 자존심을 지켜줬던 하나의 능력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된 젊은이의 마음을 누가 이해해줄까. 그나마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긴다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았다는 판단력 정도인 것 같다. 마치 3인칭 관찰자 시점이나 전지적 시점과 같이 스스로를 성찰하며 산다고 생각했지만, 이처럼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조차 사반세기나 걸렸던 것이다.

이처럼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새롭게 깨닫는 나의 모습이 꽤나 많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껏 내 자신을 너무도 완벽하게 속여왔던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가 변한 것일까?

나는 내 자신이 스스로 동기부여하는 유형의 사람인 줄로 믿어왔다. 그래서 누군가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생각해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주어진 괴로운 일들을 해나가는 원동력이 분명 누군가의 강요 때문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동기는 경쟁자에 대한 승부욕이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 막상 나는 결코 승리에 초연하거나 패배에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시인 서정주를 키운 8할이 바람이라면, 나에게 그 8할은 '이기고 싶은 욕망'이었다. 순진해보이는 인상과 온건한 행동 뒷면에는 남모르는 질투가 감춰져있었다. 물론 내가 승부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예컨데 게임, 스포츠 등- 실제로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가 진정 가치를 두는 일에 대해서는 내 마음 속에 언제나 상대평가 계산기가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결코 지혜로운 아테나도, 용맹한 헤라클레스도, 여유롭고 쿨한 디오니소스도 아니었다. 그저 질투에 불타는 헤라였을 뿐.

절대적인 기준에서 만족스런 성과를 거뒀다 해도 상대적으로 뒤쳐졌다면 나는 괴로웠다. 어쩌면 이것은 더 나은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모두의 성과가 좋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내 위치가 올라갔을 때 내 기분은 어땠었나? 부끄럽게도, 비겁하게도 나는 기뻤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주위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나이지만, 성과의 측정에 있어서 나의 존재는 타인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세상을 바라볼 때도 나는 모든 것을 자본주의의 경쟁원리와 적자생존의 틀에 맞춰서 보는 사람이었다. 경쟁을 통해 선택받음으로써 살아남는 비즈니스의 세계, 그것을 공부하는 경영학에 매료되었다.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변화시키는 물건들도 옛날처럼 장영실이 세종의 명을 받아 만들어낸 발명품들이 아닌,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그리고 이윤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기업인의 머리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래서 내 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 밑줄과 주석까지 달아가며 몇 차례 읽은 책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눈 먼 시계공>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측면에서 나는 겉보다 속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믿었다. 물론 남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는 그 사람의 본질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속된 말로 그 사람의 겉모습이 밥먹여주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는 조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을 내실을 다지는 일이다. 그러나 비슷한 수준으로 속이 꽉 찬 사람이 스스로를 어필하기 위해 겉을 치장하는 것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사실 나는 인성이든 지성이든 내실을 다지는 것이 능력이라면, 그것을 남들에게 전달하는 것 역시 별도의 평가항목을 지닌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스스로의 이런 모습을 깨달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만큼 나의 믿음은 강하다.

사람들은 내실을 100% 채우지 않은 사람이 겉치장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쓸 때 그를 허세부리는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속이 50%인 사람이라도 스스로를 50%이상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도 일종의 자기 관리이다. 반대로 속이 100%인 사람이 겉치장에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아 50%으로 평가받는다면, 그는 자기 게으름 때문에 스스로에게 50%의 죄를 짓는 셈이다. 극단적으로 코카콜라의 설립자 존 팸버튼은 “나에게 25,000달러가 있다면 24,000달러를 광고에, 나머지 1,000달러를 콜라 생산에 쓰겠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사람에게 적용할 때 광고란 단순히 사람의 외모와 옷차림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형식과 의미, 디자인과 컨텐츠, 말투와 내용 등 겉과 속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수도 없이 많다.

이렇게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은희경의 <새의 선물>에서처럼, ‘바라보는 나’ 뿐만이 아닌 ‘보여지는 나’가 함께 있다는 것을 늘 잊지 않고 있다. 나를 포함해 열 사람이 한 방에 있다면, ‘바라보는 나’는 하나지만 ‘보여지는 나’는 아홉 명이다.

외부 세계에 민감한 자아를 가진 나답게 타인의 사소한 칭찬과 비난에도 크게 반응한다. HP의 前CEO 칼리 피오리나의 자서전 <힘든 선택들>에는 그녀가 로스쿨을 자퇴한 직후에 부동산 업체에서 말단 비서로 일하던 시절이 나온다. 당시 그녀가 최선을 다해 일한 원동력이 바로 “상사에게 사람을 제대로 뽑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라는 구절이 있는데, 대수롭지 않은 부분일 수 있지만 나로서는 너무도 공감하는 글귀였다.

분명 나는 남들에게 잘보이고 싶은 욕심이 많은 것 같다. 군대에서도, 까짓거 못한다고 하면 될 것을 잘한다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열심히 하다가 남들보다 1.5배는 더한 것 같다. 대학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팀 프로젝트에서 조용히 묻어갈 수 있지만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경제학에서는 개인별 보상 시스템 보다 1/n로 보상이 돌아가는 프로젝트에서 모두가 열심히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누군가가 지켜볼 때 더 의욕에 불타오르는 것 같다.

새롭게 발견한, 어쩌면 바뀌어가는 지금의 내 모습 중 일부는 예전의 내가 손가락질하고 비웃었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젠 진심으로 지금의 내가 옳은 것만 같다. 인간의 자기주장은 99%가 자기합리화다.

고백하건데 정말로 나도 몰랐었다. 실제로 내가 이런 사람이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