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여름, 스물네살의 어느 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지인과 함께 담배 끊기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둘 중에 먼저 담배를 입에 댄 사람이 다른 한 쪽에게 만원의 벌금을 물기로 한 것이었다. 금액이 지나치게 높으면 약속을 지킨다는 현실성이 떨어지고, 너무 낮으면 다짐이 흔들릴 것 같기에 적당하게 타협한 금액이었다. 사실 이런 비슷한 금연 시도는 그 전에도 몇 차례 해본 적이 있었지만 - 물론 이번 것과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 가끔씩 이렇게라도 담배를 멀리하는 습관을 들이려 노력하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젊어서 그런지 내가 금연의 필요성을 느끼는 이유는 건강 때문은 아니다. 수많은 의학적 근거들이 담배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담배 뿐 아니라 우리가 매일 먹는 것들 중에 해롭지 아니한 것이 어디있는가? TV나 신문에서는 걸핏하면 어떤 음식에서 인체에 치명적인 성분이 검출됐다고 호들갑이다. 하지만 지금껏 그것을 모른 채 매일 먹었으나 오래오래 장수한 많은 사람들은 뭔가? 오히려 이런 잦은 과학자들의 경고 때문에 대중들이 더욱 무신경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진짜 내가 담배를 끊고픈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첫째는 경제적 이유이다. 3일에 두 갑 정도는 꼬박꼬박 피우다 보면 한 달에 5만원 정도는 고스란히 담배값으로 지출해버린다.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있는 정철진의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이 책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근거가 참 재미있다. 하루에 담배 한 갑이면 2천 5백원. 시중엔 1만원 미만인 주식도 많다. 하루에 쓰는 담배값으로 코스닥 주식을 매일 모은다고 가정해보자. 수익이 100프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담배값으로 날리는 것 보다는 비교도 못할 만큼의 재테크 가치가 있다. 특히 몇 달 전 처럼 주식이 크게 폭등한 경우라면 두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이렇게 짤랑짤랑 돈 소리 나는 근거도 솔깃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냥 담배 3~4일 참으면 괜찮은 책 한 권 정도 생긴다고 생각하고 싶다. 전공 공부, 레포트, 시험 등등에 바쁘던 대학생활에서 벗어나 한 달에 10권 내지 많게는 15권 정도의 책을 읽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늘 비싼 책값이 부담이다. 만약 한 달 동안 담배를 안 필 수 있다면 - 물론 실현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는 것은 인정한다 - 지금 보다 넉넉 잡아 5~6권 정도는 더 장만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자주 들르는 헌책방에서 책을 산다면 10권 내지 20권 까지도 가능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 Worwegian Woods>에서 주인공은 왜 담배를 끊었냐는 미도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귀찮아서, 밤중에 담배가 떨어졌을 때의 괴로움......무엇이든 그런 식으로 속박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는 내가 담배를 끊고픈 두 번째 이유를 그대로 잘 말해주었다. 담배 뿐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대상이 없을 때 내가 흔들리고 안절부절하지 못한다면 내가 어떻게든 그 대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나를 쥐어잡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되 기대지 않는 것, 사랑하되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애초에 사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참으로 힘든 일이다.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수필가 피천득씨는 이러한 중용中庸을 잘 실천하신 분인 것 같다. 만약 그가 담배를 전혀 필 줄 몰랐다면 그는 조금이나마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덜 느끼고 떠난 것이다. 반대로 담배 없이 못사는 골초였다면 그는 쾌락에 중독되어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수필집 <인연>에서 그는 누군가가 권하면 기꺼이 함게 담배를 맛있게 즐겼지만 그렇지 않을 땐 전혀 피지 않았다고 한다. 주초酒草에 돈이 나가지 않으니 적은 돈으로 시내를 걸어도 행복했으며 또 가끔씩 얻어피는 담배에 즐거웠으니 또 행복했다고 한다. 참 멋진 분 아닌가?
세상엔 수많은 기쁨과 쾌락이 있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그것이 선사하는 기쁨은 우리가 이 세상을 더욱 살 가치가 있게 만들어준다. 나는 이 원칙이 소위 우리가 말하는 '저급한 쾌락'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사회는 이런 특정한 쾌락을 금기시하고 나아가 법적으로 규제하기도 한다. 나는 그 이유가 쾌락 자체가 나빠서라기 보다는 그것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 채 남들에게 피해를 주고 스스로가 파멸에 이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사랑하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게 하옵소서. 흡연자, 알콜-마약 중독자에게서 행복한 삶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은 지독한 금욕주의자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국의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조부祖父인 제임스 스티븐James Stephen은 우연히 한 번 담배를 피웠다가 '너무 좋아서' 다시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한다. 과연 저렇게 수도승같은 삶이 행복한 삶일까? 나름 고매한 경지에 다다른 사람은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나같은 속인俗人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사랑하는 여인의 부재不在가 가져올지도 모를 공허함이 두렵다는 이유로 사랑조차 안하는 쪽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사랑할 때 뜨겁게 사랑하되 뒤돌아서야 할 땐 슬픔도 미련도 없이, 꺼진 재 위에 모질게 찬 물을 부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낙화>)
필연적으로 나는 담배를 앞에 두고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행복함과 헤어나지 못함으로 인해 느껴야 할 고뇌를 저울질하곤 한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사랑 때문에 느껴야 할 고뇌가 두려워 사랑조차 안 하는 것은 싫다. 하지만 평생을 두고 볼 때 경제적, 심리적 고뇌가 훨씬 크다면 어쩔 수 없이 사랑 자체를 끊는 쪽을 택하고 싶게 마련이다. 지금의 내가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한다.
에쉬튼 커쳐Ashton Kutcher가 주연한 영화 <나비 효과 The Butterfly Effect>에서 주인공은 자신에게 일기장을 통해 그 속에 쓰여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지금의 애인과 사랑하게 됨으로써 모든 것이 망가진 현재 상황에 괴로워한다. 결국 결말 부분에서 그는 애초 자신이 지금의 애인을 몰랐던 때로 돌아간다. 그리고 처음으로 어린 시절의 그 애인을 만난 날, 그녀에게 심한 욕을 해버린다. 이렇게 둘은 평생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가끔씩 담배를 끊으려다 의지 부족으로 실패하곤 할 때 나는 이 영화가 자꾸만 생각난다. 지금도 때때로 담배를 왜 피느냐는 비흡연자의 질문을 듣곤 한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담배에 대한 욕구는 피지 않는 사람에겐 전혀 느끼지 조차 못하는 욕구이니까. 이는 마치 로보트가 성욕, 수면욕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내가 이 담배에 대한 욕구 조차 느끼지 못하던 5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허황된 상상도 하는 것이다.
물론 피천득씨 처럼 필 줄 알지만 절제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기에 차라리 담배를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지곤 한다.
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자유를 위한 구속
(2007년 여름, 스물네살의 어느 날)
테트리스 게임처럼 하루 12시간 이상을 꼭꼭 채우고 있는 시간표. 스님과 제대 직후의 군인 중간쯤 되는 짧은 머리와 똑같은 모양의 교복. 우리 나라 고등학생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만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같이 통제되고 획일화된 교육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도 일부 불필요한 규제는 분명히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는 '과중한 학업량이 청소년들의 창의적인 사고를 개발하는 데 방해가 될 우려가 있다" 라는 이유를 드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나는 기성旣成 교육이 창의적인 사고와 대립된다는 식의 주장에는 결코 찬성할 수 없다.
과연 그들은 선학先學이 이루어놓은 가르침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이해해왔기에 그것을 함부로 캐캐묵은 지식이라 폄하貶下하는 것인가? 과연 그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학업량이 줄어든다고 가정할 때 남는 시간을 얼마나 창의적인 활동에 투자할 계획인가? 혹시나 그들은 현재의 괴로운 학업의 짐을 떨쳐내고자 하는 유혹에 이끌려 억지스러운 근거를 드는 것은 아닐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를 살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자의식과 세계관을 확립한 세대 중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연령대를 꼽으라면 20대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바로 내가 이 연령대에 속한다. 하지만 수천년 전에 만들어진 그리스 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드 Ilias>, <오딧세이아 Odysseia>는 21세기를 사는 나의 가슴에도 여전히 신선한 감동을, 때로는 충격까지 안겨준다.
이런 고전古典들은 오늘날 무심결에 지나치는 주위의 수많은 문화적 컨텐츠contents들에게 모티프를 제공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그 작품을 읽는 동안 스스로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내 상상력이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는 사실을 거듭 깨닫곤 한다.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는 <검은 새를 바라보는 열세가지 방법 Thirteen Ways of Looking at a Blackbird>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13연聯에 걸쳐서 각 연 마다 검은 새를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똑같은 검은 새를 보더라도 혹자는 한두가지 방식으로 밖에 그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상상력이 풍부한 다른 독자는 스티븐스의 13가지를 넘어 더 많은 방식으로 그 새를 바라볼는지도 모른다.
한편 그 새를 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그 새를 부러워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검은 새를 따라 날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의 머리와 가슴을 자극해줄 촉매제觸媒劑가 꼭 필요하다.
헤르메스Hermes의 날개 달린 샌들, 이카로스Icaros와 다이달로스Daedalos의 밀랍 날개,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녀, 하늘을 나는 양탄자 등등의 신화를 읽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비록 똑같이 하늘을 나는 새를 보지만 그들 간에 꿈꾸고, 상상할 수 있는 생각의 범위는 천지차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상상력은 다빈치나 라이트형제가 본격적으로 비행기를 설계하는 과정 이전에 선행돼야 할 필수적인 촉매제이다.
노벨 문학상을 한 차례, 퓰리처상 픽션 부문을 두 차례나 수상한 20세기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William C. Faulkner의 소설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As I Lay Dying>는 특이한 서사 구조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는 무려 15개에 달하는 작중 인물의 시점視點이 복합되어 펼쳐진다. 작가의 이런 독특한 사고의 전환은 세기의 벽을 넘은 오늘날에도 참신함을 넘어 놀라울 정도이다. 그는 우리에게 세상의 진실을 바라보는 입체적인 관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이 세상은 하나의 절대적 진실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수 만큼의 각기 다른 진실들이 복합된 것일지도 모른다.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아침을 알린 나팔로 평가받는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그의 단편집 <픽션들 Ficciones>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보고寶庫이다. 나는 이 300페이지도 안 되는 단편집이 영화 <매트릭스 Matrix>와 같은 최신 할리우드 서사구조를 비롯, 현대 첨단 문화의 분수령이 됐다고 평가한다.
급격한 시점視點의 변경을 통한 반전(<칼의 형상>), 인간의 지적 능력에 대한 새로운 탐구(<기억의 천재, 푸네스>), 찰나Ksana의 무한한 분할을 통해 이르게 되는 영겁Kalpa의 경지(<비밀의 기적>),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종횡무진의 사고(<원형의 폐허들>) 등등은 과연 우리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 망설이게 만든다.
오히려 보르헤스보다 더 많은 조상들을, 더 많은 숙고와 검증의 세월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상상력에 고개숙이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게다가 그의 작품 역시도 노장老莊사상, 불교사상 등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 상상력의 뿌리는 또 수십세기를 거슬러가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된다.
재미있게도 위에서 등장한 작품의 상당수가 몇 년 전 서울대학교에서 발표한 '서울대학교 권장도서 100선'에 포함돼 있다. 그토록 청소년들의 창의성을 저해한다고 비판받는 기성 교육의 정점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그러나 결국 이 학교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름아닌 자유로운 상상력과 그에 따른 창의적 능력임을 알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서 일정 기간 강제적으로 학생들에게 혹독한 훈련을 가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대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잡기 힘든 고기는 바로 '아이디어(漁)'"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기업을 비롯한 현대사회에서는 끝없는 창의성(아이디어)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우리들에게 '소년이 돼라'고 한다. 그는 네덜란드의 예술가 에셔M. C. Escher의 판화 작품 <메타모포시스 Metamorphosis>를 보여주며 소년의 천진난만한 태도로 상투적인 질서를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지라고 강조한다.
나는 여기에 덧붙이고 싶다. 자유롭게 상상하되 치열하게 배우고 사고思考해야 한다. 진중권이 말하는 '천진난만함'은 절대 무지無知 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에 가깝다.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도 애초 가보지 않은 지형 위에는 건물을 지을 수 없다. 아무런 지식이나 노력 없이는 어디에도 자신만의 꿈을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자유로운 상상력의 필요성을' 기성 교육을 거부하기 위한 근거로 드는 것은 속된 말로 '헛소리'다. 선학들이 이루어놓은 고전과 역사를 끝없이 겸손하게 - 물론 비판적으로 - 받아들이고 동시에 치열하게 사고하는 것만이 창조적 자유로 통하는 '좁은 문'의 열쇠이다. 그 열쇠를 얻기 위한 괴로운 훈련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육이자 공부인 것이다.
위에서 등장한 상상력의 천재 보르헤스는 너무 많은 책을 읽은 나머지 젊은 나이에 시력을 읽었다고 한다.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우수한 알파벳 '한글'을 발명한 세종대왕도 지나친 독서로 눈병을 앓았다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창조적인 조상들이 자유롭기 위해 극히 구속당해야 했음을 늘 상기해야 한다. 제발 창조성 내지는 상상력이란 단어를 아무 곳에나 함부로 갖다붙이지 말라.
테트리스 게임처럼 하루 12시간 이상을 꼭꼭 채우고 있는 시간표. 스님과 제대 직후의 군인 중간쯤 되는 짧은 머리와 똑같은 모양의 교복. 우리 나라 고등학생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만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같이 통제되고 획일화된 교육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도 일부 불필요한 규제는 분명히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는 '과중한 학업량이 청소년들의 창의적인 사고를 개발하는 데 방해가 될 우려가 있다" 라는 이유를 드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나는 기성旣成 교육이 창의적인 사고와 대립된다는 식의 주장에는 결코 찬성할 수 없다.
과연 그들은 선학先學이 이루어놓은 가르침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이해해왔기에 그것을 함부로 캐캐묵은 지식이라 폄하貶下하는 것인가? 과연 그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학업량이 줄어든다고 가정할 때 남는 시간을 얼마나 창의적인 활동에 투자할 계획인가? 혹시나 그들은 현재의 괴로운 학업의 짐을 떨쳐내고자 하는 유혹에 이끌려 억지스러운 근거를 드는 것은 아닐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를 살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자의식과 세계관을 확립한 세대 중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연령대를 꼽으라면 20대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바로 내가 이 연령대에 속한다. 하지만 수천년 전에 만들어진 그리스 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드 Ilias>, <오딧세이아 Odysseia>는 21세기를 사는 나의 가슴에도 여전히 신선한 감동을, 때로는 충격까지 안겨준다.
이런 고전古典들은 오늘날 무심결에 지나치는 주위의 수많은 문화적 컨텐츠contents들에게 모티프를 제공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그 작품을 읽는 동안 스스로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내 상상력이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는 사실을 거듭 깨닫곤 한다.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는 <검은 새를 바라보는 열세가지 방법 Thirteen Ways of Looking at a Blackbird>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13연聯에 걸쳐서 각 연 마다 검은 새를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똑같은 검은 새를 보더라도 혹자는 한두가지 방식으로 밖에 그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상상력이 풍부한 다른 독자는 스티븐스의 13가지를 넘어 더 많은 방식으로 그 새를 바라볼는지도 모른다.
한편 그 새를 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그 새를 부러워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검은 새를 따라 날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의 머리와 가슴을 자극해줄 촉매제觸媒劑가 꼭 필요하다.
헤르메스Hermes의 날개 달린 샌들, 이카로스Icaros와 다이달로스Daedalos의 밀랍 날개,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녀, 하늘을 나는 양탄자 등등의 신화를 읽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비록 똑같이 하늘을 나는 새를 보지만 그들 간에 꿈꾸고, 상상할 수 있는 생각의 범위는 천지차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상상력은 다빈치나 라이트형제가 본격적으로 비행기를 설계하는 과정 이전에 선행돼야 할 필수적인 촉매제이다.
노벨 문학상을 한 차례, 퓰리처상 픽션 부문을 두 차례나 수상한 20세기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William C. Faulkner의 소설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As I Lay Dying>는 특이한 서사 구조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는 무려 15개에 달하는 작중 인물의 시점視點이 복합되어 펼쳐진다. 작가의 이런 독특한 사고의 전환은 세기의 벽을 넘은 오늘날에도 참신함을 넘어 놀라울 정도이다. 그는 우리에게 세상의 진실을 바라보는 입체적인 관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이 세상은 하나의 절대적 진실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수 만큼의 각기 다른 진실들이 복합된 것일지도 모른다.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아침을 알린 나팔로 평가받는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그의 단편집 <픽션들 Ficciones>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보고寶庫이다. 나는 이 300페이지도 안 되는 단편집이 영화 <매트릭스 Matrix>와 같은 최신 할리우드 서사구조를 비롯, 현대 첨단 문화의 분수령이 됐다고 평가한다.
급격한 시점視點의 변경을 통한 반전(<칼의 형상>), 인간의 지적 능력에 대한 새로운 탐구(<기억의 천재, 푸네스>), 찰나Ksana의 무한한 분할을 통해 이르게 되는 영겁Kalpa의 경지(<비밀의 기적>),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종횡무진의 사고(<원형의 폐허들>) 등등은 과연 우리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 망설이게 만든다.
오히려 보르헤스보다 더 많은 조상들을, 더 많은 숙고와 검증의 세월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상상력에 고개숙이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게다가 그의 작품 역시도 노장老莊사상, 불교사상 등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 상상력의 뿌리는 또 수십세기를 거슬러가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된다.
재미있게도 위에서 등장한 작품의 상당수가 몇 년 전 서울대학교에서 발표한 '서울대학교 권장도서 100선'에 포함돼 있다. 그토록 청소년들의 창의성을 저해한다고 비판받는 기성 교육의 정점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그러나 결국 이 학교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름아닌 자유로운 상상력과 그에 따른 창의적 능력임을 알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서 일정 기간 강제적으로 학생들에게 혹독한 훈련을 가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대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잡기 힘든 고기는 바로 '아이디어(漁)'"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기업을 비롯한 현대사회에서는 끝없는 창의성(아이디어)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우리들에게 '소년이 돼라'고 한다. 그는 네덜란드의 예술가 에셔M. C. Escher의 판화 작품 <메타모포시스 Metamorphosis>를 보여주며 소년의 천진난만한 태도로 상투적인 질서를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지라고 강조한다.
나는 여기에 덧붙이고 싶다. 자유롭게 상상하되 치열하게 배우고 사고思考해야 한다. 진중권이 말하는 '천진난만함'은 절대 무지無知 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에 가깝다.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도 애초 가보지 않은 지형 위에는 건물을 지을 수 없다. 아무런 지식이나 노력 없이는 어디에도 자신만의 꿈을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자유로운 상상력의 필요성을' 기성 교육을 거부하기 위한 근거로 드는 것은 속된 말로 '헛소리'다. 선학들이 이루어놓은 고전과 역사를 끝없이 겸손하게 - 물론 비판적으로 - 받아들이고 동시에 치열하게 사고하는 것만이 창조적 자유로 통하는 '좁은 문'의 열쇠이다. 그 열쇠를 얻기 위한 괴로운 훈련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육이자 공부인 것이다.
위에서 등장한 상상력의 천재 보르헤스는 너무 많은 책을 읽은 나머지 젊은 나이에 시력을 읽었다고 한다.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우수한 알파벳 '한글'을 발명한 세종대왕도 지나친 독서로 눈병을 앓았다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창조적인 조상들이 자유롭기 위해 극히 구속당해야 했음을 늘 상기해야 한다. 제발 창조성 내지는 상상력이란 단어를 아무 곳에나 함부로 갖다붙이지 말라.
율리시즈(Ulysses)에 얽힌 단상
(2007년 봄, 스물네살의 어느 날)
2003년 3월 2일. 태어나 줄곧 대구에서만 살다가 대학 진학을 서울로 하게 되어 난생 처음으로 사대문 안에 둥지를 트고 생활하게 된 날이다. 모든 것이 낯설기에 느껴야 했던 불안감과 낯섦음, 하지만 오랫동안 꿈꿔왔던 캠퍼스의 낭만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하며 복잡한 심정으로 대학 첫 수업을 듣게 되었다. 내가 가장 먼저 듣게 된 수업은 영어영문학과 개설 교양 수업인 '영미 단편 소설 강독'이었다.
책 읽기는 좋아했지만 평범한 머리로 똑똑한 친구들과 겨루어 좋은 대학 가려 애쓰다 보니 많은 책을 읽지 못했던 고교생활에 대한 아쉬움, 영어 과목을 좋아했기에 영어영문과로 진학하고 싶었던 당시의 바람. 이런 이유들이 겹쳐서 나는 이 강좌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나는 이 수업 광경만은 눈 앞에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물론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었기에 각 작품에 대해 깊이 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난생 처음으로 외국 소설을 원어(原語)로 읽는 것은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처음 20만원을 훌쩍 넘는 전자사전을 서둘러 구입하게 된 것도 이 때의 당혹감 때문이었다. 다음 날 수업의 예습을 위해 미리 작품을 읽어두려는데 몇 페이지 안 되는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단어가 100개가 넘게 나왔으니 그 때의 내 심정은 굳이 더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원어로 돼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교수님에게 애매한 부분에 대한 자신의 의견 및 분석을 내놓는 고학번 형, 누나들 옆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영어 공부에 대한 열의을 한 번 쯤 불태울 만도 한데 이상하게 아직까지 영어 실력에 대한 부족함은 자주 느껴왔지만 그것을 붙잡고 죽어라고 공부한 적은 없었다.
내가 제임스 조이스(James A. Joyce)를 처음 알게 된 계기도 이 수업이었다. 물론 아무리 《율리시즈 Ulysses》가 그의 대표작일지라도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교양 수업에서 그것을 다루지는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 수업에서는 《더블린 사람들 Dubliners》에 수록된 <애러비 Araby>라는 단편만을 다루었다.) 하지만 20세기 영미문학 최고 작가라 불리우는 조이스인 만큼 교수님은 작가 소개에 다른 작가들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 특히 그의 대표작이자 영미문학사에 길이 남을 《율리시즈》에 대해 소개하실 땐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지역의 영미문학 전공 대학생들 조차도 기피하고자 하는 작품'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직 이 작품을 읽지는 못했지만 이 소설엔 '의식의 흐름 기법(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아주 난해한 서술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말 그대로 작중 인물의 의식을 따라 서술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한 통시적, 순차적 서술이 아니다. 게다가 의식이란 아직 언어화 되지 않은 개념이기에 작품 속 문장은 주어, 동사, 목적어를 완벽하게 갖춘 정제된 문장이 아니다. 따라서 화제가 갑작스레 다른 곳으로 전환되는가 하면 한 문장 안에서도 몇 가지 시점이 뒤섞여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분량도 만만치 않다. 올해 번역된 《율리시즈》한글판의 경우에는 1400페이지라는 어머어마한 분량으로 책을 펼치지도 않은 독자들을 미리 잔뜩 기죽게 만든다.
이렇게 교수님이 우리를 약올리시듯 들려주는 작가, 작품 소개는 나로 하여금 더더욱 《율리시즈》에 도전하고 싶게끔 만들었다. 또한 당시만 해도 영문학도를 꿈꾸던 나로서는 언젠간 이 작품을 만나게 될 날이 오리란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물리학도 지망생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거쳐 마침내 초끈이론에 이르는 난해한 과목 소개를 듣게 될 때 느낄 법한 두려움, 도전의욕에 비유하면 적절한 표현일까?
하지만 이런 설렘도 정신없이 흘러가는 대학교 새내기 생활 속에서 조금씩 빛이 바래져 갔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학교와 전공까지 갈아탄 채 전혀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몇 년간 《율리시즈》를 잊은 채 살았던 것이다. 시간은 더 흘러서 새 학교에서도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그런데 뜻밖에 군 복무를 하는 중 나는 실로 오랜만에 조이스와 《율리시즈》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올해 초 신문을 읽던 중 고려대 김종건 교수가 자신이 약 40년 전 번역한 적이 있던 《율리시즈》를 오랜 세월의 수정을 거쳐 노(老)교수가 된 지금 다시금 번역해 내놓았다는 기사를 읽게 된 것이다.
조이스는 《율리시즈》에서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 단 하루 동안의 일을 약 8년의 집필 과정을 거쳐 수 백페이지로 완성했다. 이것을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지구 반대편의 한 노교수가 40년에 걸쳐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한 편의 위대한 작품은 시공간을 넘어서 존재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위대한 작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일 것 같다. 일반적으로 10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하얀 종이 위에 펜으로 뿌린 잉크 자국이 수 백년 동안 사랑을 받는다. 저승에서 내려다 본다면 이보다 뿌듯할 수 있을까? 위대한 걸작은 시간 뿐 아니라 공간의 벽도 허문다. 그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어 수많은 교수들이 연구할 것이고 그 보다 더 많은 수의 논문이 쏟아져 나온다. 그 보다 더 많은 대학생들은 열심히 그것을 공부할 것이고 더 많은 대중(大衆)이 그것을 읽고 사랑해줄 것이다.
그것은 나아가 문화가 되고 가치관이 된다. 수많은 번역가와 출판계, 대학을 살리는 산업이요 경제가 된다. 조이스가 자신이 쓴 《율리시즈》를 두고 "향후 오랜 세월동안 세계의 대학 교수들은 이 작품을 연구하느라 정신없을 것이다." 라고 한 적이 있다. 아마도 이 말은 《율리시즈》의 이러한 파급효과를 미리 염두에 둔 천재로서 던진 여유로운 조크가 아니었을까?
적어도 최근에 《율리시즈》를 번역한 김교수에겐 조이스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는 《율리시즈》를 대학원 시절 처음 만나 번역을 하여 중간에 개정판을 낸 후 70세를 전후한 오늘날 평생의 결정판을 낸 것이다. 그의 삶은 차라리 《율리시즈》를 위한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열정과 헌신에 나는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공들인 번역본도 비록 재창조의 과정을 거치지만 어디까지나 조이스의 원작을 모사(模寫)한 것에 그칠 수 밖에 없다. 어찌 생각하면 이번 번역본은 그의 열정과 더불어 한(恨)의 결정체이리라.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은 흔히 '창작'에 무게를 두어 번역자에게 찬사를 보낼 때 쓰이곤 한다. 하지만 결국엔 번역자는 이 말로 인해 2인자로서 굳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0년을 노력해도 8년의 집필을 한 원작자를 따라잡을 수 없는 숙명은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르를 연상케 한다.
《율리시즈》 재번역판의 기사는 4년간의 세월 속에서 잊혀진 나의 도전 의욕을 새삼 불태웠다. 신입생 시절의 근거 없지만 b확신했던 예감, 조금은 빛이 바랬지만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오기의 불씨. 서점의 해외 문학 코너에 꽂힌 묵직한 1400페이지짜리 검은색 《율리시즈》는 내 가슴 속에 이런 묘한 감정들을 마구 휘젓는다.
하지만 결코 서두르진 않을 것이다. 가장 먼저 《율리시즈》의 기본적 모티브인 《그리스 로마 신화》와 《오딧세이 Odyssey》를 읽을 것이다. 그 다음엔 작가인 조이스와 그의 표현 기법을 이해하기 위해 반(半)자전적 작품 《젊은 예술가의 초상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을 읽을 계획이다. 아직도 이르다. 《율리시즈》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기 전에 그의 단편집이자 처녀작인 《더블린 사람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섭렵한 다음에야 비로소 《율리시즈》에 도전할 것이다. 이 과정을 끝내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난해한 작품인 만큼 이 정도의 노력을 들일 가치는 충분히 있으리라 믿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율리시즈》에서 다룬 하루는 1904년 6월 16일, 내 생일 바로 전 날이다. 유치한 억지이긴 하지만 참 기분 좋은 우연이다. 즉 이렇게 오랜 세월을 거쳐서 복잡하고 난해한 《율리시즈》의 긴 하루를 다 읽고 나면 마치 내가 진정 다시 태어난 것 같지 않을까? 나로서도 이래저래 인연이 있는 작품인 데다가 한 세기에 걸쳐 전 세계인으로 부터 객관적으로 검증 된 작품인 만큼 최소한 그것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가 같지는 않으리라 확신한다.
여담을 덧붙이자면 한 가지 부담되는 사실은 4만원에 육박하는 저 율리시즈스러운 책값이다. 게다가 그의 다른 작품들까지 다 사려면 대체 얼마의 돈을 요구하는 것일지......《율리시즈》라는 제목이 새삼 와닿는다. 저것을 읽기 위해서 신화 속 오디세우스(율리시스는 그리스 신화 오디세우스의 로마식 이름이다) 처럼 오랜 세월의 시련과 역경을 딛고 작품을 읽어나가야 할 내 운명 까지도 예견한 듯 해서 말이다.
2003년 3월 2일. 태어나 줄곧 대구에서만 살다가 대학 진학을 서울로 하게 되어 난생 처음으로 사대문 안에 둥지를 트고 생활하게 된 날이다. 모든 것이 낯설기에 느껴야 했던 불안감과 낯섦음, 하지만 오랫동안 꿈꿔왔던 캠퍼스의 낭만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하며 복잡한 심정으로 대학 첫 수업을 듣게 되었다. 내가 가장 먼저 듣게 된 수업은 영어영문학과 개설 교양 수업인 '영미 단편 소설 강독'이었다.
책 읽기는 좋아했지만 평범한 머리로 똑똑한 친구들과 겨루어 좋은 대학 가려 애쓰다 보니 많은 책을 읽지 못했던 고교생활에 대한 아쉬움, 영어 과목을 좋아했기에 영어영문과로 진학하고 싶었던 당시의 바람. 이런 이유들이 겹쳐서 나는 이 강좌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나는 이 수업 광경만은 눈 앞에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물론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었기에 각 작품에 대해 깊이 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난생 처음으로 외국 소설을 원어(原語)로 읽는 것은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처음 20만원을 훌쩍 넘는 전자사전을 서둘러 구입하게 된 것도 이 때의 당혹감 때문이었다. 다음 날 수업의 예습을 위해 미리 작품을 읽어두려는데 몇 페이지 안 되는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단어가 100개가 넘게 나왔으니 그 때의 내 심정은 굳이 더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원어로 돼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교수님에게 애매한 부분에 대한 자신의 의견 및 분석을 내놓는 고학번 형, 누나들 옆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영어 공부에 대한 열의을 한 번 쯤 불태울 만도 한데 이상하게 아직까지 영어 실력에 대한 부족함은 자주 느껴왔지만 그것을 붙잡고 죽어라고 공부한 적은 없었다.
내가 제임스 조이스(James A. Joyce)를 처음 알게 된 계기도 이 수업이었다. 물론 아무리 《율리시즈 Ulysses》가 그의 대표작일지라도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교양 수업에서 그것을 다루지는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 수업에서는 《더블린 사람들 Dubliners》에 수록된 <애러비 Araby>라는 단편만을 다루었다.) 하지만 20세기 영미문학 최고 작가라 불리우는 조이스인 만큼 교수님은 작가 소개에 다른 작가들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 특히 그의 대표작이자 영미문학사에 길이 남을 《율리시즈》에 대해 소개하실 땐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지역의 영미문학 전공 대학생들 조차도 기피하고자 하는 작품'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직 이 작품을 읽지는 못했지만 이 소설엔 '의식의 흐름 기법(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아주 난해한 서술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말 그대로 작중 인물의 의식을 따라 서술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한 통시적, 순차적 서술이 아니다. 게다가 의식이란 아직 언어화 되지 않은 개념이기에 작품 속 문장은 주어, 동사, 목적어를 완벽하게 갖춘 정제된 문장이 아니다. 따라서 화제가 갑작스레 다른 곳으로 전환되는가 하면 한 문장 안에서도 몇 가지 시점이 뒤섞여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분량도 만만치 않다. 올해 번역된 《율리시즈》한글판의 경우에는 1400페이지라는 어머어마한 분량으로 책을 펼치지도 않은 독자들을 미리 잔뜩 기죽게 만든다.
이렇게 교수님이 우리를 약올리시듯 들려주는 작가, 작품 소개는 나로 하여금 더더욱 《율리시즈》에 도전하고 싶게끔 만들었다. 또한 당시만 해도 영문학도를 꿈꾸던 나로서는 언젠간 이 작품을 만나게 될 날이 오리란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물리학도 지망생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거쳐 마침내 초끈이론에 이르는 난해한 과목 소개를 듣게 될 때 느낄 법한 두려움, 도전의욕에 비유하면 적절한 표현일까?
하지만 이런 설렘도 정신없이 흘러가는 대학교 새내기 생활 속에서 조금씩 빛이 바래져 갔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학교와 전공까지 갈아탄 채 전혀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몇 년간 《율리시즈》를 잊은 채 살았던 것이다. 시간은 더 흘러서 새 학교에서도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그런데 뜻밖에 군 복무를 하는 중 나는 실로 오랜만에 조이스와 《율리시즈》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올해 초 신문을 읽던 중 고려대 김종건 교수가 자신이 약 40년 전 번역한 적이 있던 《율리시즈》를 오랜 세월의 수정을 거쳐 노(老)교수가 된 지금 다시금 번역해 내놓았다는 기사를 읽게 된 것이다.
조이스는 《율리시즈》에서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 단 하루 동안의 일을 약 8년의 집필 과정을 거쳐 수 백페이지로 완성했다. 이것을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지구 반대편의 한 노교수가 40년에 걸쳐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한 편의 위대한 작품은 시공간을 넘어서 존재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위대한 작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일 것 같다. 일반적으로 10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하얀 종이 위에 펜으로 뿌린 잉크 자국이 수 백년 동안 사랑을 받는다. 저승에서 내려다 본다면 이보다 뿌듯할 수 있을까? 위대한 걸작은 시간 뿐 아니라 공간의 벽도 허문다. 그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어 수많은 교수들이 연구할 것이고 그 보다 더 많은 수의 논문이 쏟아져 나온다. 그 보다 더 많은 대학생들은 열심히 그것을 공부할 것이고 더 많은 대중(大衆)이 그것을 읽고 사랑해줄 것이다.
그것은 나아가 문화가 되고 가치관이 된다. 수많은 번역가와 출판계, 대학을 살리는 산업이요 경제가 된다. 조이스가 자신이 쓴 《율리시즈》를 두고 "향후 오랜 세월동안 세계의 대학 교수들은 이 작품을 연구하느라 정신없을 것이다." 라고 한 적이 있다. 아마도 이 말은 《율리시즈》의 이러한 파급효과를 미리 염두에 둔 천재로서 던진 여유로운 조크가 아니었을까?
적어도 최근에 《율리시즈》를 번역한 김교수에겐 조이스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는 《율리시즈》를 대학원 시절 처음 만나 번역을 하여 중간에 개정판을 낸 후 70세를 전후한 오늘날 평생의 결정판을 낸 것이다. 그의 삶은 차라리 《율리시즈》를 위한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열정과 헌신에 나는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공들인 번역본도 비록 재창조의 과정을 거치지만 어디까지나 조이스의 원작을 모사(模寫)한 것에 그칠 수 밖에 없다. 어찌 생각하면 이번 번역본은 그의 열정과 더불어 한(恨)의 결정체이리라.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은 흔히 '창작'에 무게를 두어 번역자에게 찬사를 보낼 때 쓰이곤 한다. 하지만 결국엔 번역자는 이 말로 인해 2인자로서 굳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0년을 노력해도 8년의 집필을 한 원작자를 따라잡을 수 없는 숙명은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르를 연상케 한다.
《율리시즈》 재번역판의 기사는 4년간의 세월 속에서 잊혀진 나의 도전 의욕을 새삼 불태웠다. 신입생 시절의 근거 없지만 b확신했던 예감, 조금은 빛이 바랬지만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오기의 불씨. 서점의 해외 문학 코너에 꽂힌 묵직한 1400페이지짜리 검은색 《율리시즈》는 내 가슴 속에 이런 묘한 감정들을 마구 휘젓는다.
하지만 결코 서두르진 않을 것이다. 가장 먼저 《율리시즈》의 기본적 모티브인 《그리스 로마 신화》와 《오딧세이 Odyssey》를 읽을 것이다. 그 다음엔 작가인 조이스와 그의 표현 기법을 이해하기 위해 반(半)자전적 작품 《젊은 예술가의 초상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을 읽을 계획이다. 아직도 이르다. 《율리시즈》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기 전에 그의 단편집이자 처녀작인 《더블린 사람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섭렵한 다음에야 비로소 《율리시즈》에 도전할 것이다. 이 과정을 끝내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난해한 작품인 만큼 이 정도의 노력을 들일 가치는 충분히 있으리라 믿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율리시즈》에서 다룬 하루는 1904년 6월 16일, 내 생일 바로 전 날이다. 유치한 억지이긴 하지만 참 기분 좋은 우연이다. 즉 이렇게 오랜 세월을 거쳐서 복잡하고 난해한 《율리시즈》의 긴 하루를 다 읽고 나면 마치 내가 진정 다시 태어난 것 같지 않을까? 나로서도 이래저래 인연이 있는 작품인 데다가 한 세기에 걸쳐 전 세계인으로 부터 객관적으로 검증 된 작품인 만큼 최소한 그것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가 같지는 않으리라 확신한다.
여담을 덧붙이자면 한 가지 부담되는 사실은 4만원에 육박하는 저 율리시즈스러운 책값이다. 게다가 그의 다른 작품들까지 다 사려면 대체 얼마의 돈을 요구하는 것일지......《율리시즈》라는 제목이 새삼 와닿는다. 저것을 읽기 위해서 신화 속 오디세우스(율리시스는 그리스 신화 오디세우스의 로마식 이름이다) 처럼 오랜 세월의 시련과 역경을 딛고 작품을 읽어나가야 할 내 운명 까지도 예견한 듯 해서 말이다.
왜 나는 그들을 사랑하는가
(2007년 봄, 스물네살의 어느 날)
시드니 셸던Sydney Sheldon과 피천득. 글쓰기를 업으로 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인종, 국적, 작품의 성격 등등에서 도무지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두 사람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이 두사람에겐 묘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내가 한창 그들의 작품에 빠져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내가 그들의 별세를 알리는 신문 기사를 접할 땐 언제나 그들의 작품을 읽고 있을 때였다. 물론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전설적인 축구 선수 펠레Pele가 자신이 매번 월드컵 직전에 선전을 예감하며 지목한 팀들이 공교롭게도 본선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에 가깝다면 적절한 비유가 아닐까 한다.
이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세계의 죽은 작가들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다. 반드시 문학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사람까지는 아니라 해도 작가라는 직업은 참으로 행복한 일인 것 같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글'이라는 창窓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한다. 나는 이 세상 모든 갈등과 싸움의 원인은 되짚어가다 보면 결국에는 소통의 부재, 그것에 따른 공감대 부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적으로 만약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공감한다면 어찌 갈등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상대방이 느끼는 바를 내가 모두 함께 느끼고 있는데 말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는 그의 글을 읽어주고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주는 많은 친구를 둔 사람이다.
시중에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처세서들이 넘쳐난다. 나는 그런 책들이 싫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얄팍하게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라'는 데서 찾을 수 없다고 믿는다. 작가의 솔직하고 진지한 고찰 끝에 나온 글들을 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넓은 마음을 지니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효용效用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있다. 문학은 "그것이 쓰여진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을 재미있게 실어나르는 당의糖依이다.", "독자가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catharsis)를 위해서 읽는 것이다." 등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장 먼저 "소통과 공감을 위한 경로channel"에 한 표를 주고 싶다.
문학을 매개로 한 소통과 공감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기본적으로는 작가와 독자 사이가 있다. 하지만 그 밖에도 '같은 작품을 읽은 독자 사이', '다른 작품을 읽은 독자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창조적인 소통과 공감이 발생한다. 뿐만 아니라 '작중 인물과 독자 사이'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때 독자는 작중 인물 속에 자신을 투영시킴으로써 가상적인 한 인물의 삶을 대신 살아볼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소통은 우리가 수많은 타인들의 마음 속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을 크게 증가시켜준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영미권 문학에 치우치긴 했지만 최근에 읽은 작품을 되짚으며 생각해보았다. 나보코프V. Navokov의 <롤리타Lolita>에서는 어린 소녀에 대해 성적 도착증性的 倒錯症을 가진 한 교수에게 마저도 그의 증언을 들으면서 함께 동정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었다. 호손N. Hawthorne의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 로렌스D.H. Lawrence의 <채털리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을 보며 불륜을 저지른 여인에게 조차도 무조건 돌을 던지기 보다는 '사랑'이라는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워나갔다.
피츠제럴드F.S. Fitzgerald의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를 볼 땐 개츠비의 사랑에 대한 집착과 좌절의 마음을 공감해나갔다. 조이스J. Joyce 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에서는 예술가적 감수성과 사회적, 종교적 가치가 갈등을 일으키는 한 소년의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속에 나를 투영시킴으로써 주인공 디덜러스S. Daedulus와 함께 예술가적 선택과 자기 유배를 경험할 수 있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원제:Essays in Love)>는 스위스의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쓴, 국내에도 잘 알려진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 제목에 영감을 얻어 세상의 죽은 작가들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왜 나는 그들을 사랑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내가 세상의 수많은 작가, 독자, 작중 인물들과 함께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창窓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 창을 통해서 내 머리와 가슴은 훨씬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나는 또 다시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나는 그들을 사랑하는가?" 이 소설에서는 사랑에 대해 스탕달Stendhal이 언급한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사랑은 대상의 존재 보다는 부재와 연결돼 있다" 나는 그들이 세상을 떠났기에 더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작가가 세상을 뜸으로써 나와 그들은 존재가 아닌 부재로 연결된다. 이제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은 단순히 '소통에 대한 고마움'을 넘어서서 아쉬움과 합쳐져 더 커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동시대에 살고있는 작가들 보다는 이미 세상을 뜬 작가, 예술가들을 더욱 존경하며 때론 우상화 시키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나는 그들을 사랑하는가?" 그것은 내가 그들과 동시대에 살 수 있었던 이번 생애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행운이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과 같은 천재는 나같은 범인凡人과 같은 차원, 같은 시공간의 삶을 살아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나와 같은 차원의 시간 혹은 공간을 살았다는 것은 그들이 특별히 우리 세계를 더 아름답게 해주기 위해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되어 횃불을 가져온 것이라 믿는다. 그들의 죽음은 나에게 내려진 기적같은 소중한 행운과 축복을 끝마치는 조종弔鐘소리이기에, 나는 더더욱 이 짧은 생에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세 번째 이유이다.
시드니 셸던Sydney Sheldon과 피천득. 글쓰기를 업으로 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인종, 국적, 작품의 성격 등등에서 도무지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두 사람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이 두사람에겐 묘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내가 한창 그들의 작품에 빠져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내가 그들의 별세를 알리는 신문 기사를 접할 땐 언제나 그들의 작품을 읽고 있을 때였다. 물론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전설적인 축구 선수 펠레Pele가 자신이 매번 월드컵 직전에 선전을 예감하며 지목한 팀들이 공교롭게도 본선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에 가깝다면 적절한 비유가 아닐까 한다.
이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세계의 죽은 작가들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다. 반드시 문학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사람까지는 아니라 해도 작가라는 직업은 참으로 행복한 일인 것 같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글'이라는 창窓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한다. 나는 이 세상 모든 갈등과 싸움의 원인은 되짚어가다 보면 결국에는 소통의 부재, 그것에 따른 공감대 부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적으로 만약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공감한다면 어찌 갈등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상대방이 느끼는 바를 내가 모두 함께 느끼고 있는데 말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는 그의 글을 읽어주고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주는 많은 친구를 둔 사람이다.
시중에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처세서들이 넘쳐난다. 나는 그런 책들이 싫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얄팍하게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라'는 데서 찾을 수 없다고 믿는다. 작가의 솔직하고 진지한 고찰 끝에 나온 글들을 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넓은 마음을 지니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효용效用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있다. 문학은 "그것이 쓰여진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을 재미있게 실어나르는 당의糖依이다.", "독자가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catharsis)를 위해서 읽는 것이다." 등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장 먼저 "소통과 공감을 위한 경로channel"에 한 표를 주고 싶다.
문학을 매개로 한 소통과 공감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기본적으로는 작가와 독자 사이가 있다. 하지만 그 밖에도 '같은 작품을 읽은 독자 사이', '다른 작품을 읽은 독자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창조적인 소통과 공감이 발생한다. 뿐만 아니라 '작중 인물과 독자 사이'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때 독자는 작중 인물 속에 자신을 투영시킴으로써 가상적인 한 인물의 삶을 대신 살아볼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소통은 우리가 수많은 타인들의 마음 속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을 크게 증가시켜준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영미권 문학에 치우치긴 했지만 최근에 읽은 작품을 되짚으며 생각해보았다. 나보코프V. Navokov의 <롤리타Lolita>에서는 어린 소녀에 대해 성적 도착증性的 倒錯症을 가진 한 교수에게 마저도 그의 증언을 들으면서 함께 동정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었다. 호손N. Hawthorne의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 로렌스D.H. Lawrence의 <채털리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을 보며 불륜을 저지른 여인에게 조차도 무조건 돌을 던지기 보다는 '사랑'이라는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워나갔다.
피츠제럴드F.S. Fitzgerald의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를 볼 땐 개츠비의 사랑에 대한 집착과 좌절의 마음을 공감해나갔다. 조이스J. Joyce 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에서는 예술가적 감수성과 사회적, 종교적 가치가 갈등을 일으키는 한 소년의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속에 나를 투영시킴으로써 주인공 디덜러스S. Daedulus와 함께 예술가적 선택과 자기 유배를 경험할 수 있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원제:Essays in Love)>는 스위스의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쓴, 국내에도 잘 알려진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 제목에 영감을 얻어 세상의 죽은 작가들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왜 나는 그들을 사랑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내가 세상의 수많은 작가, 독자, 작중 인물들과 함께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창窓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 창을 통해서 내 머리와 가슴은 훨씬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나는 또 다시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나는 그들을 사랑하는가?" 이 소설에서는 사랑에 대해 스탕달Stendhal이 언급한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사랑은 대상의 존재 보다는 부재와 연결돼 있다" 나는 그들이 세상을 떠났기에 더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작가가 세상을 뜸으로써 나와 그들은 존재가 아닌 부재로 연결된다. 이제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은 단순히 '소통에 대한 고마움'을 넘어서서 아쉬움과 합쳐져 더 커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동시대에 살고있는 작가들 보다는 이미 세상을 뜬 작가, 예술가들을 더욱 존경하며 때론 우상화 시키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나는 그들을 사랑하는가?" 그것은 내가 그들과 동시대에 살 수 있었던 이번 생애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행운이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과 같은 천재는 나같은 범인凡人과 같은 차원, 같은 시공간의 삶을 살아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나와 같은 차원의 시간 혹은 공간을 살았다는 것은 그들이 특별히 우리 세계를 더 아름답게 해주기 위해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되어 횃불을 가져온 것이라 믿는다. 그들의 죽음은 나에게 내려진 기적같은 소중한 행운과 축복을 끝마치는 조종弔鐘소리이기에, 나는 더더욱 이 짧은 생에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세 번째 이유이다.
책, 무한히 확장된 표현형
(2007년 이른 봄, 스물네살의 어느 날)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 밈Meme으로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의교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확장된 표현형'이란 개념을 내놓은 바 있다. 아직 <확장된 표현형 Extended Phenotype>을 읽지는 못했지만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조금이나마 언급된 설명을 읽어보았다. 원래 표현형이란 유전자가 신체에 끼치는 효과에 대해 말할 때 쓰이는 용어이다. 파란 눈을 갖게 하는 유전자를 지닌 사람이 실제로 파란 눈을 갖는 것, 검은 피부를 갖게 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흑인으로 태어나는 것 등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렇게 전통적으로는 유전자의 표현형이 미치는 범위를 생물체의 몸까지로 한정해왔다. 그러나 도킨스는 이에 그치지 않고 표현형의 효과를 생물 개체의 체벽 바깥까지로 확장시켰다. 비버beaver가 나뭇가지를 모아 댐을 만드는 것, 새가 집을 만드는 것 까지도 모두 유전자의 표현형으로 생각한 것이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 역시도 확장된 표현형이다. 다만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특수성을 꼽자면 그것이 단순한 물리적 편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식과 사고를 돕는 형태로 발전해왔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문자를 발명함으로 인해서 가능해졌으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인쇄술을 발전시킴으로써 급격히 촉진될 수 있었다.
이렇게 책은 인간의 뇌가 수용할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보조기억매체로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PC의 기억 용량을 보안하기 위해 플로피 디스크Floppy Disk, 콤팩트 디스크CD:Compact Disk, USB 등등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간은 책으로 인해 대를 거듭하여 더 많은 정보를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후대 인간은 자신의 조상들이 겪은 시행착오를 피해가며 새로운 지식을 더욱 신속하게 쌓을 수 있었다.
이틀 전 나는 우리 집 책장에 꽂힌 책들을 모두 세어보았다. 약 1천 200권이 조금 넘었다. 여기에 들어간 돈만 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이 되는 셈이다. 주로 나보다는 어머니가 많이 읽으셨으니 아직 나로서는 더욱 무궁무진한 활자의 블루 오션blue ocean을 가진 것과 같다. 아무튼 이 숫자는 회계원리나 조직행동, 치위생학과 관련된 나와 내 동생의 전공 서적들은 제외한 수치이다. 이런 책들은 일반 책들 보다 훨씬 비쌀테니 실제 모든 책들의 가격을 합한다면 금액은 대폭 상승할 것이다.
사람들은 책을 구입하면 무조건 다 읽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심있는 분야의 책을 구입하여 대략적인 내용과 목차를 인지한 상태에서 내 책장에 꽂힌 책은 언제든지 내가 참고할 일이 생길 때 꺼내서 찾아볼 수 있다. 설사 한 번 읽고 세부적인 내용은 잊어버렸다 할지라도 나중에 다시 그것을 떠올리기 위해서 그 책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보조기억매체로써 책을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약 2천년 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는 전 세계의 책을 한 곳에 모아두고자 하는 야심찬 계획 아래 대형 도서관이 건립된 적이 있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왕은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드나드는 모든 배들을 샅샅이 뒤지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밀수품을 검사하려는 것이기도 했지만 더 큰 목적은 책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책이 발견되면 무조건 압수하여 도서관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손으로 베껴 사본을 만들고 난 후 원본을 돌려주는 식이었다. 때로는 탐나는 책이 있을 땐 사본을 돌려주고 원본을 가져가는 야비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이 도서관은 이후 로마의 침략으로 불타버림으로써 인류의 수많은 기억들이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미 수천년 전에도 책은 인간의 귀중한 확장된 표현형으로써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유네스코는 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복원하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물론 이 계획의 목적은 2천년 전과 같은 '지식의 집적'이 아닌 '문화재 복원' 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바이스David A. Vise가 쓴 <구글 성공 신화의 비밀 The Google Story>은 최근 세계적인 인터넷 기업 구글Google이 미국 여러 대학들의 장서들을 스캔하여 구글 페이지에서 검색이 가능하도록 추진하는 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 모든 도서관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아직은 기술적인 문제, 저작권의 문제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일단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한다. 비록 현재로선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 구글의 디지털 도서관은 인간의 확장된 표현형이 지난 스무 세기 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실감케 한다.
인간이 최초로 갖게 된 확장된 표현형은 아마도 지금의 원숭이가 그러듯이 1~2미터 정도의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나무에 달린 과일을 따먹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활이나 창을 이용해서 사냥을 함으로써 표현형이 미치는 범위도 수십미터 단위로 늘어났다. 이렇게 빠르게 확장된 인간의 표현형은 결국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 오늘날 전 세계를 뒤덮으려 하는 것이다.
문득 구글이라는 회사명이 실감된다. 미국의 수학자 캐스너Edward Kasner는 9살의 어린 조카에게 장난삼아 세상에서 가장 큰 수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조카는 1다음에 0을 신나게, 말 그대로 수도 없이 붙인 후 그 숫자를 구골Googol이라고 이름붙였다고 한다. 구글의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과 래리 페이지Larry Page는 처음 회사명을 만들 때 이 구골의 철자를 잘못 써넣어 지금의 구글Google이 된 것이다. 이렇게 구글은 말 그대로 인류에게 구골스러운 혁명을 가져오려 하는 것 같다.
주목할 점은 이렇게 인간의 확장된 표현형이 놀라운 속도로 진화하는 동안에 전통적인 의미의 인간은 과연 얼마나 진화했냐는 사실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은 거의 진화하지 않았다. 이렇게 멀어져만 가는 두 진화의 좌표축 사이에 끼인 인간은 과연 어느 쪽에 자신의 주된 정체성을 두어야 하는 것일까?
책이라는 확장된 표현형으로 전 세계에 양적, 질적으로 급격하게 퍼진 지식은 이제 단순히 소프트웨어software가 아닌, 실제 물리적인 힘을 가진 수많은 하드웨어hardware의 발달도 촉진시켰다. 인간의 과학적 지식은 자동차와 선박을 넘어 이제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로 전 세계를 하루라는 시간 속에 덮고 있다. 급기야 이런 물리적 확장된 표현형은 지구를 벗어나 달까지, 우주에게 까지도 조금씩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워쇼스키 형제Andy & Larry Wachowski가 감독을 맡아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 <매트릭스 Matrix>. 나는 이 영화 속에서 미래에 확장된 표현형이 극대화된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인간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은 기계에 의해 황폐화된 지구. 그러나 그들은 프로그래밍 된 멋지고 화려한 가상 현실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싸우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현실이라고 착각한다.
사실 현실이란 단어 자체도 정의내리기 힘들다. 영화 속 모피어스Morpheus의 말대로 무엇이 현실인가? 보고, 느끼고, 만지고, 맛볼 수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이미 그것은 눈을 감고서 머리에 연결된 프로그램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들이다. 장자將子의 말 처럼 내가 꿈을 꿔서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을 꾼 것이 지금의 나인가. 확장된 표현형이 지금으로선 인터넷 게임, TV 등등과 같은 꿈의 영역이라면 언젠가 이것이 확장되어 과연 어느 쪽이 꿈인지 헷갈리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결국 이렇게 비대해진 확장된 표현형 아래 인간은 기본적인 영양 공급, 배설, 생식을 제외하면 모든 신체적 활동을 확장된 표현형에게 넘기게 될 것이다. 이제 고전적 의미의 인간이라 불리는 동물은 많은 기관이 퇴화될지도 모른다.
스티븐 스필버그Stephen Spielberg 감독의 공상 과학 영화 <ET>의 제작 과정에서는 외계인 ET의 모습을 만들 때 이런 점들을 고려했다고 한다. 버튼을 많이 눌러야 하니 길게 진화된 손가락, 화면을 봐야 하니 커진 눈, 걸어서 이동할 필요가 없으니 짧아진 다리 등등. 미美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하지만 그리 유쾌한 상상은 아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ber의 <나무>에 수록된 단편 <완전한 은둔자>. 주인공 귀스타프는 인간이 육체를 가짐으로 인해 먹어야 하고 자야만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는 영원히 사고思考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수술을 통해 자신의 뇌만을 남겨둔 채 다른 모든 기관을 제거하기로 한다. 그는 수술 전 그의 아내에게 자신의 뇌를 - 자신을 - 영양액 속에 넣은 채 대를 이어 보관해달라고 부탁한다.
만약 여기서 그의 뇌에다가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네트워크 케이블만 꽂는다면 그것이 바로 인류의 미래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단편의 결말은 그의 집에 놀러온 손자의 친구들이 뇌를 함부로 만지다가 쓰레기통에 버리게 되고 결국 그것을 개가 먹는 것으로 끝난다. 이 허무한 결말이 단순히 귀스타프만의 종말은 아닌 것 처럼 느껴진다면 지나친 기우일까?
얼마 전 신문에서 온라인 게임에 푹 빠진 아들을 걱정하는 한 아버지의 상담글을 보았다. 그의 아들은 인터넷 게임에서 아이템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슬픔에 잠겨있다고 했다. 소위 '현실'의 무게를 아직은 '전통적 인간'속에 두고 있는 우리 세대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미 현실의 많은 부분을 '확장된 표현형'인 온라인 세계로 이양시킨 차세대 아이들에겐 그것이 충분히 슬퍼할 만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온라인 상에서 '군주'와 '신하'가 분리되어 신하는 목숨을 바쳐 전쟁에서 군주를 보호한다. 군주는 화면을 보며 혼자서 방안에서 눈물을 흘린다. 온라인을 통해 서로의 아바타avatar에게 선물도 주고받을 수 있으며 채팅을 통해 사랑도, 싸움도 할 수 있다. 심지어 컴퓨터 프로그램을 케이블을 통해 뇌파와 연결하여 성적인 오르가즘을 느끼게 하는 기술까지도 개발되었다는 지금, 애인을 사귀고 결혼을 하는 것 까지 온라인으로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멋 훗날 인류학자에게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지금처럼 '2미터가 조금 안 되는 크기의 생물체이며 하나의 몸통에 머리가 하나, 팔과 다리가 각각 두 개씩 달렸다. 두 손으로는 물건을 잡거나 조작하고 두 다리로는 걷거나 달린다. 그리고 머리로는 생각한다.' 아마도 많은 부분이 수정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젠 손으로 물건을 만질 필요도, 다리로 걸을 필요도, 심지어는 머리로 생각할 필요도 없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 밈Meme으로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의교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확장된 표현형'이란 개념을 내놓은 바 있다. 아직 <확장된 표현형 Extended Phenotype>을 읽지는 못했지만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조금이나마 언급된 설명을 읽어보았다. 원래 표현형이란 유전자가 신체에 끼치는 효과에 대해 말할 때 쓰이는 용어이다. 파란 눈을 갖게 하는 유전자를 지닌 사람이 실제로 파란 눈을 갖는 것, 검은 피부를 갖게 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흑인으로 태어나는 것 등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렇게 전통적으로는 유전자의 표현형이 미치는 범위를 생물체의 몸까지로 한정해왔다. 그러나 도킨스는 이에 그치지 않고 표현형의 효과를 생물 개체의 체벽 바깥까지로 확장시켰다. 비버beaver가 나뭇가지를 모아 댐을 만드는 것, 새가 집을 만드는 것 까지도 모두 유전자의 표현형으로 생각한 것이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 역시도 확장된 표현형이다. 다만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특수성을 꼽자면 그것이 단순한 물리적 편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식과 사고를 돕는 형태로 발전해왔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문자를 발명함으로 인해서 가능해졌으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인쇄술을 발전시킴으로써 급격히 촉진될 수 있었다.
이렇게 책은 인간의 뇌가 수용할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보조기억매체로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PC의 기억 용량을 보안하기 위해 플로피 디스크Floppy Disk, 콤팩트 디스크CD:Compact Disk, USB 등등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간은 책으로 인해 대를 거듭하여 더 많은 정보를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후대 인간은 자신의 조상들이 겪은 시행착오를 피해가며 새로운 지식을 더욱 신속하게 쌓을 수 있었다.
이틀 전 나는 우리 집 책장에 꽂힌 책들을 모두 세어보았다. 약 1천 200권이 조금 넘었다. 여기에 들어간 돈만 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이 되는 셈이다. 주로 나보다는 어머니가 많이 읽으셨으니 아직 나로서는 더욱 무궁무진한 활자의 블루 오션blue ocean을 가진 것과 같다. 아무튼 이 숫자는 회계원리나 조직행동, 치위생학과 관련된 나와 내 동생의 전공 서적들은 제외한 수치이다. 이런 책들은 일반 책들 보다 훨씬 비쌀테니 실제 모든 책들의 가격을 합한다면 금액은 대폭 상승할 것이다.
사람들은 책을 구입하면 무조건 다 읽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심있는 분야의 책을 구입하여 대략적인 내용과 목차를 인지한 상태에서 내 책장에 꽂힌 책은 언제든지 내가 참고할 일이 생길 때 꺼내서 찾아볼 수 있다. 설사 한 번 읽고 세부적인 내용은 잊어버렸다 할지라도 나중에 다시 그것을 떠올리기 위해서 그 책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보조기억매체로써 책을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약 2천년 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는 전 세계의 책을 한 곳에 모아두고자 하는 야심찬 계획 아래 대형 도서관이 건립된 적이 있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왕은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드나드는 모든 배들을 샅샅이 뒤지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밀수품을 검사하려는 것이기도 했지만 더 큰 목적은 책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책이 발견되면 무조건 압수하여 도서관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손으로 베껴 사본을 만들고 난 후 원본을 돌려주는 식이었다. 때로는 탐나는 책이 있을 땐 사본을 돌려주고 원본을 가져가는 야비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이 도서관은 이후 로마의 침략으로 불타버림으로써 인류의 수많은 기억들이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미 수천년 전에도 책은 인간의 귀중한 확장된 표현형으로써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유네스코는 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복원하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물론 이 계획의 목적은 2천년 전과 같은 '지식의 집적'이 아닌 '문화재 복원' 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바이스David A. Vise가 쓴 <구글 성공 신화의 비밀 The Google Story>은 최근 세계적인 인터넷 기업 구글Google이 미국 여러 대학들의 장서들을 스캔하여 구글 페이지에서 검색이 가능하도록 추진하는 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 모든 도서관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아직은 기술적인 문제, 저작권의 문제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일단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한다. 비록 현재로선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 구글의 디지털 도서관은 인간의 확장된 표현형이 지난 스무 세기 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실감케 한다.
인간이 최초로 갖게 된 확장된 표현형은 아마도 지금의 원숭이가 그러듯이 1~2미터 정도의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나무에 달린 과일을 따먹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활이나 창을 이용해서 사냥을 함으로써 표현형이 미치는 범위도 수십미터 단위로 늘어났다. 이렇게 빠르게 확장된 인간의 표현형은 결국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 오늘날 전 세계를 뒤덮으려 하는 것이다.
문득 구글이라는 회사명이 실감된다. 미국의 수학자 캐스너Edward Kasner는 9살의 어린 조카에게 장난삼아 세상에서 가장 큰 수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조카는 1다음에 0을 신나게, 말 그대로 수도 없이 붙인 후 그 숫자를 구골Googol이라고 이름붙였다고 한다. 구글의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과 래리 페이지Larry Page는 처음 회사명을 만들 때 이 구골의 철자를 잘못 써넣어 지금의 구글Google이 된 것이다. 이렇게 구글은 말 그대로 인류에게 구골스러운 혁명을 가져오려 하는 것 같다.
주목할 점은 이렇게 인간의 확장된 표현형이 놀라운 속도로 진화하는 동안에 전통적인 의미의 인간은 과연 얼마나 진화했냐는 사실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은 거의 진화하지 않았다. 이렇게 멀어져만 가는 두 진화의 좌표축 사이에 끼인 인간은 과연 어느 쪽에 자신의 주된 정체성을 두어야 하는 것일까?
책이라는 확장된 표현형으로 전 세계에 양적, 질적으로 급격하게 퍼진 지식은 이제 단순히 소프트웨어software가 아닌, 실제 물리적인 힘을 가진 수많은 하드웨어hardware의 발달도 촉진시켰다. 인간의 과학적 지식은 자동차와 선박을 넘어 이제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로 전 세계를 하루라는 시간 속에 덮고 있다. 급기야 이런 물리적 확장된 표현형은 지구를 벗어나 달까지, 우주에게 까지도 조금씩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워쇼스키 형제Andy & Larry Wachowski가 감독을 맡아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 <매트릭스 Matrix>. 나는 이 영화 속에서 미래에 확장된 표현형이 극대화된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인간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은 기계에 의해 황폐화된 지구. 그러나 그들은 프로그래밍 된 멋지고 화려한 가상 현실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싸우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현실이라고 착각한다.
사실 현실이란 단어 자체도 정의내리기 힘들다. 영화 속 모피어스Morpheus의 말대로 무엇이 현실인가? 보고, 느끼고, 만지고, 맛볼 수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이미 그것은 눈을 감고서 머리에 연결된 프로그램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들이다. 장자將子의 말 처럼 내가 꿈을 꿔서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을 꾼 것이 지금의 나인가. 확장된 표현형이 지금으로선 인터넷 게임, TV 등등과 같은 꿈의 영역이라면 언젠가 이것이 확장되어 과연 어느 쪽이 꿈인지 헷갈리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결국 이렇게 비대해진 확장된 표현형 아래 인간은 기본적인 영양 공급, 배설, 생식을 제외하면 모든 신체적 활동을 확장된 표현형에게 넘기게 될 것이다. 이제 고전적 의미의 인간이라 불리는 동물은 많은 기관이 퇴화될지도 모른다.
스티븐 스필버그Stephen Spielberg 감독의 공상 과학 영화 <ET>의 제작 과정에서는 외계인 ET의 모습을 만들 때 이런 점들을 고려했다고 한다. 버튼을 많이 눌러야 하니 길게 진화된 손가락, 화면을 봐야 하니 커진 눈, 걸어서 이동할 필요가 없으니 짧아진 다리 등등. 미美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하지만 그리 유쾌한 상상은 아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ber의 <나무>에 수록된 단편 <완전한 은둔자>. 주인공 귀스타프는 인간이 육체를 가짐으로 인해 먹어야 하고 자야만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는 영원히 사고思考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수술을 통해 자신의 뇌만을 남겨둔 채 다른 모든 기관을 제거하기로 한다. 그는 수술 전 그의 아내에게 자신의 뇌를 - 자신을 - 영양액 속에 넣은 채 대를 이어 보관해달라고 부탁한다.
만약 여기서 그의 뇌에다가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네트워크 케이블만 꽂는다면 그것이 바로 인류의 미래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단편의 결말은 그의 집에 놀러온 손자의 친구들이 뇌를 함부로 만지다가 쓰레기통에 버리게 되고 결국 그것을 개가 먹는 것으로 끝난다. 이 허무한 결말이 단순히 귀스타프만의 종말은 아닌 것 처럼 느껴진다면 지나친 기우일까?
얼마 전 신문에서 온라인 게임에 푹 빠진 아들을 걱정하는 한 아버지의 상담글을 보았다. 그의 아들은 인터넷 게임에서 아이템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슬픔에 잠겨있다고 했다. 소위 '현실'의 무게를 아직은 '전통적 인간'속에 두고 있는 우리 세대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미 현실의 많은 부분을 '확장된 표현형'인 온라인 세계로 이양시킨 차세대 아이들에겐 그것이 충분히 슬퍼할 만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온라인 상에서 '군주'와 '신하'가 분리되어 신하는 목숨을 바쳐 전쟁에서 군주를 보호한다. 군주는 화면을 보며 혼자서 방안에서 눈물을 흘린다. 온라인을 통해 서로의 아바타avatar에게 선물도 주고받을 수 있으며 채팅을 통해 사랑도, 싸움도 할 수 있다. 심지어 컴퓨터 프로그램을 케이블을 통해 뇌파와 연결하여 성적인 오르가즘을 느끼게 하는 기술까지도 개발되었다는 지금, 애인을 사귀고 결혼을 하는 것 까지 온라인으로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멋 훗날 인류학자에게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지금처럼 '2미터가 조금 안 되는 크기의 생물체이며 하나의 몸통에 머리가 하나, 팔과 다리가 각각 두 개씩 달렸다. 두 손으로는 물건을 잡거나 조작하고 두 다리로는 걷거나 달린다. 그리고 머리로는 생각한다.' 아마도 많은 부분이 수정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젠 손으로 물건을 만질 필요도, 다리로 걸을 필요도, 심지어는 머리로 생각할 필요도 없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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